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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좀 깁니다. 내용도 좀 깁니다. 그러나, 실제로 적지 않은 주제들을 다루려 합니다. 내년부터 당장, 기업의 화학물질 정보를 국민들에게 어떻게 제공해야 하는지 새로운 기준이 마련됩니다. 미국의 지역사회알권리법을 보고 오면서, 우리나라에서 노동자와 주민의 알권리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제대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아 보았습니다. 세 번으로 나눠서 올립니다. 끝까지 함께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자 주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기회

심상정 정의당 의원실 박항주 보좌관의 전화였다.

"환경부 만날 건데요. 국감자료로 유통량 자료 요청한 건도 의논해야 하고, 기업비밀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게 될 거예요. 실장님이랑 전문가들이 같이 결합해 주면 좋겠어요. 기업비밀을 지금처럼 남용하는 것은 환경부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내년에 화학물질관리법 시행되면 어차피 달라져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정보를 공개하고 무얼 기업비밀로 인정할 거냐 하는 거를 의논해야 한다는 겁니다. 환경부에서 우리 의원실로 와서 이 문제를 의논할 건데 결합해 주세요."

나는 지난 2014년 국정감사 기간에 심상정 의원을 통해 2010년까지의 유통량 조사 결과 중에서 발암물질 등 해외의 사용제한물질에 대한 국내 유통량 자료를 요구한 바 있다. 예전 같으면 쉽게 받았을 자료인데, 환경부에서 유통량 자료는 줄 수 없다고 버틴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 환경부를 만나 따져야 할 판이었다. 가겠노라 오케이 했다. 나와 함께 우리 연구소(노동환경건강연구소) 임상혁 소장, 강문대 변호사가 가기로 했는데, 아쉽게도 강문대 변호사는 다른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회의는 괜찮았다. 환경부에서는 과거 한 번도 유통량자료를 준 적 없다고 발뺌했지만, 나는 2008년에 이미 같은 형식의 자료를 받은 바 있었다는 증거를 내밀면서 환경부가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을 비판했다. 환경부 과장은 이전에 자료를 제공한 사례만 있다면 못할 것 없다고 나왔고 덕분에 일이 잘 풀렸다.

그런데 여기에서 일이 났다. 화학물질관리법이 2015년에 시행되는데, 이 법률에는 기업의 화학물질 정보를 주민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내용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기업의 사고예방계획 같은 것이 주민에게 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환경부는 정보를 주민에게 어디까지 제공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용역을 하고 있고, 조만간 미국에 방문해서 미국의 알권리법을 보고 오겠노라 말했다.

그 때, 임상혁 소장이 그런 자리에는 시민사회를 대동해야 한다고 한마디 했는데, 환경부 과장이 좋은 생각이라며 같이 가는 것을 적극 검토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박항주 보좌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 명 같이 가는 것으로 했으니 준비하라는 거였다. 요즘 아이들 말로 '헐~' 이었지만,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다

미국으로 가는 11월 9일. 공항에 도착했는데, 여권이 없다. 다섯 살 아들이 장난치는 것 때문에 따로 놓았는데, 그걸 잊고 챙기지 않은 거였다. 이렇게 미국행이 싱겁게 끝나나 싶었는데, 아내가 다행히 여권을 가져다 주었고 간신히 출발할 수 있었다. 열세 시간 정도 비행기를 타고 텍사스 휴스턴 조지부시 공항에 도착했다. 그렇다. 텍사스가 출장지였다.

텍사스로 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수 있었다. 이 보수적인 동네에서 주민의 알권리란 걸 적극적으로 보장할 리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2013년에 비료공장의 대형 폭발사고 등 계속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어서 최근의 대책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자면, '텍사스는 꽝'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엔 그게 오히려 내겐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 출장 내내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으로 자료를 찾고 또 찾고 또 찾았으니 말이다.

일행은 총 일곱 명이었다. 환경부 2명, 화학물질안전원 1명, 안전행정부 1명, 대학교수 2명, 그리고 나. 전체적인 출장일정은 이랬다.

미국출장 일정표
 미국출장 일정표
ⓒ 일과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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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정을 전체 일행이 함께 다녔지만, 12일 수요일에는 두 팀으로 나누었다. 삼성반도체에서 나를 껄그럽다고 한 모양이었다. 나도 삼성을 들어가서 볼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점잖게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연구책임자인 소병천 교수와 함께 오스틴 시의 주민들을 만나 공장의 화학물질에 대한 알권리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호텔에서

출장은 꽤 부담이었다. 잘 하고 싶었다. 많이 보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다. 첫날 호텔에 들어와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미국의 노동자 주민의 화학물질 알권리에 대해 처음부터 하나씩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연구진이 준비한 질문지를 보면서 내가 궁금한 것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나의 질문을 준비했다.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인지 다듬어 나갔다. 미국에서는 주민에게 어떤 정보를 얼마나 제공하느냐를 확인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화학물질 정보가 무엇인지 정의하질 않았다. 미국 법률에 나와 있는 화학물질 정보란 무엇인지 나열한 다음 내가 생각하는 화학물질 정보와 비교할 때 빠진 것은 없는지 검토했다.

