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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山東)성에 있는 인구 64만의 작은 현 취푸(曲阜)는 공자(孔子)의 고향, 유교문화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춘추전국시대 870년간 노(魯)나라의 수도였던 이 도시의 중앙에 3공(三孔), 즉 공부(孔府), 공묘(孔廟), 공림(孔林)이 자리 잡고 있다.

취푸 인구의 1/5을 차지하는 공자 후손의 관저이자 사저이기도 했던 이곳에는 1,300여 채의 금, 원, 명, 청대를 거친 건축군, 1,000여 건의 석조조각, 5,000여 점의 서예 예술작품, 10여만 점의 고분 출토 문물, 17,000여 그루의 고목, 30만 건의 문서 등을 소장하고 있어 정치, 사상, 경제, 문화, 예술, 의복, 식물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소중한 연구 사료가 되고 있다. 1994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취푸에도 국경절 연휴를 맞아 많은 관광객들이 공자의 흔적과 유교문화의 체취를 찾아 인산인해를 이뤘다.
▲ 국경절에 취푸를 찾은 관광객들 취푸에도 국경절 연휴를 맞아 많은 관광객들이 공자의 흔적과 유교문화의 체취를 찾아 인산인해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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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국경절 연휴는 어딜 가나 인산인해(人山人海)여서 사람들 엉덩이만 보고 온다는 말이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최근 '공자 띄우기'에 중국 언론까지 바람잡이로 나서선지 취푸에는 공자님을 뵙겠다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3공 중에서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불리는 공부를 먼저 구경하기로 하고 힘겹게 입장권을 구입해, 만리장성처럼 길어진 행렬 속으로 들어간다. 청(廳), 당(堂), 루(楼), 방(房)을 합쳐 모두 463칸이라는데 이 인파 속에서 얼마나 제대로 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공부의 입구에는 성스러운 관청이라는 의미의 ‘성부(聖府)’ 편액이 있는데, 명나라 엄숭(嚴嵩)의 글씨다.
▲ 성부(聖府) 공부의 입구에는 성스러운 관청이라는 의미의 ‘성부(聖府)’ 편액이 있는데, 명나라 엄숭(嚴嵩)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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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8년 송(宋)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공부는 공자의 직계 후손들이 살던 관아이자 봉건 귀족저택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가장 큰 규모의 건축군이다. 주요 건물이 중앙에 배치에 배치되고, 동쪽에는 주로 가묘(家廟), 서쪽은 학당이 있다. 공부의 입구에는 성스러운 관청이라는 의미의 '성부(聖府)' 편액이 있는데, 명나라 엄숭(嚴嵩)의 글씨다. 중국 열 명의 성인(十聖) 중 으뜸인 지성(至聖)이 바로 공자다. 오악지존 타이산(泰山)과 십성지존 공자는 산둥성 사람들이 갖는 무한한 자부심의 근원이다.    

‘부(富)’자에는 갓머리의 머리가 없고, ‘장(章)’자에는 한 획이 더 써져 있다.
▲ 공부 입구의 대련 ‘부(富)’자에는 갓머리의 머리가 없고, ‘장(章)’자에는 한 획이 더 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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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양옆 대련에는 오른쪽에 '위국함휴안부존영공부제(與國咸休安富尊榮公府第, 국가와 편안함과 부귀 존영을 함께 한 관저)', 왼쪽에 '동천병로문장도덕성인가(同天并老文章道德圣人家, 하늘 같이 뛰어난 문장가이자 도덕 성인의 집)'라고 붙어 있다.

청나라 기윤(紀昀)이 쓴 것으로 자세히 보면 '부(富)'자에는 갓머리의 머리가 없고, '장(章)'자에는 한 획이 더 써져 있다. 관료로서 부귀는 아예 생각지도 말라고 머리를 없앴고, 공자의 문장이 이미 하늘에 통해(文章通天), 그 빼어남을 나타내기 위해 한 획을 수직으로 더한 것이다. 원래 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 공자의 적손만이 중앙 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 중앙 '성인지문(聖人之門)' 편액 아래로 수많은 관광객이 긴 용을 이뤄 넘실댄다.  

