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표지
▲ 모든 인간은 죽는다 책 표지
ⓒ 삼인

관련사진보기

그 스스로 삶과 작품 모두에서 치열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던 진보적 지식인임에도 평생의 반려자인 사르트르와 연관해 더욱 널리 알려진 시몬 드 보부아르의 세 번 째 소설이다. 삶의 본원적인 불안정성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삶의 의미를 이끌어내는 실존주의 철학, 나아가 삶 속에서 묻어난 통찰이 소설 속 인물과 대사를 통해 품격있게 표현된다.

영원을 사는 존재를 통해 보여지는, 거의 무가치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동시에 그로써 의미있는 무언가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 불멸의 인간 포스카의 일대기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보부아르의 소설은 깊이있는 사상과 철학적 고뇌가 녹아든 작품을 찾기 힘든 근래의 소설 가운데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듯하다.

보부아르의 자전적 작품들은 이미 국내에도 몇 차례 소개된 바 있지만 <모든 인간은 죽는다> 만큼 대중적이며 흥미로운 소설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때문에 학원사가 1990년에 출판한 이래 다시 간행되지 않았던 이 소설이 지난달 삼인에 의해 출간된 건 보부아르와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양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소식이다.

소설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글을 주로 번역해 온 변광배 씨에 의해 번역되었는데 한문희 씨가 옮긴 학원사 판 만큼 감각적이고 강렬한 문장은 아니지만 쉬운 문장구성으로 위화감 없이 잘 읽힌다는 장점이 돋보인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세 번째 소설, 24년 만에 국내 서점가 상륙

올 초 SBS에서 방영된 <별에서 온 그대>는 400년 전 별에서 온 외계인 도민준이 지구인 여성과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그려 국내는 물론 중국에서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들 가운데서 수백년 간 고고하게 살아가던 도민준이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지고지순한 사랑과 관심으로 사랑하는 그녀를 위기로부터 지켜낸다는 것이 드라마의 대략적인 줄거리로 이로부터 강조된 낭만성과 판타지적 요소가 드라마의 인기요인으로 그대로 이어졌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어찌보면 <모든 인간은 죽는다> 역시 이와 비슷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불멸의 삶을 사는 남성이 현 시대의 촉망받는 여배우와 만난다는 점이 그렇다. 차이라면 드라마가 현재적 사랑에 중점을 둔 반면 소설은 불멸이라는 설정으로부터 시간과 존재, 인간과 삶, 즉 실존의 영역으로 곧바로 돌입해 들어간다는 점일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레몽 포스카라는 남자다. 그는 오래 전 자신이 다스리던 도시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부하가 가져온 불멸의 약을 먹고 죽지 않게 된 사람이다. 그는 그로부터 칠백 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역사의 여러 사건의 중심에 섰고 많은 것들을 이룩하고 또 잃어버린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특권처럼 보이던 불멸성이 저주임을 깨닫고 절망하지만 영원한 삶으로부터 그를 구원할 죽음은 언제나 그를 외면한다. 죽지 않음으로 그는 영원하고 영원하므로 모든 것이 하찮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소설은 무한한 삶이기에 가치가 없는 레몽 포스카와 그를 마주하고서 자신의 짧고 하찮은 삶에 절망하는 레진의 모습을 통해 삶과 인간은 대체 어디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포스카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인물이다. 그는 불멸한 삶을 얻고 그로부터 칠백 년에 걸친 삶을 살아가며 몇몇 사람들과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나누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정해진 시간 만을 살고 곧 죽어버린다.

포스카는 그로부터 사람은 제한된 삶 속에서 죽음과 시간을 무릅쓰고 행동할 때 가치를 획득하지만 그 자신은 영원한 삶을 살아가므로 그와 같아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때문에 그는 곧 자신의 삶을 저주하게 되며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사람이 되어 서서히 침잠해가기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말해 포스카는 죽음이 제거된 불멸성을 통해 영원히 인간성을 획득할 수 없는 외로운 인물이 되고 만다.

7백 년의 시간과 전 유럽의 공간을 아우르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제국,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을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역사를 관통하며 펼쳐지는 드라마는 소설을 실존적 고뇌에 매몰되어 종으로만 깊게 하지 않는 장치로 작용한다. 포스카는 16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2세기 후에는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학자들과 왕래하며 1848년에는 혁명에 가담하기도 한다.

소설은 중세 이탈리아의 권력 투쟁, 신대륙 발견, 신성로마제국 수립 시도, 코르테스의 중남미 정복, 종교 전쟁, 프랑스 혁명 등의 굵직한 사건을 통해 자유, 진보, 민주주의, 군국주의, 정복과 전쟁의 문제 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수백년의 시간과 전 세계라는 공간은 소설의 영역을 횡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이야기는 때로는 흥미진진하다가도 때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끔 하며 마침내는 깊은 감동과 깨달음으로 독자를 이끌어 간다.

소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그 사이에 다섯 개의 장을 배치하여 장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실존의 문제를 중심으로 복잡다단한 인간세상의 문제들을 부차적으로 제기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실존주의에 기반한 흔적이 군데군데서 보이지만 그 철학 속에 매몰되어 주장을 일방적으로 설파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소설은 실존주의를 기틀로 삼아 독자에 따라 여러가지로 확장 가능한 멋진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으며 보부아르의 비범한 표현력은 이러한 장점을 배가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할 만하다. 적어도 표현의 영역에 한정해서 본다면 보브와르는 사르트르마저도 초월해 있음이 분명하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보부아르 사상의 깊이와 특유의 문장력이 잘 녹아든 훌륭한 소설이다. 드라마와 영화의 원작소설들, 청소년 문학이나 가볍고 감각적인 일본문학이 주도하는 현재 한국 서점가의 소설분야에서 새로운 책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가장 먼저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설령 당신이 저를 잊는다 해도 우리의 우정은 존재한거예요. 미래는 그것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눈을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강하게 했다.

"당신이 나를 잊을 미래 전부,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나는 그것들을 받아들여요. 그것들은 당신의 일부예요. 그런 미래와 그런 과거와 함께 거기 있는 것이 바로 당신이죠. 난 그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죠.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왔어요. 시간은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고. 그저 만일…."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그녀는 아주 빠르게 말을 끝냈다.

"…그저 만일 당신이 제게 우정을 갖고 계시다면요."

나는 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사랑의 힘으로, 이제 수 세기 만에 처음으로, 과거에도 불구하고, 미래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하게 실재했고, 완전하게 살아 있었다. 나는 거기에 있었다. 한 여자가 사랑하는 한 남자, 이상한 운명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 땅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만졌다. 오직 한마디, 그러면 이 죽은 껍데기에 금이 갈지도 모른다. 새로이 삶의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고, 세계는 다시 얼굴을 되찾고, 거기에는 기다림, 기쁨, 눈물이 있겠지.

그녀가 아주 낮게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582p)

덧붙이는 글 | <모든 인간은 죽는다> 저자 시몬 드 보부아르 / 역자 변광배 / 삼인/ 2014.10.28 / 608쪽/ 2만 5000원



모든 인간은 죽는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변광배 옮김, 삼인(2014)


태그:#모든 인간은 죽는다, #시몬 드 보부아르, #삼인, #변광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