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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이주노동자 23만명 시대. 한국인들이 더럽고, 힘들고, 위험하다고(3D) 피하는 일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내는 이주노동자들. 그들을 빼고 한국의 산업을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노동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정작 속내를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번 기획에서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아닌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주노동자의 모습을 담아본다. [편집자말]
"겨울이 정말 힘들어요. 우리나라에는 겨울이 없잖아요. 그래서 겨울이 정말 힘들어요."

서울 경기 지방에 한파주의보가 내린 1월의 어느 토요일.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 산지와(33)가 일하는 경기도의 작은 공장을 찾았다. 토요 휴무제를 하는 공장이라 한국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스리랑카 노동자 네 명만 흰 입김을 뿜어내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국 생활 9년차 스리랑카 노동자 산지와

산업용 보온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산지와
 산업용 보온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산지와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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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토요일 일요일은 쉬는 날이지만 하고 싶으면 일을 해도 돼요. 휴일엔 수당이 붙으니까 쉬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해요. 여기 돈 벌러 왔으니까 돈 많이 벌려면 쉬는 날도 일해야 해요."

산지와가 일하는 곳은 건축용 보온제를 생산하는 소규모 공장이다. 한국인 노동자 3명과 스리랑카 노동자 4명, 총 7명이 일을 하고 있다.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산지와는 올해로 서른 셋이다. 스물넷에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니 어느새 한국 생활 9년차다.

능숙한 한국어 솜씨와 김치 없이는 밥을 먹지 못하는 식성까지 '이제는 한국사람 다 되었다'고 농담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못 사는 나라에서 온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이며 노동자로만 대하는 한국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할 때면 크고 높은 장벽을 느낀다.

"어릴 때 우리집 가난했어요. 엄마는 저 한 살 때 두바이로 메이드(가정부) 일하러 갔어요. 그래서 할머니 하고 살았어요. 엄마가 번 돈으로 집을 사고 가게를 했어요. 나는 계속 할머니랑 살다가 여섯 살에 엄마 아버지 동생들과 함께 살게 되었어요."

가난 때문에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할머니 손에서 자란 산지와. 그렇게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되었지만 형편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학교 공부는 나라에서 시켜주고 땅에서 먹을 것이 나니까 굶어 죽은 사람은 없지만 부자도 잘 없어요. 땅을 가진 사람들이 부자인데 부자는 항상 부자고 가난한 사람들은 늘 가난해요. 부자들은 집도 크고 땅도 많고 차도 몇 대씩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해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저 어릴 때 생각했어요. 부자 되고 싶다구요."

부모님은 아이들의 교육과 뒷바라지에 부족함이 없게 하고 싶어 하셨지만 아버지 혼자 벌이로 여섯 가족이 살아야 하다 보니 빠듯한 살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목돈을 만질 수 있는 해외취업은 솔깃한 제안이었다. 엄마도 두바이로 일하러 다녀와 집을 마련했지만 일본으로 일하러 다녀온 앞집 아저씨는 두바이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벌어와 집도 사고 차도 사고 하루 아침에 큰 부자가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사람 외국으로 일하러 많이 가요. 두바이에 제일 많이 가구요. 유럽 쪽에 많이 가지만 일본에 간 사람도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일하면 한 달에 8만 원, 10만 원 받는데 집세 주고 전기요금 내고 그러면 돈 남는 거 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밥만 먹고 살아야 해요. 여동생이 셋 있는데 동생들 결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해요. 아버지 버는 걸로는 동생들 결혼할 수 없어요."

