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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후 서울 신길동 성락주유소 앞 사거리. 한파가 잠시 누그러져 영상 2도를 웃도는 날씨에도 사거리 한 켠에서 야쿠르트를 판매하는 중년여성 김신자(가명)씨는 두꺼운 외투와 무릎담요로 몸을 감싸고 수레를 지키고 있었다. 기자가 다가가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 말을 건네자 "그래도 춥다"는 답이 돌아왔다.

회색 플라스틱 간이 의자에 방석을 깔고 앉은 김씨는 이날 상의만 일곱 겹을 껴입었다. 오전 8시부터 도림3동·신길3동 일대 아파트와 사무실, 상점을 돌며 유제품을 배달하는 그가 한파 속에 체온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리어카에는 일회용 부탄가스로 불을 피우는 휴대용 난로도 실려 있다. 23년을 일했지만 겨울 한파는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고충이다.

하루 종일 거리를 떠돌며 일하는 일명 '야쿠르트 아줌마'의 또 다른 고충은 식사와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일이다. 김씨는 쉼 없이 동네를 돌며 오전 중에 배달을 마치고, 오후부터는 사거리 한 구석에 자리 잡고 판매를 시작한다. 일반 사무직과 달리 안정적으로 머물 공간이 없는 그는 "일의 특성상 소변을 오래 참아 방광염을 앓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서울시 이동노동자 쉼터 8곳 운영

서울시가 쉼 없이 이동하며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했다. 서울시 내 총 8곳이다.
▲ 이동하는 여성 노동자 쉼터 서울시가 쉼 없이 이동하며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했다. 서울시 내 총 8곳이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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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아줌마'와 학습지교사, 보험설계사 등 일정한 사업장 없이 계속 돌아다니며 일하는 이동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서울시가 지난 9월부터 운영 중인 '이동하는 여성 노동자 쉼터'(아래 이어쉼)가 그곳이다.

이어쉼은 이동노동자 중 하나인 돌봄노동자들의 건의로 만들어졌다. 서울시는 올해 2월 '서울시, 좋은 돌봄을 말하다' 정책 워크숍 자리에서 "이동하는 중간에 식사나 휴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돌봄노동자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시가 관내 공공시설의 유휴 공간을 발굴했고, 이들 중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최종 선정됐다.

현재 이어쉼은 ▲중구 신당종합사회복지관 ▲광진구 서울다문화가정협의회 ▲서대문구 서울은현교회 ▲금천구 사랑채요양원 ▲영등포구 여성복지회관 ▲동작구 동작여성인력개발센터 ▲서초구 서초2동주민센터 ▲강동구 열린공간 강일카페 등 총 8곳에 마련됐다.

영등포구 여성복지회관에 마련된 여성 이동노동자 쉼터. 안에는 소파와 테이블, 각종 먹을 거리가 준비돼 있다. 이곳엔 하루 평균 20여 명이 찾는다.
▲ 영등포구 이어쉼 영등포구 여성복지회관에 마련된 여성 이동노동자 쉼터. 안에는 소파와 테이블, 각종 먹을 거리가 준비돼 있다. 이곳엔 하루 평균 20여 명이 찾는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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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방문한 영등포구 여성복지회관(아래 영등포구 이어쉼)은 소박했지만 잠시 쉬어가는 공간으로는 충분했다. 이곳은 한때 지구대로 쓰다 오랜 기간 폐공간으로 방치됐었다. 쉼터로 탈바꿈 한 뒤 8평 남짓한 공간은 이동노동자들이 잠시 쉴 수 있는 3인용 소파와, 식사를 할 수 있는 직사각형 테이블 등으로 채워졌다. 커피믹스, 녹차, 캔디 등 간단한 요깃거리와 함께 무료함을 달랠 잡지책도 비치됐다.

이 동네 '야쿠르트 아줌마' 최아무개(56·여)씨는 매일 이어쉼에 들러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인다. 올해 8월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는 그는 "평소에는 배달하며 알게 된 미용실에서 잠시 쉬었는데, 매번 신세를 지려니 눈치가 보였다"며 "이어쉼은 쉬라고 만든 공간이라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어 좋다"고 전했다. 점심 도시락을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인근 구두노점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그는 앞으로 도시락을 가지고 이어쉼에 들러볼 생각이다. 

이용자 점점 증가... 서울시 "더 많은 곳에 설치할 예정"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찾는 이가 많지 않지만 그 수가 점점 느는 추세다. 영등포 이어쉼 관리직원 김정란(54·여·영등포구청 가정복지과 소속)씨는 "입소문을 타면서 최근에는 하루 20~30명이 쉬었다 간다"며 "이 일대에서 폐지를 줍는 할머니부터 약속 시간이 남아 시간을 때우러 오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이 온다"고 설명했다.

서울시 동작구 여성인력개발센터 안에 마련된 여성 이동노동자 쉼터. 추위를 녹일 커피 머신과 무료함을 달랠 컴퓨터, 책 등이 마련돼있다.
▲ 동작구 이어쉼 서울시 동작구 여성인력개발센터 안에 마련된 여성 이동노동자 쉼터. 추위를 녹일 커피 머신과 무료함을 달랠 컴퓨터, 책 등이 마련돼있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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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어쉼인 동작구 여성인력개발센터에도 이동노동자들의 발걸음이 점점 늘고 있다. 24일 찾은 이곳은 11평 남짓 공간에 테이블과 커피머신, 컴퓨터 등이 갖춰져 있었다. 김정하 동작구 여성인력개발센터 간사는 "개소 소식을 전단지로 만들어 알린 덕분에 학습지 교사나 보험설계사 등이 하루 평균 20~30명이 찾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홍보에 주력했던 서울시는 내년부터 이어쉼을 확대할 계획이다. 최애정 서울특별시 여성가족정책과 주무관은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현재 점검 모니터링을 진행 중"이라며 "이 결과를 토대로 내년에 더 많은 곳에 이어쉼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태그:#이어쉼, #이동노동자,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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