공부의 세 번째 문인 중광문은 옆으로 담이 없이 대문만 있어 독특한 형태로 서 있다.
▲ 중광문(重光門) 공부의 세 번째 문인 중광문은 옆으로 담이 없이 대문만 있어 독특한 형태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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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나서면 석고(石鼓)가 기둥을 받치고 처마 끝에 금색 꽃봉오리가 조각된 병풍처럼 작은 문이 있는데, 명나라 세종이 친히 '은사중광(恩賜重光)'이라는 편액을 내려 중광문(重光門)이라 한다. 공부의 세 번째 문인 중광문은 옆으로 담이 없이 대문만 있어 독특한 형태로 서 있다. 그 주변으로 봉건왕조의 6부에 해당하는 여섯 개의 관청이 배치되어 공부의 주요 사무를 보았다.

중광문을 지나면 공부에서 가장 큰 관청인 대당(大堂)이다. 한 고조 때부터 공자에 대한 제례가 거행되었으며, 송 휘종 때는 공자 가문의 적손에게 '연성공(衍聖公)'이라는 작위를 내려 그것을 세습하도록 하였으며, 당나라 때부터는 취푸의 현령을 연성공이 맡도록 하였다. 또한 명대부터는 800호에서 2,000호까지의 식읍(食邑)과 각종 세금도 감면 받았다. 대당은 관료로서의 연성공이 집무를 보거나 의식을 거행하던 곳으로 작위의 권위를 나타내는 의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황제의 위탁을 받다 예학(禮學), 악학(樂學) 등의 시험을 보던 곳이 이당(二堂)이다.
▲ 이당(二堂)의 편액 황제의 위탁을 받다 예학(禮學), 악학(樂學) 등의 시험을 보던 곳이 이당(二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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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을 지나면 연성공이 4품 이상의 관료를 접견하거나 황제의 위탁을 받다 예학(禮學), 악학(樂學) 등의 시험을 보던 이당(二堂)이다. 그래서 들어가는 현판에 황제의 명을 받아 성스러움을 집행한다는 '흠승성서(欽承聖緖)'와 과거의 시험과목인 '시서예악(詩書禮樂)'이 적혀져 있다. 청말 연성공의 어머니와 부인이 서태후의 축수연에 참가했다가 선물로 받았다는 목숨 수(壽)자 비석이 다소 생뚱맞게 이곳에 놓여 있다.

이당을 지나면 6개의 태호석이 놓인 정원이 나오는데, 퇴청(退廳)이라고도 불리는 삼당(三堂)이다. 삼당은 연성공이 4품 이상의 관리를 만나거나 가족의 분규를 처리하던 곳으로, '차의판(搓衣板)'이라는 빨래판 모양의 돌이 있는데 여성 가족 구성원들을 체벌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치에 따라 공씨 가문이 얼마나 제가(齊家)에 힘을 기울이고 엄격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네 발과 주변에 이미 온갖 보물을 다 갖추고도 또 욕심을 부려 태양까지 집어 삼키려는 상상의 동물이 그려져 있다.
▲ 계탐도(戒貪圖) 네 발과 주변에 이미 온갖 보물을 다 갖추고도 또 욕심을 부려 태양까지 집어 삼키려는 상상의 동물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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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관료로서 주로 공적인 사무를 보는 곳이라면, 삼당 이후는 공씨 후손들의 주거와 생활공간인 내택(內宅)이다. 내택은 출입을 엄격히 제한한다는 의미로 통로에 3개의 병기를 세워 놓았다. 또한 내택으로 가는 통로의 조벽(照壁)에는 탐욕을 경계하라는 의미의 '계탐도(戒貪圖)'가 있다. 네 발과 주변에 이미 온갖 보물을 다 갖추고도 또 욕심을 부려 태양까지 집어 삼키려는 상상의 동물이 그려져 있다. 일상생활을 하며 늘 지나는 통로에 이 그림을 배치해 놓은 이유는 공무에 결코 탐욕이 없어야 함을 일깨우고자 한 것이라 한다.

