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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고 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후회와 아쉬움이 남지만, 올해는 그런 기분이 조금 덜하다. 20대 초에 나 자신과 했던 다짐을 지켰기 때문이다. 올해 이 다짐을 이룬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풍성한 한 해였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삶의 태도나 목표가 결정적으로 정립되는 순간 말이다. 나에게는 1999년 늦여름이 그러했다.

1999년 3월, 나는 지방 국립대에 입학했다. IMF는 우리 집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결국 원하던 곳은 아니지만 등록금이 싸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만한 곳을 선택해서 진학하게 됐다(장학금은 입학할 때 딱 한 번밖에 못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취생들은 항상 가난하다. 생활비가 없어 주중에는 학교를 다니고, 주말에는 다음 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인력 시장에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1학기를 끝으로 휴학 아니면 자퇴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형편이 나빠졌다. IMF의 여파로 군대 지원자가 넘쳐나서 군대도 마음대로 못 가던 시기였다.

교수님과 하얀 봉투

1999년 우리 과에 젊은 교수님이 새로 오셨다. 그분은 '99학번'들의 지도교수를 맡으셨다. 당시 학번 대표였던 나는 그 교수님과 어울릴 일이 몇 번 있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우연히 어떤 자리에서 교수님에게 형편이 좋지 않아 휴학을 할 거라고 말씀 드렸다. 사실 말이 휴학이지 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기에 자퇴나 다름 없었다. 그냥 여러 명이 떠드는 가운데 흘러가듯 한 얘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기억에 담고 계셨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며칠 뒤 교수님이 부르셨다. 여름방학 동안 자신은 서울에 자주 가야 하니 당신이 없을 때 본인의 연구실 청소를 해달라고 하셨다. 아니, 휴학하겠다는 애한테 방학 동안 청소를 하라니… 하지만, 그때까지는 나도 부모님이 혹시라도 등록금을 마련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가 있었기에 일단 교수님이 시키신 대로 연구실을 관리하면서 틈틈이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시간은 흘러갔고, 등록 기간을 넘겼다. 개강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남은 건 추가 등록 기간뿐이다. 이 때까지 등록금을 구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휴학을 해야 했다.

추가 등록 마지막 날 오후에 서울에서 돌아오신 교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내 앞에 하얀 봉투를 내밀면서 연구실을 청소해 준 대가라고 하셨다. 봉투 안에는 10만 원짜리 수표 9장이 들어있었다. 당시 내가 내야 할 등록금은 정확하게 88만5000원이었다. 어느 정도 보수를 주시리라 기대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교수님은 정신 차리고 빨리 가서 등록이나 하라고 하셨다. 그때서야 정신이 들어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마감시간이 지나기 전에 등록하기 위해 교내 은행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계속 눈물이 났다. 교내 은행 창구에 들어서서 울먹이며 등록금 고지서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나중에 내가 지금 교수님의 나이가 되면 받은 만큼 후배들에게 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교수님은 35살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2014년, 35살이 되다

2014년 나는 35살이 되었다. 교수님 덕분에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큰 부자가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큰 회사에 다니면서 예전의 가난은 이제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의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올해 15년 전 다짐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모교 학과사무실로 전화해서 장학금 기탁 의사를 밝혔다. 관련 서류를 작성해서 보낸 후 100만 원을 부쳤다. 성적을 떠나서 교육공학에 대한 열정이 크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다.

예전보다 물가가 많이 올라 지금 후배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그나마 다행인 건 국립대라 아직 등록금이 200만 원 안팎이라는 거였다). 그래도 이걸 받는 어떤 후배가 다시 35살이 되었을 때 또 다른 자신의 후배에게 베풀 수 있을 만큼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전달했다.

1999년 늦여름 꾀죄죄한 촌놈에게 교수님이 주셨던 봉투는 2014년 열정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경제력으로 절망하고 있을 또 다른 청춘에게 전달됐다.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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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구미지역 언론협동조합 뉴스풀(newspoole.kr)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태그:#교육공학, #안동대학교, #유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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