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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사단 윤 일병은 군 입대 후 112일 만에 부모 한 번 못 만나보고 선임병들의 구타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을 계기로 육군이 단 18일간 조사한 결과 3919건의 군내 가혹행위가 적발됐습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가혹행위가 자행되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군이 병영문화를 개선하겠다고 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이제 군에만 맡기지 말고 외부에서 본격적으로 감시하고 개입할 때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병영에 햇빛을' 기획 연재기사를 싣습니다. 기획을 마무리하면서 타이완 현지취재를 통해 타이완 시민사회와 군이 장병 인권 문제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타이완의 병영 인권 상황 개선 노력을 통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우리 군이 나가야 할 방향을 짚어봅니다. [편집자말]
2013년 8월 3일, 군기교육을 받다 숨진 고 홍중추 상병 사망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25만 명의 타이완 시민들이 총통부 앞 대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타이베이시 카이다거란 대로를 메운 시위대 2013년 8월 3일, 군기교육을 받다 숨진 고 홍중추 상병 사망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25만 명의 타이완 시민들이 총통부 앞 대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공민 1985 행동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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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3일,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모인 '공민 1985 행동연맹' 회원들이 흰 셔츠를 입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감시정부 '빅 브라더'를 패러디한 '피 눈물 흘리는 눈동자' 그림을 들어보이고 있다.
▲ "시민이 지켜보고 있다" 2013년 8월 3일,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모인 '공민 1985 행동연맹' 회원들이 흰 셔츠를 입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감시정부 '빅 브라더'를 패러디한 '피 눈물 흘리는 눈동자' 그림을 들어보이고 있다.
ⓒ 공민 1985 행동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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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정치·사회·경제의 중심도시 타이베이(台北)시는 타이완 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름에 '북'이 들어갔다. 지난 12월 초순 기자가 방문했던 타이베이의 낮 평균 기온은 섭씨 17도, 비가 자주 내리고 습도가 높다는 점을 빼면 우리나라 초가을 날씨와 비슷했다.

카이다거란 대로(凱達格蘭 大道)는 '경복문'으로 불리는 타이베이 성 동문(東門)에서 시작되어 타이완 외교부를 지나 총통의 집무실이 있는 총통부까지 이어지는 왕복 10차선의 넓은 도로다.

국민당 정부가 1949년 5월에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1987년에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38년 동안 이 대로를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숙여 통과하는 것이 의무였다. 원래는 장제스 총통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의 개수로(介壽路)로 불렸지만, 지난 1996년 타이완 원주민족의 하나인 케다갈란 족의 중국어 표기를 따 오늘과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양편에 공원이 자리 잡고 있어 한적한 느낌마저 주는 이 대로가 지난해 8월 한여름 밤, 성난 시민들이 외치는 함성소리로 가득찼다.

"진상규명 없이는 용서도 없다."
"정부는 거짓말을 중단하라."

2013년 8월 3일 저녁, 카이다거란 대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중에는 영화 <브이포 벤데타>에 나오는 '가이포크스' 가면을 쓰거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감시정부 '빅 브라더'를 패러디해 피눈물을 흘리는 눈동자가 그려진 피켓을 든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정부가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다.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어린아이부터 70대의 퇴역 군인까지, 타이완 각지에서 모여든 시위대는 나이도 직업도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한목소리로 뮤지컬 <레미제라블> 삽입곡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가사를 타이완어로 바꾸어 불렀다.


이날 시위는 한 달 전, 부대 내 반입이 금지된 스마트 폰을 소지하고 있다가 적발돼 군기교육에 넘겨졌다 사망한 한 병사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

지난해 6월말 타이완 육군 6군단 542장갑여단 소속 홍중추 상병(사망당시 24, 하사로 추서)은 카메라 기능이 내장된 스마트폰과 MP3플레이어를 영내에 반입했다가 보안규정 위반 혐의로 상벌위원회에 회부됐다. 위원회에서 1주일간의 '회과'(우리의 군기교육에 해당) 처분을 받은 홍 상병은 269기계화 보병여단으로 보내져 독방에 감금된다.

군기교육 중 물도 안 주고... 전역 이틀 앞두고 사망

7월 3일, 고온의 날씨 아래 팔굽혀펴기 등 체력단련을 받던 홍 상병은 여러 차례 물을 마시게 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계호사(감시병)는 이를 훈련을 회피하려는 것으로 보고 거절했다. 이날 오후 열사병 증세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홍 상병은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지만, 이튿날 오전 5시 숨을 거뒀다. 그가 사망한 시점은 전역을 불과 이틀 남겨 놓은 날이었다.

