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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을 싸웠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하루에도 몇 번씩 속절없는 패배감을 되뇌어야 하는 노인의 마음을 헤아려본 적 있습니까. 눈앞에는 거대한 송전탑이 있고 거기엔 송전선 36가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밀양에 있는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무려 8개의 송전탑이 한눈에 보인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이 학교에 다니는 5학년 초등학생이 '진격의 송전탑'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다네요. '산에서 마을로 쿵쿵쿵 들이닥치는 거대한 송전탑'들 입니다. 그 거대한 진격의 송전탑을 등지고, 그 실루엣을 느끼며 밀양 주민들은 논밭으로 나갔다가 그 꼴을 보기 싫어 고개를 숙인 채 되돌아오길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8개의 송전탑이 한눈에 보이는 밀양의 초등학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그린 '진격의 송전탑'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그린 '진격의 송전탑'
ⓒ 박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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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봤자 안 되더라.'
'국가와 싸워서 어찌 이기나.'

밀양 주민들이 10년 동안 한국전력과 싸울 때마다 주변에서 들어야 했던 잔소리, 그 충고의 언어란 결국 이런 패배의 수사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괴로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국가 권력을 향한 수많은 투쟁들은 밀물처럼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궤적을 그려왔습니다. 밀양도 예외는 아닙니다. 수많은 싸움이 그러했듯이 조금씩 썰물로 빠져나간 황량한 갯벌처럼 밀양 송전탑 현장은 쓸쓸하기만 합니다. 마지막 자존감만이 남아 하루하루 버티며 지내는 날들입니다.

그래서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에서는 밀양지역 7개 마을에 사랑방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을 아직 한국전력의 보상금을 받지 않고 버티는 주민들의 터전으로 삼아 함께 밥 먹고 막걸리를 마시고 연대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또 매주 한 번씩 모두 만나 같이 밥 먹고 노래를 부르고 영화도 보고 사는 이야기도 하는 문화제를 열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을 만들어 도시의 연대자들에게 손수 지은 농산물을 팔기도 하고요. 작은 푼돈이나마 뿌듯하게 쥐어드리며 아직 식지 않은 밀양을 향한 연대의 마음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6·11 행정대집행 이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가는 철탑을 바라보며 심란하고 괴로운 마음들을 함께 견뎌왔습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늘 승리와 패배의 기준에 대해 물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패배한 것인가. 어르신들은 마이크만 손에 잡으면 혹은 발언의 자리에 설 기획만 생기면 거의 입을 맞춘 듯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간다."
"우리는 저 철탑 뽑아낼 때까지 싸울 거다."

승리와 패배, 승리란 무엇이고 패배란 무엇일까요? 송전탑이 건설되느냐, 마느냐를 두고 승리와 패배를 규정한다면 그 싸움은 애초부터 너무나 뻔한 결과를 예정하고 있었을 겁니다. 하루 수천명이 동원된 젊은 경찰 병력들과 합쳐봐야 200명이 채 안 될 노인들이 맞서 싸우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요?

연간 매출액 60조 원의 초대형 공기업과 그들의 편을 드는 보수 언론들에 맞서 아무리 울부짖고 외쳐본들 상대가 되나요? 승리와 패배를 그렇게 규정한다면 세상의 모든 싸움은 모두 가진자들의 승리일 뿐입니다. 질 게 뻔한 싸움에 나설 사람은 없습니다. 승리와 패배에 대한 판단이 달라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민들은 "끝까지 가겠다" 하십니다.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우고, 당신들이 입었던 피해와 고통에 대해 책임지길, 사죄받고 제자리로 되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정신 승리'가 아니라, '끝까지 가서, 누가 옳았는지'를 인증받고, 그 옮음을 따라 이 사태 이전의 자리로 되돌아 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국의 많은 송전탑 반대 주민들, 송전선로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지역과 연대하여 희망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결성된 전국송전탑반대네트워크에서 전원개발촉진법을 비롯한 에너지 3대 악법 개정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밀양을 에너지자립마을로, 그 시작은 서울시 미니태양광

지난 1월 단장면 동화전 마을 농성장에도 우리집햇빛발전기가 설치됐다. 이계삼 사무국장은 마치 시골에 처음 전기가 들어왔을 때의 기분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지난 1월 단장면 동화전 마을 농성장에도 우리집햇빛발전기가 설치됐다. 이계삼 사무국장은 마치 시골에 처음 전기가 들어왔을 때의 기분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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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일들에 무언가 허전함이 남아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다독이고 놓지 않은 손길을 확인하는 일도, 법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도, 무언가 허전함이 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저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밀양 어르신들은 이 싸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내내 '당신들도 한국전력 전기 쓰지 않느냐, 누군가가 당해야 될 희생이라면 사람이 적은 시골이 감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논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름하여 '에너지자립운동'이 생겨났습니다. 우리 스스로 한전과 핵발전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자는 운동이 지금 이 나라 곳곳에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곳 밀양은 이런 에너지자립운동의 한 거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76만 5000볼트 초고압 전류가 흐르는 거대한 송전탑 바로 아래 이런 마을을 그려 봅니다. 마을 곳곳 집집마다 지붕에 태양광 판넬이 설치되어 번뜩이는 풍광 혹은 마을 곳곳에 바이오매스 발전 시설들이 들어앉아 있는 모습을요. 그래서 한국전력 전봇대를 철거하는 트럭들이 오가고 그것을 뒷짐지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노인들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그것이 꿈으로만 그칠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당위가 우리에겐 있습니다. 고맙게도 이 일을 위해 서울 시민들이 나서 주었습니다. 서울시가 실시하는 미니태양광 설치 사업이 그것입니다(관련기사 :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이대로 실패?).

이 기사에 따르면 서울 시민들이 서울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에 서울시 미니태양광 설치를 신청할 경우, '미니태양광 가격 64만 원(재료비+설치비+조합운영비)에 책정된 조합 운영비 가운데 3만 원을 밀양 햇빛연대기금으로 밀양에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협동조합이 하는 캠페인이지만, 실제로는 서울 시민이 스스로 밀양에 에너지자립마을 햇빛연대기금을 보내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신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밀양 노인들의 투쟁도 그런 신비의 궤적을 그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초자연적인 신비가 아니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기적'이 될 것입니다.

☞ 서울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의 미니태양광 신청하기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계삼은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 사무국장입니다.
서울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의 미니태양광 문의전화 02-383-0855



태그:#밀양 송전탑, #밀양, #에너지자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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