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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 기자말

7월 27일 판문점에서 드디어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주민들 대부분 휴전을 환영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통일에 잔뜩 기대를 걸었다가 개성도 수복하지 못한 정전 협정에 불만을 품고 군대에 자원하려는 분위기가 생기기도 하였다. 반공 포로인 우리는 휴전이 되었어도 포로송환이 아직 완료되지 않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멸공 전사로 반공 전투에 나가겠다고 국군에 지원하는 혈서를 써서 제출하였다.

서울수복기념식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1950. 9. 29.).
 서울수복기념식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1950. 9. 29.).
ⓒ 맥아더기념관,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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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하순경 우리는 징집되었는데 동네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을 몇백 원씩 받고 옷도 한 벌 얻어 입었다. 우리는 지난 두 달간 만년리 사람들한테 많은 신세를 졌다. 나는 동네 사람들한테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는 면으로 모였다가 함께 해남읍에 도착했다. 

기차는 북으로 장성읍을 향해 달렸다

다음날인 8월 20일경 해남읍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트럭으로 광주로 출발하였다. 옥천면의 비옥한 들을 바라보면서 계곡면으로 달렸다. 오후 4시경 광주 병사구 사령부에 도착했다. 광주시는 그런대로 좋은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군산으로 출발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2년간이나 살았던 광주 상무대 수용소와 사월산 수용소를 바라보면서 '내가 두 달 전만 해도 저기서 살았는데 지금은 자유의 몸이 되었구나' 하고 감상에 젖었다. 멀리 상무대를 바라보면서 기차는 극락강을 돌아 송정리에 도착했다.

기차는 송정리에서 다시 머리를 북으로 돌려 장성읍을 향해 달렸다. 들판의 벼들은 매우 잘 자라고 있었으나 주변의 산은 벌거벗어 나무도 없고 풀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민둥산들이었다. 땅이 나빠서가 아니라 나무와 풀이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모두 땔감으로 베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기차는 장성읍을 지나 삼거리라는 곳에 도착했다. 노령산맥 자락인 이 지역의 산은 매우 크고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었다. 우리를 실은 기차는 사거리에 도착했다. 거기는 집들이 초가들이었는데 전란으로 대부분 타버리고 난 후에 지은 집들이었다. 얼마 안 가서 기차가 노령산맥을 통과하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경찰과 군인들이 주변 경비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는데 빨치산이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군경들이 우리를 보고 안전하니 통과해도 좋다 한 후 기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터널을 지나고 정읍에 도착했는데 넓은 호남평야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기가 바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호남평야구나' 하고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우리가 신태인을 지나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넓은 벌판에 벼가 잘된 것을 기분 좋게 바라보며 고향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어느새 군산에 도착했다. 우리 보충역 입대 심사장인 어느 초등학교로 가서 학교 관사에서 하룻밤을 잤다.

폐 결함으로 입대 불합격... 다시 광주로 염전공사 

다음날 X-Ray를 찍는 등 신체검사를 하여 대부분은 입대했는데 나는 폐에 결함이 있다 하여 불합격되었다.

일행 수백 명 중 나를 포함한 불합격자 56명은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해남군청으로 갔더니 우리를 다시 계곡면으로 보냈다. 계곡면에서는 우리를 성진리에서 십여 리쯤 떨어진 강진군 성전면 경계에 있는 동네로 이관하였다. 8월 31일부터 나는 그 동네 구장인 오구장 댁에서 밥을 먹고 자며 신세를 졌다. 많은 동료가 군에 입대하고 우리만 남았기에 줄곧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나는 거기서 추석을 맞이했다. 주민들이 모처럼 좋은 음식을 차려 단정한 옷을 입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았는데 불과 3~4년 전에 좌익 또는 우익으로 몰려 무더기로 죽은 사람들 제사를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유족들이 서로 천추의 한을 품고 원수 대하듯 할만도 한데 서로 반목하지 않고 다정히 정을 나누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아, 저렇게 순진하고 착한 농민들을 어째서 전쟁 따위로 서로 죽게 하였단 말인가?' 하고 시절을 원망했다.

