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콘크리트 블록 위에 만들어진 논
 콘크리트 블록 위에 만들어진 논
ⓒ 오창균

관련사진보기


"이것은 지훈이가 먹는 밥이 되는 쌀나무야, 신기하지?"
"정말 우렁이가 있네요. 여기서도 벼농사가 되는구나."
"지금쯤, 논물을 빼줘야 잘 익어요. 고향에서 보고 처음이네."

주차장 한 켠에 승용차 한 대를 주차할 수 있는 크기의 논이 만들어졌다. 콘크리트 바닥의 논에서 벼가 자라는 풍경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에게 살아있는 동화를 들려주기도 하고, 잃어버린 추억을 되살리듯 벼이삭을 만져 보기도 한다. 

한 평 논에서 생태계가 만들어지다

지난 6월 초, 서울 영등포구 하자센터에 한 평 남짓한 논이 만들어졌다. 보도블록이 깔린 바닥에 물을 가둘 수 있는 방수천을 씌우고, 철도 침목으로 논둑을 만들어 흙을 채웠다. 4개 품종의 토종벼가 한 뼘 남짓한 깊이의 흙에서 잘 자랄 수 있을까 걱정됐다. 주변의 높은 건물에 가려서 벼가 햇볕을 쬐는 시간도 짧았다. 그렇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콘크리트에서 벼농사가 시작됐다.

뿌리가 자리를 내리느라 며칠 몸살을 앓은 후 벼모종은 점차 활기를 찾았다. 논바닥을 우렁이 한 마리가 유유히 걸어다녔다. 개구리밥이 생기면서 정말로 개구리가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기대도 했지만, 그런 깜짝 놀랄 만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소금쟁이가 보였고, 잠자리 유충이 물속을 꼬물꼬물 기어다녔다.

번데기 과정을 거치지 않는 잠자리 유충은 때가 되자, 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벼를 비빌 언덕 삼아서 밀랍으로 만든 것 같은 허물을 남기고 잠자리가 되어 날아갔다.

우렁이 알
 우렁이 알
ⓒ 오창균

관련사진보기


벼포기가 굵어지고 분화되는 줄기 사이에 분홍색 포도 한송이가 놓였다. 우렁이 알이다. 우렁이는 논의 경계를 이루는 시멘트벽과 건너편 수조의 갈대에도 알을 낳느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벼이삭이 패이고 벼꽃이 필 무렵,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우렁이 새끼들이 태어났다. 벼나방을 사냥하려는 거미도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물을 펼쳤다. 다른 곤충들도 수시로 들렀다 갔을 것이다. 비록 한 평짜리 작은 논이지만 우주의 삼라만상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 있다

가을 바람에 벼이삭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 만석꾼의 논둑길을 걷는 착각마저 들었다. 짱짱하게 칼날을 세웠던 벼 이파리는 점차 무뎌지고 가볍게 야위어갔다. 쭉정이가 되는 것 아닌지 걱정되던 벼이삭의 낱알은 서서히 딱딱하게 여물어갔다.

얇은 껍질 속에 한 톨의 쌀을 채우기 위해, 벼이삭은 여름날에 뜨거운 햇볕을 찾아 이리저리 나침반이 되었다. 화살처럼 쏟아지는 장맛비와 태풍에도 꼿꼿하게 버텨가며, 자연의 섭리를 쌀 한 톨의 우주로 담아냈다.

토종쌀 녹두도, 홍라, 백석, 동진찰(오른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토종쌀 녹두도, 홍라, 백석, 동진찰(오른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 히옥스

관련사진보기


'옛말에 우리 인간을 소우주라고 얘기하는데 소우주는 사람이 만든 소우주가 아니야. 풀 하나도 소우주라 이 말이야. 한살림운동이란 게 뭐냐. 다 살리겠다는 얘기 아녜요. 천상천하가 매일 자기를 보호해서 먹게 해주고 살게 해주는데 그렇다면 당당하게 살 것이지, 뭘 이렇게 이것저것 잡된 것을 집어넣느냐 말이지. 이걸 편히 가지면 이걸 비우면 철따라 채소가 나면 반가워. 햇살이 나면 은혜를 알야야 되요. 은혜를 알면 생활이 기뻐. 은혜를 모르면 맨날 일등만 하려고 맨날 미쳐 돌아가는 거지'
- 무위당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 본문중에서

훌태로 털어내지 못한 낟알은 손으로 훑었다. 맷돌처럼 생긴 매통(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맷돌의 원리로 쌀껍질을 벗기는 쌀도정기)을 돌려서 껍질을 벗겨내자 저마다 다른 모양과 색깔의 쌀이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한 줌의 토종 쌀을 보면서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생각해본다.




태그:#식량주권, #신토불이, #하자센터, #장일순, #우렁이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