화학물질 정보란, 화학물질을 보유한 기업의 명칭과 주소부터 시작하여 화학물질 명과 고유번호(카스번호), 보유량(저장량이나 취급량 등), 화학물질의 독성과 환경영향, 화학물질 취급과 관리에 대한 정보, 사업장의 화학물질 사고기록, 화학물질로 인한 지역사회의 잠재적 영향 평가 결과 등등 하나씩 열거하자니 끝도 없었다. 미국 법에서는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부터 화학물질 목록 정보, 배출량 목록 정보, 사고신고 정보, 위험도평가에 근거한 위험관리계획 정보 같은 식으로 정보가 범주화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민에게 제공되어야 할 정보들은 이 안에 웬만한 것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 다음 할 일은 분명했다. 미국 법률을 하나 하나 읽어나가면서 어떤 정보가 어떻게 제공될 수 있고, 어떤 정보가 어떻게 기업의 비밀로 보호되는지를 이해해 나가는 것이었다. 최소한 정부기관과 기업을 만나기 전에 사전 이해를 충분히 해놓는 것이 마땅했다. 첫날부터 잠자긴 글러버린 셈이다. 어차피 시차적응을 못해서 잠도 못 잘테니 일이나 하자 싶었다. 그렇게 해서 호텔벽에 포스트잇이 하나씩 늘어갔다.

호텔 작업실
 호텔 작업실
ⓒ 일과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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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실망, 텍사스

우린 제일 먼저 텍사스의 브라조리아 라는 지역의 '지역사회비상계획수립위원회(아래 LEPC)'를 방문했다. LEPC는 '비상대응계획과 지역사회알권리에 관한 법률(EPCRA)'에 의해 지역별로 사고에 대한 대응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설립하도록 한 협의기구다. LEPC는 기업들로부터 화학물질 정보를 제출받아 주민에게 공개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그 정보들을 모아 지역사회의 공동 대응계획을 매년 수립하여 검토를 받아야 하는 의무도 가지고 있다. 소중한 주민참여기구이고 기업과 주민과 정부의 사고대응협력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브라조리아 지역의 LEPC는 적극적으로 운영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우와 바스프 같은 큰 화학기업이 지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학물질에 대한 적극적 대응체계는 볼 수 없었다. 주요 관심사는 허리케인이었다.

주민대표와 언론의 참여도 없었다. 말로는 참관인으로 참여가 보장된다지만, 실제로 주민이 회의에 참여하는 경우는 없어 보였다. 물론, 미리 환경부의 LEPC 운영실태 조사결과를 읽어본 때문에, 큰 실망을 하진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문제였다. 시민사회단체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 LEPC 위원으로 시민단체가 들어갔더니 위원을 주정부가 맘대로 바꿔버렸다는 얘기도 읽은 적 있었다. 설마 했는데, 텍사스 주에서는 주민의 참여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텍사스 브라조리아 카운티 LEPC 담당자 인터뷰
 텍사스 브라조리아 카운티 LEPC 담당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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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날에는 다우와 바스프를 방문했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미국법에 따르면 기업비밀은 환경부에게 신청해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 다우와 바스프에게 기업비밀을 얼마나 신청해서 승인받았는지 물어봤더니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있더라도 얼마 안 된다는 식이었다. 오히려 이들은 기업비밀로 화학물질 정보 자체를 막는 것보다는, 어느 위치에 저장되어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비공개로 처리하는 것에 관심이 더 커보였다. 물질안전보건자료는 물론이고 취급량이나 저장량 같은 정보는 당연히 공개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매우 다른 것은 확실했다.

세 번째 날에는 오스틴 주민들을 만난 다음에 텍사스주 보건국과 환경국의 화학사고대응 담당자들을 만났다. 오스틴 주민들은 지역사회알권리법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삼성반도체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 중인 주민들을 인터뷰했는데, 삼성전자에서 취급하는 물질들에 대해 들어본 적 없다는 반응이었다. 우리나라랑 다르지 않았다. 법은 있으되 실제로 알권리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텍사스주 보건국과 환경국의 담당자들은 나를 더 실망시켰다. 작년에 비료공장 폭발사고가 있었지만, 사고대응태세를 재정비하고 알권리를 더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알권리 법을 귀찮아하는 인상을 받았다.

텍사스 주 정부 관계자 인터뷰
 텍사스 주 정부 관계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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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주는 미국에서도 화학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주다. 이게 화학공장이 많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라 생각했건만, 주정부의 마인드와 알권리 실현의 천박함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한 탐구주제를 만났다. 법이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운동해야 하느냐, 어떤 장치를 만들어 법을 실현하느냐를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텍사스, 완전 꽝이었지만 난 덕분에 확실한 과제를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 산더미처럼 쌓인 숙제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지역사회 알권리법(EPCRA)은 주법률이 더 강력한 기준을 제정할 수 있게 인정하고 있다. 이 말은 미국의 연방 알권리법은 최소한의 기준이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려 하는 주에서는 얼마든 적극적 조치들을 마련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럼 그렇지. 텍사스 주에서는 시스템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곳곳에 구멍이 있었다. 있는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곳은 다를 것이다. 무엇이 텍사스와 다른 주의 차이를 낳은 것일까? 그게 운동일까?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에게 주어진 소중한 역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밤에는 거의 점을 잘 수 없었다. 일행과 헤어지기 전에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래서 다른 주의 보다 적극적인 노력들을 찾아냈고, 돌아오는 길에 일행들과 수시로 얘기를 나누었다. 텍사스 주를 보편적인 사례로 보지 말 것. 주민의 참여와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제도만으로 안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것. 다른 주의 적극적 사례를 찾아서 비교 검토하여 미국 사례를 정리할 것. 말로만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빨리 출장보고서를 작성하여 발암물질국민행동과 화학물질감시네트워크, 그리고 출장을 함께 다녀온 환경부와 교수진에게 내 의사를 전달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신범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화학물질센터 실장입니다. 건강하고 안전하고 세상을 위한 ‘일과건강’ 웹진221호 시론에 게시됩니다.



태그:#알권리, #지역사회,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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