"이 새끼야, XX놈아... 막 욕해요. 잘 몰라서 그런 건데"

산지와는 사업주와의 좋은 관계는 불량률도 줄인다고 말한다.
 산지와는 사업주와의 좋은 관계는 불량률도 줄인다고 말한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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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스물넷의 산지와는 가슴에는 가족에 대한 막대한 책임감과 부자로 살겠다는 꿈이 가득했다. 독일로 광부 일을 하러갔던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달수(황정민 분)처럼 산지와 역시 달러를 벌기 위해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미지의 땅인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무섭고 두려웠지만 돈을 벌어야 하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었어요. 처음엔 안산에 PVC 파이프 공장에서 일했어요. 거기에 중국 사람, 스리랑카 사람 있었는데 나중엔 중국 사람은 나가고 스리랑카 사람들만 있었어요. 잠은 기숙사 컨테이너에서 자고 하루에 12시간씩 일했어요. 밥 먹는 시간은 15분이에요. 15분 안에 밥을 먹고 다시 일 해야 해요. 세 명씩 교대근무를 하는데 한 사람이 밥 먹고 오면 다른 사람이 빨리 밥 먹고 오고 또 그 다음 사람이 밥 먹고 오고… 밥은 무조건 15분 안에 다 먹고 돌아와야 해요."

한국에 올 때는 하루 8시간 일하고 65만 원의 월급을 받는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장님의 이야기는 달랐다. 하루 12시간 2교대 근무가 원칙이라고 했다. 같이 온 친구는 6개월 만에 다른 공장으로 옮겨갔지만 산지와는 120만 원을 받는 조건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외국에 나온 것이니 잠을 줄여서라도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땅 설고 물 설은 외국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발짓으로 일을 배워야 했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실수도 많았고 그럴 때마다 사장님의 욕설이 이어졌다.   

"이 새끼야, XX놈아... 막 욕해요. 잘 몰라서 그런 건데 이렇게 알려주면 좋겠는데 무조건 막 욕을 하니까 그때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돈 벌기 위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어요. 받은 월급은 다 부모님께 보내고 나는 일요일에 일을 해서 받은 돈으로 살았어요. 일요일에 일하면 월급 외로 5만 원씩을 받거든요. 그거 모아서 전화비 내고 간식도 사먹고.

그러다 1년 6개월 만에 화상을 입었어요. 한 달 뒤면 동생 결혼식이라 집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집에는 다쳤다는 말도 하지 않고 너무 일이 많아서 못 간다고 했어요. 구로동에 있는 화상병원에 3개월 동안 입원했는데 그때 만약에 낫지 않으면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죽겠다고 생각했어요."

입원 3개월간 산지와는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했다. 화상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렵고 무섭고 답답하고 궁금해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저 벙어리 냉가슴만 앓을 뿐이었다.

"사고 당하고 스리랑카 대사관에 전화를 했어요. 일하다 화상을 입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대사관에서는 알았다고만 하고 아무런 조치도 없었어요. 그땐 스리랑카가 우리를 다른 나라에 팔아먹었다고 생각했어요. 자기 나라 국민들이 외국에 나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보내는데... 그래서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되는데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모른 척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때 한국 사람들이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위로도 해주고 기도도 해주고 격려도 해주고. 지금도 저를 돌봐주셨던 선생님에게 고마워요. 저에게 정말 친절하셨거든요."

산지와가 병원에 있는 것을 모른 채 고향의 가족들은 첫째 여동생 나티카의 결혼식을 치렀다. 산지와 아버지가 번 돈 300만 원에 그가 번 돈 300만 원을 보태 600만 원으로 혼수를 장만해 결혼식을 치른 것이다. 이제 겨우 타국에서 적응해 첫 번째 여동생 시집도 보내고 돈도 조금씩 모아가고 있는데, 온몸에 화상이라니... 그러나 산지와는 기적적으로 3개월 만에 화상치료를 마치고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

"퇴원해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서 나머지 비자 기간 동안 일을 했어요. 그리고 2008년 집으로 돌아가 7월에 결혼도 했어요. 3년 동안 번 돈을 고스란히 모아 첫째 여동생을 결혼 시키고 저도 결혼하고 그리고 콜롬보 남동쪽 지역에 차밭 1600아르를 샀어요. 처가가 그쪽인데 차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걸 해보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라도 나를 팔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화상 환자인 나를 살린 건...