지난해 7월 4일 군기교육을 받다 사망한 고 홍중추 상병.
▲ 고 홍중추 상병 지난해 7월 4일 군기교육을 받다 사망한 고 홍중추 상병.
ⓒ 공민 1985 행동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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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상병의 죽음은 타이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홍 상병에게 회과처분을 내렸던 상벌위원회 결정의 위법성, 고온의 날씨에는 훈련을 중지하거나 반드시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긴 군기교육 과정 전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또 시민단체가 구타, 가혹행위의 가능성을 제기하며 공개를 요구했던 부대 내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의 일부 녹화내용이 삭제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건 은폐 의혹은 더욱 확산됐다. 홍 상병의 사망원인도 최초 '사고사'에서 '미확인 사망', '타살'로 두 차례나 수정됐다.

7월 13일, 국방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자는 한 의사의 글이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확산되었다. 이 글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사이버 상에서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공민 1985 행동연맹'이 결성됐다.

'8월의 눈'처럼 카이다거란 대로 하얗게 덮은 25만의 시민들

7월 20일 타이완 국방부 앞에서 열린 이 단체의 첫 시위에는 3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집회참가 조건은 단 하나. '홍 상병 사망사건의 진상 규명'과 '죽음의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군 사법체계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집회 취지에 동의한다면 흰 셔츠를 입고 모이자는 것 뿐이었다.

시위를 벌인 지 나흘 만인 24일 마잉주 총통이 "군 통수권자로서 군 안에서 일어난 위법한 권리남용 행위로 홍 상병이 숨진 데 대해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면서 국민과 유가족에게 사과했다. 29일에는 가오화추 국방부장(국방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하지만, 정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외침은 잦아들지 않았다. 홍 상병의 장례식 전날인 8월 3일, 총통부로 향하는 카이다거란 대로에서 열린 '공민 1985 행동연맹'의 두 번째 시위에는 25만 명(타이베이 경찰국 추산 11만)의 시민들이 모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군사심판법(타이완의 군사법원법) 개정을 요구했다.

2300만 명의 타이완 전체 인구에 대비하면 100명 중 한 명, 260만 명의 타이베이 인구로 따지자면 10명 중 한 명의 시민이 이날 집회에 참가한 것이다.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주진룽(38, 회사원)씨는 폭발적인 시위가 발생한 이유에 대해 "홍 상병이 부대의 보안규정을 어겼다고 해서 그것이 목숨을 빼앗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면서 "공민이 공민으로서의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긴 채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에 대한 만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겨울에도 좀처럼 눈을 보기 힘든 타이완이지만, 현지 언론들은 흰 셔츠를 입은 시위대를 가리켜 "8월에 내린 눈"으로 표현했다.

평시 군 사건, 민간 사법기관이 담당하도록 법 개정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지 사흘만인 8월 6일 오후, 타이완 입법원(국회)은 임시회를 열고 평상시 군인범죄도 민간법원의 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군사심판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개정 법안은 전시를 제외한 평시에는 군 범죄 조사와 기소, 심리 등 모든 과정을 민간 사법기관이 담당하도록 했다. 홍 상병 사망 사건도 민간 사법기관에 이첩, 재조사에 착수했다. 타이완이 군사재판 시대를 마감한 것이다.

8월 15일 파라과이 등 중남미를 순방 중이던 마잉주 총통이 개정법안에 공식 서명했다. 이 날짜로 군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254명의 범죄자들은 법무부 산하 11개 일반 교도소로 이감됐다. 또 타이완 정부는 과거 군에서 발생한 의문사 사건을 조사할 특별위원회도 출범시켰다.

지난 3월 7일, 타오위안 지방법원은 지나친 군기교육 과정에서 규정을 어기고 홍 상병을 방치해 숨지게 한 중대장에게 지휘감독 책임을 물어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독단적 감금죄와 업무상 과실치사죄가 적용된 여단장과 부여단장 등 피고 12명에게는 각각 징역 3~6월형이 언도됐다.

타이완 학계는 정당이나 기존 시민·사회단체가 아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조직한 비폭력 군중시위가 군 사법제도의 개혁으로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에 대해 주목했다. 국립 중산대학교 정치학연구소 랴오다치 소장은 "타이완에서 시민 사회의 역량이 커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논평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타이완 역사상 가장 크고 놀라운 사회 운동"이라고 '공민 1985 행동연맹'이 조직한 '흰 셔츠 군'(White Shirt Army)에 대해 평가했다. 특히 이 신문은 지도부나 조직도 없이 회원들의 수평적인 연대로만 구성된 이 시민단체가 국민당과 민진당으로 양분된 타이완의 정치지형에 제3의 정치세력으로 태동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 지난해 군 사법제도 개혁을 이끌어 낸 '공민 1985 행동연맹'은 시민적 권리 확대 운동, 원자력발전소 건설 반대,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 비준 철회 등으로 그 활동영역을 점차 확대해 가고 있다.

