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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의원> 포스터.
 영화 <상의원> 포스터.
ⓒ 와우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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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관광지로 전락한 궁궐은 100년 전만 해도 실제적인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던 곳이었다. 그 이전 수천 년 동안에도 궁궐은 그런 곳이었다.

궁궐이 인간의 정치 생활에 영향을 끼친 기간이 수천 년이나 되고,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영향을 끼쳤는데도, 오늘날 우리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궁궐은 역사 속의 현실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우리 머릿속의 궁궐은 거세된 남성들과 그렇지 않은 여성들 속에서 임금님이 살았던 공간이다. 왕과 왕족 그리고 내시가 아닌 남성은 이 공간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실제 역사를 반영하지 못하는 이런 오류가 우리 인식 속에 자리 잡게 된 데는, 백 년 전에 일본이 이 땅에서 시작한 역사교육의 영향도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일본식 역사 교육 하에서 한국인들은 궁궐의 실제 이미지를 배우기보다는, 궁에서 왕이 여인들과 함께 지내는 이미지만을 주입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멸망 직전만 해도, 한양 사람들의 상당수는 궁궐에 출입하는 관료이거나 궁궐에 출퇴근하는 노동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한양 사람들 사이에서는 궁궐 내부에 대한 지식이 널리 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궁중 문화를 비롯한 생활사는 가르치지 않고 조선왕조의 무능을 부각시킬 만한 역사만 가르쳤다. 지배층이 당쟁에 빠져 세상의 변화를 몰랐다거나 임금이 궁녀와 내시들 틈 속에서 살았다는 이미지는 주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이 때문에, 궁궐 밖에서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느덧 민중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는 백제 의자왕의 전승 기록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그가 멸망 직전에 궁녀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진 사실만 집중적으로 부각된 것과 유사하다. 이로 인해 우리 머릿속에서는 '궁궐' 하면 왕과 궁녀와 내시만 주로 떠오르고, 내시가 아닌 남자들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궁궐이란 공간을 만드는 데 동원된 남자들

하지만 내시가 아닌 남자들도 궁궐 생활과 깊숙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궁궐 밖 남성들은 궁궐의 의식주(衣食住) 세 가지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없으면 궁궐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주(住)의 경우부터가 그랬다. 궁궐이란 공간을 만드는 데 동원된 인력은 궁궐 밖의 남자 백성들이었고, 궁궐이 완성된 후에 그곳을 지킨 이들도 백성 중에서 선발된 남자 군인들이었다.

의(衣)에도 내시 아닌 남성들이 깊이 개입했다는 점은 24일 개봉된 영화 <상의원>에도 반영되었다. 남자 기술자인 조돌석(한석규 연기)이 의복 생산을 주도하던 궁궐에 이공진(고수 연기)이란 무명의 남자 기술자가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경쟁과 갈등을 다룬 이 영화에서는 궁중 의복 생산의 주체인 남자의 위상이 분명하게 묘사되었다.

우리의 기존 상식으로는 궁녀들이 의복 생산을 전담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역할을 주도한 것은 영화 속 조돌석처럼 상의원(尙衣院)이란 관청에 속한 남성 기술자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상의원에서 교대로 근무하는 노비 출신의 남자 기술자들이었다.

물론 이들이 궁궐의 의복 생산을 독점적으로 담당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궁궐의 의복 수요가 너무나 많았다. 이들의 힘만으로는 '의'에 대한 궁의 수요를 충족하기 힘들 정도였다.

매일 새로운 버선을 신었던 왕과 왕비

영화 <상의원> 속의 임금이 버선을 단 하루만 신다가 신하들에게 하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의류 신제품에 대한 궁궐의 수요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역사학자 김용숙이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을 토대로 저술한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따르면, 왕과 왕비는 매일 새로운 버선을 신었다.

 경복궁 흥례문에서 펼쳐진 수문장 교대의식.
 경복궁 흥례문에서 펼쳐진 수문장 교대의식.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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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부부가 신은 버선은 '세탁기'가 아니라 보관함으로 들어갔다. 임금 부부는 이런 버선들을 일 년간 모았다가 고위층이나 궁궐 사람들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땀 밴 버선을 '청와대 명절 선물'로 활용했던 것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이자 순종의 부인인 순정효황후 윤씨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었다. 윤 황후를 모신 김명길·박창복 상궁의 증언에 따르면, 윤 황후는 8·15 해방 뒤에는 매일 새로운 버선을 신지 못하고 3일마다 새 버선을 신었다고 한다.