따뜻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노동자에게 한국의 겨울 추위는 혹독하다
 따뜻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노동자에게 한국의 겨울 추위는 혹독하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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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설고 물 설은 나라 한국에 와서 3년 동안 갖은 어려움을 견뎌가며 이루어낸 기특한 결과였다. 하지만 산지와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위해 한국행을 한 번 더 결심했다. 처음 3년 동안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제 말도 좀 익히고 김치 맛도 알게 되었으니 두 번째 3년은 첫 3년에 비해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2008년 겨울에 다시 한국에 왔어요. 원래 있던 안산 공장 사장님이 다시 초청을 해주셨어요. 그런데 그때는 처음과 달랐어요. 사장님이 너무 욕을 했어요. 내가 생각하기에 별로 잘못한 것이 없었는데 자꾸 욕을 하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사장님은 일을 더 많이 하길 원했어요. 저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는데도 사장님은 욕을 하면서 일을 더하라고 했어요. 너무 화를 내고 욕을 하니까 정말 참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만 두고 나갔어요."

회사를 나온 산지와는 한동안 일을 찾기가 어려웠다. 3개월 안에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불법체류자가 되어 강제출국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마음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2009년에 한국 사정은 좋지 않았어요. 공장들이 문을 닫아서 일자리가 없었고 일을 해도 월급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많았어요. 저도 매일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느라 돈만 쓰고 참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지금 회사 사장님을 만났어요. 사장님은 제가 한국말을 잘한다고 좋아하셨어요.

스리랑카 사람을 데리고 있는데 말을 잘하지 못해서 힘들었다며 내가 가면 그 사람들에게 말을 조금 할 수 있을 것 같다구요. 지금 사장님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욕을 하지 않았어요. 돈 조금 받아도 욕하지 않는 사장님이 좋아요. 아무리 돈을 많이 받아도 욕하고 때리고 무시하고 그러면 외국 사람도 일하고 싶지 않아요."

두 번째 취업기간 중 두 번째 여동생이 결혼을 했고 예쁜 딸도 생겼다. 차밭 근처에 집도 지었고 할부지만 차도 구입했다.

"두 번째 여동생 결혼할 때는 땅을 산다고 해서 500만 원을 빌려줬어요. 아내가 싫어할 수도 있지만 엄마, 아버지 나이가 많아서 돈을 벌지 않으니까 내가 동생을 도와줘야 해요. 부모님 생활비도 줘야 하구요. 지금도 막내 여동생 결혼을 위해서 와이프 모르게 부모님께 따로 돈을 보내고 있어요. 사람들은 어렵게 번 돈으로 왜 여동생을 도와 주냐고 하지만 스리랑카에서는 여자가 결혼해서 잘 살려면 살림살이를 많이 사가지고 가든지 돈을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산지와에게는 다섯 살 된 딸이 있지만 한 살 때 잠깐 본 이후로는 안아주지도 놀아주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 한 살 된 산지와를 두고 두바이로 일하러간 엄마처럼 산지와 자신도 한 살 된 딸을 두고 한국에 나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헤어져 지내고 있는 것이다.

"딸도 보고 싶고 와이프도 보고 싶어요. 하지만 참았어요. 내가 생각한 만큼 돈을 벌어서 가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올해 7월에 집에 가요. 집에 가면 차밭도 하고 한국말 잘하니까 한국 사람이 여행 오면 가이드도 할 거예요. 그리고 저처럼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돈 많이 벌어 부자되자던 꿈, 어려운 사람 돕는 걸로 바뀌었어요

한살배기였던 딸이 다섯살이 되도록 만나지 못했지만 딸과 아내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는 산지와
 한살배기였던 딸이 다섯살이 되도록 만나지 못했지만 딸과 아내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는 산지와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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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들이 몇 있다. 한국으로 취업을 나오려고 할 때 수속을 할 수 있도록 돈을 빌려준 작은 아버지, 화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런 저런 도움을 주며 위로와 기도를 해주었던 한국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인 산지와를 아들처럼 여기며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 지금의 사장님.