9월 중순이 되자 우리를 취업시켜 준다고 해남군 황산면 염전공사로 안내했다. 염전공사는 넓은 간척지를 둑으로 막는 공사였다. 간척지에는 물이 빠지면 수많은 짱뚱어들이 펄쩍거리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곳 함바에서 밥을 먹고 흙을 파서 바다를 메우는 일을 했다.

밀물이 들어올 때와 나갈 때 물살이 몹시 셌다. 우리는 애써 만든 둑에 게가 구멍을 뚫을까 염려되어 약을 뿌려 방지하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소금을 만들어 내었다. 이 공사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완성되면 매일 소금 5천 가마를 만들어 낸다고 하였다.

모두 열심히 일했다. 우리는 품삯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일만 했다. 나는 외부 사람과 별로 접촉을 안 했기 때문에 사회 실정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함바에 일하는 스무 살가량의 처녀를 보았는데 얼마나 예쁜지 한눈에 반했다. 착하고 순진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남자들이 그녀를 희롱하여 그 처녀가 가끔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는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밤에 비가 오려고 하자 빨리 소금을 나르라고 하였다. 물이 줄줄 흐르는 소금 가마니를 메고 논두렁을 맨발로 달리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들 수가 없어 애를 먹었다. 여기서 일을 해내려면 기운이 세야 했다.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 해남 경찰서에서 왔다는 경찰이 현장 감독을 하는데 일하는 인부들을 발로 차고 욕을 하며 주먹으로 마구 쳤다. 끌려온 인부는 매를 맞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하찮은 일에 경찰이 현장 감독을 하면서 혹사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와 무엇이 다른가 생각을 했다. 나는 이 못된 경찰이 '혹시 이삼 년 전 양민을 죽인 장본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루는 그가 우리 일행을 세워 놓고 말하길 열심히 일하라고 말하는데 언사가 경우도 없고 교육받지 못한 경관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거기서 계속 일을 하기는 했으나 마음이 떠나버려 차라리 서울로 가서 월남한 친척이라도 있는지 찾아 만나보고 싶었다.
나는 '서울로 가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난 서울 갈래요"라고 말하면 너도나도 따라 나서 못 가게 될까 봐 혼자 떠나기로 결심했다. 

10월 10일, 거의 한 달 일을 했지만,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몰래 서울로 떠날 결심을 했다. 나는 황산면에서 목포로 가는 배를 타고 새벽에 목포로 가서 서울 가는 차표를 8시 전에 사야 했으므로 여기선 5시나 6시에 배를 타야 했다. 밤 11시, 나는 아무 말 없이 염전을 떠났다. 새벽 1시경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배를 타는 곳을 물으니 부두가 1km 정도 된다고 하였다.

나는 그 집에서 잠을 자고 동이 트는 대로 배를 타고 목포로 가서 차를 타고 서울로 가려는 참이었다. 동이 트자 나는 곧바로 부두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배가 오지 않았다. 나는 배가 매일 2시에 오는 줄 알았는데 밀물과 썰물 때를 맞춰 밀물이 10시경에 들어오니 11시경에 배가 온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인근 농가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와서 배를 기다렸다.

갯벌에는 많은 돌을 드문드문 놓았는데 이것은 굴을 재배하느라고 놨다는 것이었다. 넓은 바다에 수백 개의 돌이 깔려있는 것이 보였다. 11시경 배가 오자 부두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돈이 없어 맨 꼴찌에 서서 남이 다 타기를 기다리며 눈치를 보았다.

줄 맨 뒤에는 붉은 보따리를 든 사람이 5명이 서 있었는데 승객들이 모두 승선한 후 선원이 그들을 보고는 갑판으로 타라 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함께 얼른 갑판으로 올라갔다. 다른 사람에게는 표를 받았지만, 이상하게 우리에게는 표를 받지 않고 빨리빨리 타라는 손짓만 하였다. 나는 '오늘 운이 좋구나'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이곳을 떠나며 그동안의 일을 떠올렸다.