※ 통역 : 박종순

[인터뷰] 최초 시위 제안자 리우린웨이(31, 의사)씨
지난해 홍중추 상병 사망사건 항의 집회를 주도, 타이완 군사심판법 개정까지 이끌어 냈던 리우린웨이(31, 의사)씨.
▲ 리우린웨이씨 지난해 홍중추 상병 사망사건 항의 집회를 주도, 타이완 군사심판법 개정까지 이끌어 냈던 리우린웨이(31, 의사)씨.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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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홍 상병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국방부 앞 시위를 제안하는 글을 올렸던 리우린웨이씨는 31살의 의사다. 그의 글을 매개로 사이버상에서 모인 39명이 결성했던 '공민 1985 행동연맹'은 공식적인 지도부도 조직도, 사무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8일 오후 타이베이시 커이다거란다오의 한 사무실에서 그와 만났다.

- 최초로 시위를 제안했다고 알고 있다. 어떻게 SNS에 글을 올리게 되었는지 설명해 달라.
"군의관으로 1년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자마자 홍 상병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면 누구나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자 군 당국은 담당 군의관에게 홍 상병 사망의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군의관 출신이기 때문에 좀 아는데, 이 사건에 대한 군 당국의 설명이 전혀 납득되지 않았다. 사망원인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군이 이 사건에 대해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 혼자서라도 국방부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는 글을 Ptt BBS(SNS의 일종)에 올렸던 것이다. 내 글에 100명이 답장을 보내왔고, 그중 뜻을 같이한 39명이 임시회의를 열어 시위를 조직하게 되었다."

- 임시회의에서는 무엇이 논의되었는가.
"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이 일로 누군가 유명세를 타게 되면 일에 차질을 빚게 되니 신분을 노출하지 않겠다는 것과 홍 상병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홍 상병의 사인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군사심판법 등 제반 제도 개혁에 대한 요구도 들어 있다. 그 밖에는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모인 자금은 인터넷을 통해 100%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원칙도 정해졌다."

- '공민 1985 행동연맹'에서 1985는 어떠한 의미인가.
"1985는 타이완 국방부에서 운영하는 전화번호다. 장병들이 부당대우나 부당체벌 등을 당했을 때 신고를 하라고 만든 번호인데, 홍 상병 사망사건이 벌어졌을 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제도만 존재할 뿐, 실상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이 번호를 앞으로는 우리 시민(공민)들이 운용하겠다는 풍자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 '공민 1985 행동연맹'은 지난 2011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처럼 공식적인 지도부나 회원도 없는 조직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 39명이 SNS를 통해 모여서 이 단체를 만들었다고 말씀드렸다. 이 사람들은 내가 글을 올리기 이전까지 서로 전혀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다. 직업도 의사, 변호사, 디자이너, 학생 등 다양하다. 또 가입한 뒤 떠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관철되어 온 원칙은 상하조직이 아니라 평면적인 조직이라는 것이다. 단체에는 발언인(대변인)이 있을 뿐이고 조직은 공동의견제로 운영된다.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이 사무실도 조직의 일을 하기 위해 그때그때 빌린 것일 뿐 '공민 1985 행동연맹'의 사무실은 아니다."

- 그렇다면 회원들 간의 의견 개진은 오로지 SNS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회원들은 거의 스카이프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의견을 교환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한 자리에 모일 때도 있다."

'국방부 산하 군사법원-군검찰' 17년 전 위헌 결정... "군사재판 제도는 과거의 유산"

- 다시 지난해 홍 상병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군사심판법이 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나.
"타이완에서는 이미 17년 전에 군사심판법이 (행정과 사법을 분리하도록 하고 있는) 헌법 규정에 위배된다는 결정이 나온 바 있다. 군사심판법은 군사법원과 군사검사소(군 검찰)를 행정기관인 국방부 밑에 두고 있다. 이런 체제 아래서는 공정한 심판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데도 걸림돌이 되기 쉽다."

- 지난해 시위가 군사심판법을 개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법 독립의 원칙에서 벗어난 기형적인 군사심판법은 일반 시민들의 상식으로 볼 때도 잘못된 제도였다. 물론 군 내부에선 반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군에 사법권이 없다면 어떻게 군인을 통솔하고 지휘하느냐' 하는 문제제기였는데, 하지만 군사심판법이 없는 대부분의 서방국가에서 이런 일로 군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군사재판 제도는 타이완이나 한국 모두 과거 권위적인 통치체제로부터 민주화가 진행되어 가는 중에 남아 있는 '과거의 유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타이완 군의 인권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20년 전과 비교해보면 군인의 인권은 천천히 개선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천천히 개선되는 이런 상태를 시민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예를 들어 1985 전화를 보자. 신고자 보호 체제가 굉장히 약하다. 어떤 장병이 이 전화로 자신의 문제를 구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최종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는 사람은 연대장이다. 그렇다면, 연대장에게 부당대우를 받은 병사가 과연 이 전화로 신고를 할 수 있겠는가?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연구한 '루시퍼 효과' 얘기를 꼭 하고 싶다. 어떤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사람의 악성으로 인해 아랫사람을 못살게 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사실을 이 연구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권위와 권위의 불평등이 인권을 침해하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의 이런 악성을 배제시킬 수 있는 더 완성된 인권보장제도가 군 안에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태그:#병영에 햇빛을, #공민 1985, #홍중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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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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