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유신철폐·독재타도'를 외쳤던 부마민주항쟁 당시 사망자를 정부가 35년이 지나 인정할까. 부마민주항쟁 때 사망했던 고 유치준(1928년생)씨 유가족들이 정부에 피해자 신고를 하기로 해 관심을 끈다.

부마민주(민중)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경남 마산(창원)에서 유신 체제에 항거해 일어났던 항쟁을 말한다. 당시 박정희 유신 정권은 10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20일 마산·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국무총리실 소속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아래 심의위)는 오는 3일부터 '사실·피해 등 신고'를 접수한다. 경남·부산 거주자들은 경남도청과 부산시청에, 다른 지역 거주자들은 심의위에 직접 신청하면 된다.

1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는 유치준씨의 유가족들이 접수 첫날인 3일 오전 경남도청 행정과를 찾아 '피해신고 접수'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던 1979년 10월 18~19일 사이 마산 거리에서 사망했던 고 유치준씨의 부인과 아들 등 유족들은 오는 3일 경남도청 행정과를 찾아 '부마민주한쟁 진상규명을 위한 사실, 피해 등 신고 접수'를 한다. 사진은 유족들이 2011년 9월 1일 경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망자 최초 확인' 사실을 공개했을 때 모습.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던 1979년 10월 18~19일 사이 마산 거리에서 사망했던 고 유치준씨의 부인과 아들 등 유족들은 오는 3일 경남도청 행정과를 찾아 '부마민주한쟁 진상규명을 위한 사실, 피해 등 신고 접수'를 한다. 사진은 유족들이 2011년 9월 1일 경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망자 최초 확인' 사실을 공개했을 때 모습.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유치준씨 사망자 최초 확인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유치준씨가 부마항쟁 사망자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진 때는 지난 2011년 9월 1일이었다. 이날 '부마민주항쟁특별법제정을 위한 경남연대'가 유족 증언과 관련 자료, 관련자 진술 등을 근거로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했다.

부마항쟁 당시 '사망자 3인 의혹'이 제기되었고 일부 언론 보도도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사망자 명단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부산·마산에서 사망자가 없다고 발표했다.

고인의 큰아들 유찬국씨는 2011년 8월 마산중부경찰서를 찾았지만 아버지와 관련한 정보가 없다는 말을 듣고, 경찰로부터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찾아가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기념사업회는 유찬국씨와 면담한 뒤, 고인이 호적등본에 기록된 인적사항과 사망일시, 장소 등이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에 실린 관련 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남부희·김현태(당시 경남매일신문 사회부장·평기자)씨는 당시 취재 및 보완했던 자료들을 은밀하게 보관하다 기념사업회에 넘겨 자료집에 실었다. 그 자료는 경찰의 '1979년 10월 18일 마산 경남대 소요사건 1차 발생 보고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료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대림여관 앞 도로변(새한자동차 영업소 앞)에서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 데모대 3명 사망 추정."

고인의 제적등본 기록에 보면 "1979년 10월 19일 오전 5시 마산 산호동 소재 새한자동차 마산지사 앞 노상, 동년 11월 14일 동거인 유찬국 신고"라 적혀 있었다.

유족들은 "1979년 10월 18일 마산항쟁 당일, 고인이 경남모직 인근 건설현장 일을 나갔다가 밤이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며 "부인이 경찰서 등을 전전하며 수소문하다가 허사였고, 이후에도 온 가족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사고 뒤 보름 정도 지난 11월 초순경 파출소 직원이 찾아와 사망 사실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당시 경찰은 고인의 소지품 가운데 '도시락 속 주민등록증'으로 신원을 확인해 유족한테 연락했다. 시신은 마산 서원곡에 가매장됐고, 부검 결과 '후두부 함몰'이라는 의사 소견이 나왔다.

또 유족들은 "장례를 치른 뒤 셋째 아들이 새한자동차 영업소 앞을 찾아가 탐문한 결과, 이발관 주인이 '18일 저녁 시위대를 쫓던 경찰들이 지나간 뒤 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앉아 있었고, 일어서려고 고개를 들어도 자꾸 고꾸라지며 구토를 여러 번 했다'고 증언했다"며 "19일 아침 출근하다가 그 지점에서 시신을 거적때기로 덮어 놓은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유신 정권 하의 경찰과 관련 당국은 고인에 대한 신원을 즉시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하거나 수사하지 않고 가족한테도 알리지 않고 철저하게 은폐한 상태에서 임의로 부검하고 즉시 가매장하는 불법적 범죄행위를 자행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예산·인력 부족 핑계로 홍보 제대로 안해"

심의위는 지난해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지면서 구성됐다. 그런데 심의위원 상당수가 지난 대통령선거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 인사들로 구성되어 정치적 중립성이나 전문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을 받았다.

심의위가 지난 10월 13일 출범하자,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 (사)부산대학교10·16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공동성명을 통해 "정부는 편파적인 위원임명으로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무력화시키지 마라"고 촉구했다.

유치준씨 유족의 신고 접수와 관련해,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현재 정부에서는 예산과 인력 부족을 핑계로 홍보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며 "35년이 지난 시점에서 관련자 대부분이 전국으로 흩어져 살고 있고, 대부분 장년층임을 감안하여 다각도의 홍보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보상받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는 식의 접근은 정부의 법제정 취지를 무색케 한다"고 지적했다.

기념사업회는 "고 유치준씨 유족들의 신고 접수를 계기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신고 접수가 널리 홍보되고 접수를 준비하고 있는 분들을 독려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태그:#부마민주항쟁, #유신철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