'자유 대한에 나와 처음으로 사회에 발을 디딘 곳, 그리고 이제 서울로 가는구나.'

멀리 완도와 진도의 산이 보이고 영암의 월출산도 보였다. 모두 경치가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배는 가면서 작은 부두에 닿을 때마다 손님들이 타고 내렸다. 짐도 싣고 부리기도 했다. 깊이 들어온 바다 골짜기는 '저 끝을 막으면 넓은 들판이 생기겠네?'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붉은 보따리를 든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얼마를 가다가 한 사람이 내게 "당신도 환자요?"라고 물었다. 나는 환자가 아니라고 얘기하니 "그럼 당신은 가시오. 우리는 환자요" 라고 하였다.

"우린 문둥병 환자요. 당신은 아닌 것 같은데 모르시는 모양이군."

나는 그 말을 듣고 몸이 움찔했다. '문둥병 환자, 말로만 듣던 병이 정말 있구나' 하고 그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네 사람의 얼굴과 눈은 이지러졌어도 손가락을 분간할 수가 있었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배를 탄 지 3시간 만에 목포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내리는데 부두에서 선원이 손님 하나하나마다 배표를 받다가 문둥이들이 내리니 고개를 돌리며 피하는 틈을 타 나도 얼른 따라 내렸다.

목포는 보기보다 부둣가에 이층집이 많이 있었다. 나는 '건물이 훌륭하구나'라고 생각했으나 다른 시내 건물은 별 볼일이 없었다. 나는 시내 구경을 하느라 서울행 기차를 놓쳐버려 그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

시내 구경을 하는데 웬 아이가 앞을 싹 지나면서 내 만년필을 빼내 갔다. 나는 '소매치기를 당했구나!' 하고 얼른 그를 붙잡았다.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씩씩대고만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 애는 벙어리요" 해서 나는 두 말 하지 않고 그를 놓아 주었다. 그 길로 시장에 가서 십 원을 주고 국밥 한 그릇을 사 먹고 온종일 목포 시내를 다니면서 구경을 했다. 부두에는 섬을 왕래하는 작은 배들로 차 있었고 큰 기선 두 척이 짐을 부리고 있었다.

그날 밤 잠을 하숙집 처마 밑에서 자고, 아침 8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호주머니엔 한 푼의 돈도 없이 똑 떨어졌다. 아끼던 돈으로 몽땅 차표를 사고 나니 빈털터리가 됐다.

기차는 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들판이 보이고 멀리 동쪽으로 월출산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아름답게 보였다. 나주를 지날 적에 한 소년이 차에 오르는데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잘 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 소년은 내 뒤에 앉았다.

나주를 지나 송정리에서 기차는 장성을 향해 달리는데 멀리 사월산 수용소가 보였다. 넉 달 전만 해도 저곳에 갇혀 있었는데 지금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수용소야 잘 있거라. 나는 이제 영원히 간다.'

나는 임자 없는 수용소를 보고 시원섭섭한 이별을 고했다.

장성읍을 지나 삼거리에 도착하니 군데군데 벼를 벤 것이 보였다. 우리를 태운 기차는 정읍을 지나 호남의 곡창을 달리기 시작했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은 평야가 황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김제를 지날 땐 12시가 되었다. 나는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옆에서 음식을 사 먹는 것을 보면 목에서 침이 자꾸 넘어왔다.

멀리 보이는 계룡산, 남으로 보이는 노령산맥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대전을 지나니 저녁이 되었고 천안을 지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밤 9시 영등포에 도착했다. 내 뒤에 앉은 소년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더니 서울 신당동으로 간다고 하였다. 사정이야기를 하고 그를 따라 하룻밤을 지낼까 생각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등포에서 들리는 말이 도강증이 없으면 서울로 못 들어간다고 했다. 나는 미리 겁을 먹고 영등포에서 내렸다. 평화여관에 가서 나는 반공 출신인데 하룻밤 쉬어가자 했다가 거절을 당했다. 나는 어느 민가에 가서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하룻밤을 보냈다.

