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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성벽 안쪽길을 따라 한바퀴 휘리릭 돌면서 화성을 관람할 수 있고, 성벽 밖의 길을 따라 한바퀴 돌면서 볼 수도 있다. 성 안에서 성밖을 내다볼때와 성밖에서 성벽과 성곽건물을 바라보면 분명 다른 감흥이 일어난다. 수원에 살면서 화성순례를 수십번 하고나니 또다른 화성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 화성을 순례할 때는 화성의 겉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화성을 공부하고 나면, 사도세자, 정조대왕, 채제공, 정약용 등 화성의 역사적인 관점이 새로 생기고, 이후에는 성벽을 바라보면서 다양한 모양의 성돌이 예술적으로 보이고, 성곽건물 하나하나를 관찰하게되고 건물의 양식, 지붕의 양식, 단청 등을 보게 된다.

지붕의 양식이 특이하다. 성 안쪽은 맞배지붕이고, 성 밖은 우진각 지붕형태이다.
▲ 수원화성 북서포루 지붕의 양식이 특이하다. 성 안쪽은 맞배지붕이고, 성 밖은 우진각 지붕형태이다.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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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문 옆에 서북공심돈이 있고 그 옆에 북포루가 있고 그 옆에 북서포루가 있다. 북서포루는 지붕의 형태가 아주 특이하다. 성 안쪽 지붕은 짓다 만것처럼 꺾인 모습이고 성 밖은 온전한 모습이다.

이런 지붕양식이 성 안쪽은 맞배지붕이고 성밖은 우진각 지붕이란 사실을 알면서 경이로워했던적이 있었다.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넓어지면서부터 화성에서 정조대왕의 숨결이 느껴진다.

수원화성의 북쪽 정문인 장안문(長安門)의 동쪽에 수원화성 제일경관인 화홍문(華虹門)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용연(龍淵)이 있다. 화성 축성 이후 정조대왕이 신료들과 화성16경 즉 춘8경, 추8경을 정했는데, 추8경 중 두 곳이 여기에 있다. 바로 홍저소련(虹渚素練, 화홍문 물가에 흰 깁을 편 듯함)과 용연제월(龍淵霽月, 용연의 개인 달) 이다. 정조대왕 당시에도 아름다운 풍광이 유명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화성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 수원화성 화홍문, 방화수류정 수원화성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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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16경은 100여 년이 지나면서 수원 8경으로 정리되었는데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지명으로 유추할 수 있는 한 가지 근거가 있다. 수원화성이 건설되기 전인 1793년(정조 17)에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바뀌었고, 1895년에 수원군으로 다시 바뀌었다. 수원에서 화성으로 다시 수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화성16경이 수원8경으로 자연스럽게 정리된 면이 있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원8경은 1912년 4월 7일자 <매일신보>에 이원규가 채록한 것인데, 화성16경에서 언급한 홍저소련이 화홍관창으로 용연제월이 나각망월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8경 제2경 나각망월(螺角望月, 방화수류정에서 본 동북공심돈 위로 뜨는 달),
수원8경 제3경 화홍관창(華虹觀漲, 화홍문 7간 수문에 쏟아지는 물보라),

수원천이 자주 범람하여 화성 축성당시 이를 고려하여 홍예석교를 건조하고 위에 화홍문이란 누각이 세워진 것이다.

화홍문 내부모습
▲ 수원화성 화홍문 화홍문 내부모습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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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이고 초익공 겹처마이며 지붕은 1고주 5량의 팔작지붕이다. 화홍문이란 편액은 유한지(兪漢芝 1760~?)가 썼으며 현재까지 훼손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화홍문의 건축비용은 3만 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들었다. 요즘 돈으로 약 21억6000만 원 정도 된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長安門)을 잡아 당겨 화홍문(華弘門)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 뒤로 서로 마주 응하여 일 면을 제압하고 있다. 마침내 절벽을 따라 성을 쌓고 바위에 누를 세우니 ···방화수류정이라."

방화수류정에대한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다.

방화수류정에 앉아있으면 서편으로는 팔달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쪽으로는 성벽이 지세를 따라 굽었다 휘어졌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조 19년(1795) 을묘년 원행 때 정조가 이 곳에 올라 화성성역의 중간 평가를 하면서 화성유수 조심태의 노고를 치하했다고 한다.

정조 21년(1797) 정월, 정조는 연례적인 현륭원 방문을 마친 후 방화수류정에 와서 활쏘기를 하고, 화성성역의 노고를 치하하며 칠언시(七言詩)를 지은 뒤 신하들에게 화답하게 하기도 하였다. 정조대왕의 시가 홍재전서에 전한다.

歷遍春城日未斜(역편춘성일미사) 춘성을 두루 보고도 해가 아직 한창이라
小亭雲物轉晴佳(소정운물전청가) 소정의 풍경은 한결 더 맑고 아름다운데
鑾旂慣報參連妙(난기관보삼련묘) 난기가 계속 삼련의 적중함을 보고하니
萬柳陰中簇似花(만류음중착사화) 수많은 버들 그늘 속에 살촉이 꽃 같구려
- 홍재전서에 있는 정조대왕 시는 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것임.

방화수류정이란 이름은 북송시대 정명도의 '춘일우성(春日偶成)'이란 시에서 따다 붙인 것이다.

방화수류정 현판글씨
▲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 현판글씨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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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淡風輕近午天 운담풍경근오천 - 맑은 구름 가벼운 바람에 한낮 하늘이 가까이 있네.
訪花隨柳過前川 방화수류과전천 - 꽃을 찾아 버들을 따라 냇물을 건너려는데
傍人不識余心樂 방인불식여심락 - 사람들은 나의 즐거운 마음을 알지 못하고,
將謂偸閑學少年 장위투한학소년 - 오히려 공부 안하고 어린애처럼 논다고 놀려대네.

방화수류정의 건설비용은 5352냥 1전 8푼으로,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약 3억7000만 원 정도 된다. 방화수류정 현판글씨는 조윤형(1725~1799)이 썼으나 현재 걸려있는 것은 김기승(1909~2000)이 1956년 가을에 쓴 것이다.

방화수류정에 올라 멀리 팔달산의 화성장대를 바라보고, 용연에 핀 연꽃을 바라보고, 동북공심돈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보면서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해보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수원화성, #북서포루, #화홍문, #방화수류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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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가슴에 안고 살면서 고전과 서예에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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