이것은 8·15 해방 뒤에 구(舊)황실의 재정이 궁핍해졌기 때문이다. 8·15 해방 이전에는 일본 정부의 지휘를 받는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구가 구황실의 재산을 관리했지만, 대한민국이 세워지면서 이 재산이 국가 소유로 이관되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의 구황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윤 황후가 매일 새로운 버선을 신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3일마다 새 버선을 신는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사치였을 것이다.

이처럼 버선 하나를 만들기에도 바빴기 때문에, 궁궐의 의류 생산에는 많은 노동력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경국대전> 이후의 법전에 규정된 상의원 전체 인력만 해도 무려 597명이었다. 이 중에서 의류 생산을 직접 전담하는 침선장은 40명 정도였다.

이런 인력으로도 수요를 제대로 충족할 수 없었던지, 궁녀들까지 나서서 상의원 사람들을 도와야 했다. 그래서 상의원 침선장들과 궁녀들 사이에는 분업이 형성됐다. 평상복은 수방(수놓는 부서)이나 침방(바느질 부서)의 궁녀들이 제작하고, 의례복은 상의원 침선장들이 제작한 것이다.

영화 <상의원>에서는 청나라 사신이 등장했다. 그래서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후기다. 또 <상의원>에서는 영화 속의 임금이 형의 왕권을 계승했다고 했다. 그래서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영조 임금 때다.

영화 <상의원>에서는 충분히 묘사되지 않았지만, 이 시대에는 궁궐 의복의 생산 방식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이 시대는 자급자족보다는 시장 판매를 겨냥한 생산 활동이 점점 더 활성화되던 때였다. 왕실에서도 이런 경향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상의원 기술자나 궁녀들에게만 의복 생산을 맡기지 않고, 민간 업자에게 물건을 주문하고 대금을 치르는 방식도 부분적으로 채택했던 것이다.

궁궐 요리뿐 아리나 임금 식사까지 관찰한 남성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왕실 의복 생산의 주역은 여전히 상의원의 남자 기술자들이었다. 이렇게 궁궐의 '의'와 관련해서도 남성들은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고종 부부의 결혼식 의례복.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운현궁에서 찍은 사진.
 고종 부부의 결혼식 의례복.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운현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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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역할은 '의'와 '주'는 물론, 궁궐의 식(食)에도 영향을 끼쳤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남자 숙수인 강덕구(배우 임현식 연기)의 역할은 보조적으로 묘사되고 수라간 궁녀들의 역할만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다. 이 드라마에서 궁궐의 음식 장만을 주도한 것은 수라간을 비롯한 각종 주방의 궁녀들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사옹원이란 관청에 속한 남성 숙수가 음식 장만을 주도하고 여성 궁녀들은 이를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자료 중 하나가 1903년 11월 15일자 <고종실록>이다. 이에 따르면 남자 숙수인 김원근이 고종의 식탁에 올린 홍합 요리에서 모래가 나오는 바람에 고종(당시 52세)의 치아가 부러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김원근을 비롯한 주방 팀은 단체로 귀양을 가야 했다.

남자들이 궁궐 요리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임금의 식사를 관찰하는 일도 맡았다. 역사 드라마에서는 여자 상궁들이 임금의 식사를 관찰하지만, 실제로 그 자리에는 상궁뿐만 아니라 왕족 출신의 사옹원 남자 감독관도 함께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고위 감독관뿐만 아니라 사옹원의 하급 직원들도 함께했던 것 같다.

일례로, 연산군 1년 12월 18일자(양력 1496년 1월 3일자)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자기가 세자 시절에 아버지인 성종의 식사 시중을 들 때마다 사옹원 남자 노비인 박마지를 유심히 봤다고 말하면서, 박마지에게 음식 재료의 검사를 맡길 것을 명령하는 대목이 나온다.

궁에서 남성에게 음식 장만을 맡긴 것은 여성을 차별했기 때문이 아니다. 궁궐처럼 대량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곳에서는 솥을 비롯한 주방 용기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여성의 힘만으로는 음식 준비가 벅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자 숙수들이 음식을 장만하고 궁녀들이 이를 보조했던 것이다.

이처럼 궁궐의 의식주에서 남성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유했다. 내시 아닌 남자들이 궐 안에서 집도 지키고 옷도 만들고 밥도 지었던 것이다. 물론 궁녀들도 함께했지만, 주된 책임을 진 쪽은 남자들이었다.

이렇게, 우리가 이전에 갖고 있던 상식과 달리, 궁 안에서는 내시뿐만 아니라 궐 밖 남자들도 궁녀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벌이고 또 임금의 일상생활을 보좌했다. 영화 <상의원>은 궁에서 남성이 차지한 실제 역할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태그:#상의원,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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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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