날이 밝아왔다. 어제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몹시 고팠다. 어디 일하는 데가 있으면 일을 해서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리저리 일을 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는데 누군가 노량진에서 영등포로 가는 전찻길을 닦는데 거기서 일을 하라고 얘기해 주었다.

공사장에 가니 감독이 하는 말이 하루 품삯이 백 원인데 오늘은 사람이 다 찼으니 내일 오라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이리저리 주변을 두루 살폈다. 잘 생긴 상이용사가 의족을 짚고 부자연스럽게 서 있고 옆에는 젊은 색시가 남편을 붙들고 서있었다. 상이용사는 한숨을 지으며 남산을 바라보고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을 위로하는 것이 보였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가 상이용사가 되었으니 그 심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젊은 아내의 심정도 불구의 남편을 평생토록 받들고 살 생각을 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에 배고픔도 잠시 잊었다. 

영등포역에서 만난 노인 "자네 일 좀 하겠나?"

영등포역을 지나 길에 오르니 여의도비행장이 보였다. 많은 비행기가 비행장에 꽉 차 있었다. 나는 뱃속에서 '쪼르륵' 하는 소리를 들으며 어디 공사판에 가서 일하고 요기나 해야겠다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느 골목을 지나는데 노인들이 있었다. 나는 한 노인에게 "어디 일 할 만한 데 없나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자네 일 좀 하겠나?"라고 하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냉큼 "일하지요" 하고 대답하니 "그러면 이리로 가게" 하고 종이에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러며 '김포군 양동면 화곡리로 가서 아무개를 찾아 "영등포에 사는 아무개가 보내서 왔소" 하면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쪽지를 들고 김포를 향해 떠났다.

가는 길에는 넓은 한강을 바라보면서 걸어갔다. 양화교에 이르자 검문하는데 나보고 가도 된다고 통과시켜줘 계속 걸어갔다. 배에선 연신 쪼르륵 소리가 나는 가운데 오후 3시경 양동면 화곡리 마을에 당도했다. 마을 입구에 밤나무들이 많이 있어 생밤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힘이 빠져 밤나무 밑에 누워 하늘을 보며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지금 이북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살아있을까? 만약 살아있다면 얼마나 고생하고 계실까?'

보고 싶은 얼굴이 한참 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와 같이 나온 친구들의 행방은 어찌 되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음이 슬퍼졌다. 얼마나 그런 생각에 빠졌을까? 해가 서편에 기울었다. 나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을 퍼뜩 차리고 힘을 내어 마을로 들어가 쪽지에 적힌 대로 찾아갔다.

수소문해 찾아간 집은 아담한 초가집이었다. 나는 "주인 계십니까?" 하고 여쭈니 "누구요?" 하며 50대 남자가 나왔다. 나는 "영등포 아무개 노인이 아저씨네 가서 일하라 해서 왔습니다" 하고 인사했더니 친척을 맞이하듯 반가워하며 맞아주었다. 나는 뜻밖에 반가워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기뻤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방에 들어갔다. 

그는 "영등포 영감은 나의 친한 친구이며 사람을 구해준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며 "우리 집에 일이 태산같이 많으니 잘 해 달라"라고 부탁하였다. 나보고 "고향이 어디요?" 하고 묻기에 강원도 이천이라 얘기하고 부모 형제에 대해서도 사실대로 대답했다.

조금 있으니 밥을 한 상 차려왔다. 나는 어제 저녁을 먹고 지금까지 세 끼를 굶은 형편이라 무척 먹고 싶은 밥이었다. 나보고 많이 먹으라고 권해 마음껏 먹었다. 그날 저녁 나는 단잠을 잤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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