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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난 13일 오후 서울 대한문 앞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희생자 유가족들이 합동추모제가 끝난 이후 만장시위를 벌이고 있다.
 전지난 13일 오후 서울 대한문 앞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희생자 유가족들이 합동추모제가 끝난 이후 만장시위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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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이 제법 칼칼했다. 인도에는 밤새 내린 눈이 엉겨붙어 빙판으로 포장됐다.

13일 오전 9시 30분 대전 중구 대전산내희생자유족회 사무실 앞. 비상 깜빡이를 켠 택시가 멈춰 섰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형 보온물통, 큰 시장가방. 예상하지 못한 물품이 택시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서둘러 대형버스에 올랐다.  먼저 버스를 타고 있던 30여 명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버스 옆면에는 '정부는 대전 산내 만간인 희생자 유해를 즉각 발굴하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버스가 출발했다. 목적지는 서울시청 신청사 다목적홀이다. 이날 오후 1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희생자 전국합동추모제'가 예정돼 있었다.

6살 때 경찰에 끌려간 아버지는?

그가 가방 안에서 정종 한 병을 꺼내들었다. 문양자씨. 그의 아버지는 1951년, 1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총살됐다. 인민군에게 돈을 준 혐의였다. 부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충남에서 기자로 일하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이었다. 문씨의 나이 6살 때였다.

"50년 이맘때가 아버지가 경찰에 끌어간 날이에요. 서울 추모식 제상에 올려 드리려고 해요"

13일 오전 9시 30분 대전산내사건유족회 회원들이 이날 오후 서울에서 예정된 전국합동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문양자 총무가 버스에 오르고 있다.이날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합동추모제에는 600여명이 유가족들이 참석했다.
 13일 오전 9시 30분 대전산내사건유족회 회원들이 이날 오후 서울에서 예정된 전국합동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문양자 총무가 버스에 오르고 있다.이날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합동추모제에는 600여명이 유가족들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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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씨는 아버지가 끌려 간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무릎에 앉아 재롱을 떨고 있던 50년 12월 어느 날 저녁. 아버지가 저녁밥을 한 술 정도 드셨다. 누군가 찾아와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가 마당에 나서자마자 경찰 여러 명이 아버지 양쪽 팔을 붙잡았다. 아버지를 부르며 따라 나선 딸을 돌아보며 아버지는 "어여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마을길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가 또 다른 가방을 풀어 헤쳤다. 채 식지 않은 찰밥, 배추김치, 뽕잎무침 등이 차곡차곡 들어 있다. 함께 동승한 산내유족회원들을 위해 새벽부터 손수 준비한 음식이다.

"새벽부터 먼 길 나서느라 아침밥도 못 챙겨 드신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준비해 왔어요."

대전산내유족회 총무이기도 한 그는 십 수년째 유족회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일찌감치 나섰지만 서울 초입부터 길이 막혔다. 서울시청 행사장에 도착한 시간은 이날 오후 1시 10분 경. 행사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울에 사는 대전유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2010년 이후 중단된 민간인희생자 진상규명

13일 오후 1시 서울시청 신청사 다목적홀에서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희생자 전국합동추모제가열리고 있다.
 13일 오후 1시 서울시청 신청사 다목적홀에서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희생자 전국합동추모제가열리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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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선씨가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무(살풀이춤)를 추고 있다.
 문진선씨가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무(살풀이춤)를 추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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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에 들어섰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600여 명의 유족들이 자리를 메웠다. 벽면에는 '진상 규명' '명예회복' '박근혜 대통령은 민간인학살 해결하라'는 천글씨가 걸렸다. 애잔함을 더해주는 진혼무(살풀이품, 문진선)에 이어 술과 음식이 차려진 잿상에 축문을 올렸다.

"아버지! 가슴이 찢어지고 목이 메입니다. 평생 불러보지 못한 그 이름 '아버지', 생전에 효도 한 번 못해 본 게 천추의 한 이 되어 불효자는 이렇게 통곡하며 가슴을 칩니다...삼가 맑은 술과 음식을 받들어 드리오니 두루 흠향하시옵소서."

축문이 낭독되자 유족회원들은 모두 고개를 떨궜다. 문씨도 눈시울을 붉혔다. 

김광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 대표의장이 제상 앞에 섰다. 그는 "중단된 민간인 희생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재개하기 위해 국회에 진실화해기본법이 상정돼 있지만 수년 째 통과시켜 주지 않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지난 2005년 노무현 정부당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발족해 진상규명 작업이 시작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전국의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이 경찰과, 군, 그리고 이승만 정부에 의해 불법으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2010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 법적 활동 기간이 종료되자 진상규명과 명에회복을 위한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     

김 대표는 "우리 유족들이 한 분 두 분 고령으로 죽어가고 있다"며 "유족들이 어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인정머리 없는 정부가 야속하다"고 성토했다. 김 의장은 "영령님들이 이 땅에 평화와 인권이 정착될 때까지 우리 유족회원들을 응원해 달라"고 축원했다.

"개나 고양이가 죽어도 묻어 주는데...이게 나라 맞냐"

유가족들이 특별접 제정을 통해 중단된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유가족들이 특별접 제정을 통해 중단된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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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추도사를 통해 "저 또한 전쟁 때 군경에 의해 가족을 잃은 유족"이라고 밝혔다. 임 소장은 이어 " 아무리 가난한 집도 수의를 해서 저승길을 보내주고 개나 고양이가 죽어도 고이 묻어준다"며 "이유 없이 끌려가 죽고 수의도 입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리 나라 군대가 자기나라 국민을 죽이고도 60년 여 년 동안 사죄하는 사람이 없다"며 "이게 지구상의 나라라고 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유족회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법스님(대한 불교조계종 화쟁위원장)은 "영령들이 편히 쉬시기를 기도한다"며 "후손들의 무능함과 미망을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추도했다.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는 "한반도가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진 전철을 다시 밟아서는 안 된다"며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과거역사 바로세우기와 미래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한다"며 강조했다.

결의문을 낭독하자 유가족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들이 절규하듯 외쳤다.

"중단된 과거사 청산을 즉각 실시하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즉각 제정하라! 우리 아버지와 가족을 살려내라! 추모공원을 즉각 조성하라!"

"제가 죽기 전에 아버지 유해를 발굴할 수 있을까요?"

문양자씨(왼쪽) 등 희생자유족들이 헌화와 분향을 하며 흐느끼고 있다.
 문양자씨(왼쪽) 등 희생자유족들이 헌화와 분향을 하며 흐느끼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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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들의 헌화가 시작됐다. 분향대에 선 긴 행렬만큼 눈물과 흐느낌이 이어졌다.

문씨가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제단에 올렸다. 그리고는 준비해온 술을 꺼내 들었다. 한 잔 한잔 술을 따르던 그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손을 모아 기도하던 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설움이 복받쳐 오른 듯했다. 문씨는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삼켰다.

"아버지일지도 모를 유골이 짐승 뼈다귀처럼 나뒹굴고 있어요. 집단학살 현장이니 더 이상 유해훼손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해 달라는 안내판 설치도 안 돼 있어요. 제가 죽기 전에 아버지 유해를 발굴할 수 있을까요?"

문씨는 대전유족들과 함께 다시 버스에 올랐다. 합동추모제를 올렸지만 누구도 위로 받지 못한 듯 얼굴빛이 어두웠다. 

갑자기 날선 바람이 몰아쳤다. 버스외벽에 걸린 '유해발굴'을 촉구하는 천글씨가 심하게 흔들렸다.


태그:#전국하동추모제, #민간인학살, #서울시청, #대전산내유족회, #유해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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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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