"돈이 너무 없어서 외국에 나갈 수 없겠다 생각했는데 작은 아버지가 돈을 빌려줬어요. 그러니 정말 고마워요. 병원에서 죽으려고 할 때 한국 사람들이 도와줘서 죽지 않고 살아서 다시 일을 하게 되었어요. 지금 사장님은... 정말 고마워요. 한 번도 욕하는 소리 들어보지 않았어요. 큰소리도 안 쳐요. 2013년에는 스리랑카 우리 집을 방문해서 딸 옷도 선물해 주고 안아주고 놀아주고 사진도 찍어주고... 저에게는 정말 아버지 같은 사람이에요. 저도 이런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을 도울 거예요. 그게 제 꿈이에요."

한국 생활 9년 만에 산지와의 꿈이 달라졌다. 한국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열심히 벌어서 부자로 사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부자로 사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도우며 살고 싶은 꿈을 갖게 되었다.

"우리 밭에서 나는 차는 좋은 종류라서 생 찻잎 1킬로그램에 1000원을 받아요. 안 좋은 것은 1킬로그램에 75원을 받는데 거기에 비하면 좋은 값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한 달에 55만 원에서 65만 원 정도는 벌 수 있어요. 부모님 생활비 보내고 우리 가족 사는 데는 조금 부족하지만 차 따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주고 있어요. 다른 차밭은 5천 원 정도 주는데 저는 6천 원을 줘요. 그리고 같은 사람이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해줘요. 그래야 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한국에 나와 일을 해보니까 계속해서 일자리가 있어야 하겠더라구요. 그러면 차밭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돈을 벌고 나도 돈을 벌 수 있을 거예요."

산지와의 꿈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커진 것이었다. 나만 잘 살겠다는 생각에서 함께 잘 살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으니 그의 달라진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터뷰를 마치며 산지와는 자신과 같은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 군데 오래 있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회사를 옮기면 퇴직금이 적어요. 못 받을 수도 있어요. 월급이 적어도 한 회사에 오래 있으면 퇴직금도 받을 수 있고 일이 익숙해지면 사고도 잘 나지 않아요.

우리 친구는 다른 회사로 옮긴 지 한 달 만에 사고가 나서 두 다리를 잃었어요. 이전 공장 사장님이 너무나 욕을 하고 괴롭혀서 더 일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나와서 일자리를 찾으려니까 일자리가 별로 없었어요. 석 달 안에 구하지 못하면 강제출국 당하니까요. 그래서 급한 마음에 쓰레기 처리 공장에 들어갔는데 사고가 났어요. 다음 달에는 스리랑카로 돌아가야 하는데 보상금 받기도 힘들었어요.

처음엔 몇백만 원 준다고 그랬는데 병원에서 만난 브로커를 통했더니 600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원래는 더 많이 받았는데 브로커에게 25%나 30%나 더 많이 줘야 한대요. 브로커에게 돈을 줘도 그만큼 받으면 다행인데 그래도 수수료가 너무 비싼 거 같아요. 한국말도 못하고 한국법도 잘 모르니까 우리한테 그러는 거 같아요. 그 친구는 아이가 셋이나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지 너무 걱정돼요."

산지와는 올 7월이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2000아르가 넘는 차밭의 주인이며 사장이 될 것이다. 스리랑카를 찾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관광 가이드를 해보겠다는 야무진 계획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려운 환경에 놓인 자신의 이웃을 돕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할 꿈과 의지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꿈꾸는 코리안 드림이며 글로벌 드림이 아니고 무엇일까. 스리랑카 노동자 산지와 역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들이 꾸었던 꿈을 똑같이 꾸고 있는 것이다.

산지와, 당신의 꿈을 응원합니다.


태그:#이주노동자, #스리랑카 , #외국인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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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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