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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어 그 후로 휠체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되기 전 비장애인이었던 학창 시절에 유독 달리기에 재능이 없어 운동회라는 것에 별로 좋은 기억은 없습니다. 가을운동회, 축제. 그런 단어는 저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달리기 대회에서 일등부터 삼등까지 찍어주던 도장 때문입니다. 달리기에서는 늘 꼴등이었던 저는 운동회하면 꼴등에게는 찍어주지 않는 도장만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팔뚝이 부끄러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긴팔을 입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깟 달리기 하나로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나라고 생각하실 수 도 있겠지만 달리기를 잘하지 못하는 것 하나로 운동회 전체에 대한 기억이 나빠진 것은, 아마도 개인에게 찍어주던 '도장'으로 상징되는 분리와 낙인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장을 받은 아이와 못 받은 아이 사이에서 저는 항상 도장을 못 받은 아이였지만, 비장애인었던 저는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일등이 될 수 있는 기회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한 초등학교에서 늘 꼴등만 하는 친구를 위해 학생들이 손을 잡고 똑같이 결승선에 들어와 모두가 일등이 되었었다는 기사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를 접하고 제 마음만큼은 훈훈해지지 않았습니다. 달리기를 못하던 삐쩍 마르고, 힘없는 아이였던 저의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 그 입장이 되어봤습니다.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고마웠겠지만, 누구의 양보와 배려 없이는 행복할 수 없는 인생을 예감하며 슬펐을지도 모릅니다.

장애인부모가 아이를 가질 때, 내 아이가 장애아이면 어떻게 될까라는 두려움이 더 큽니다. 양수검사에서 장애아일 확률이 높을 경우에 낙태를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장애인도 많습니다. 장애인으로 살아왔던 인생에서 차별받고, 소외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몇 십 배의 노력이 필요했던 경험을 자식이 똑같이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장애인이어도 괜찮아. 내가 너를 이해해줄게.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장애인이어도 괜찮아'라는 말이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면 긍정적으로 세상을 개척할 수 있다'라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회에서 장애는 긍정적이지 않은데 '장애는 개성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다'라는 주장은 사회의 불평등을 편견 없는 태도로만 해결하겠다는 위선일 뿐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할 몫을 했습니다. 장애를 가진 친구의 상황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일등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기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약자를 배려하고 그 마음을 몸소 보여준 아이들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이제는 어른들의 몫이 남아있습니다. 어른들은 왜 운동회를 모두가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남기지 못하게 하는지. 어른들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종목을 만들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1등만을 기억하는 사회의 룰을, 1등이 아니어도 행복할 권리를 사회의 룰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선함이 어른이 되어서는 '약자에 대한 우월한 태도'에서 나오는 '시혜'로 만들고, 배려심을 동정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어른들의 책임이기 때문이고, 인권은 가진 자가 조금 양보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정지영 씨는 현재 서울DPI 회장직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운동회, #장애인, #달리기, #행복할 권리,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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