공부의 가장 비밀스런 곳이자 귀중품을 은밀히 보관하는 금고 역할도 했다.
▲ 규탑(奎塔) 공부의 가장 비밀스런 곳이자 귀중품을 은밀히 보관하는 금고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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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명대 건축된 규탑(奎塔)이 왼쪽으로 높게 서 있는데 공부에서 가장 높은 4층 건물로 그 안에 3m 깊이의 우물이 있다. 우물은 평상시에 뚜껑을 막아 외부인의 진입을 막고, 유사시에는 피난로로 쓰인다. 이곳은 공부의 가장 비밀스런 곳이자 귀중품을 은밀히 보관하는 금고 역할도 했다고 한다.

벽에 ‘석류(石流)’라고 하는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을 흘려보내 담을 수 있는 돌로 된 저장소가 달려 있다.
▲ 석류(石流) 벽에 ‘석류(石流)’라고 하는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을 흘려보내 담을 수 있는 돌로 된 저장소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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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벽에 '석류(石流)'라고 하는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을 흘려보내 담을 수 있는 돌로 된 저장소가 달려 있다. 내택에서 한 음식을 전달하는 통로로도 쓰이는데 이는 남녀유별의 원칙에 따라 남녀가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유교 세계관의 실현을 위해 작은 부분까지 치밀하게 설계된 곳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벽을 사이에 두고 저 작은 통로로 우물을 퍼 올리는 사내와 그 물을 받아 음식을 하는 아낙네가 정을 통한 이야기도 전해지는 걸로 보아, 사랑의 힘은 어떤 제도나 관념도 뛰어넘는 위대함이 있는 모양이다.

내택의 시작은 전상방(前上房)인데 가족연이나 결혼, 장례 등의 의식을 거행되던 곳이다. 안에는 '홍개자우(宏開慈宇)' 편액과 서태후가 쓴 목숨 수(壽)자가 걸려 있고, 건륭제가 선물한 형근(荊根) 침대와 의자, 동치제가 하사한 성지(聖旨) 원본 등이 놓여 있다. 청대에는 이곳에 공연 예술가들이 상주하며 언제든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으며, 연회가 벌어지면 보통 한 끼에 190여 종의 요리가 준비되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이 공부의 독특한 음식문화로 발전하여 지금도 공부요리(孔府菜), 공부가주(孔府家酒) 등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전상방을 지나면 전당루(前堂樓)가 나오는데 일곱 칸의 2층 건물로 공자 76대손 연성공 공령이(孔令貽)와 그의 세 부인과 두 딸이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공자 77대손 연성공 쿵더청(孔德成, 1920-2008)이 14살 때 썼다는 "성인의 마음은 구슬처럼 연못가에 있고, 범인의 마음은 표주박처럼 물가에 있다(聖人之心如珠在淵, 常人之心如瓢在水)"는 글귀가 걸려 있다.

한참을 그 의미에 찾아 생각을 해도, 알 듯 말 듯 명확하게 그 뜻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물가에 있는 것은 성인이나 범인이나 매 한가지인데, 물을 다만 퍼 나르는 표주박의 단계인 범인을 넘어서, 그 물의 정수로 스스로 진주를 만든 성인의 경지를 찬양하는 듯하다.

전당루를 지나면 후당루(後堂樓)가 이어지는데 1949년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쿵더청이 결혼식을 거행하고 부인과 함께 살던 흔적이 사진, 유물로 남아 있다.

공자의 도(道)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 표현한 말이 바로 충서(忠恕)이다.
▲ 충서당(忠恕堂) 공자의 도(道)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 표현한 말이 바로 충서(忠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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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당루의 서쪽으로 홍악헌(紅萼軒), 충서당(忠恕堂) 등이 있는데, 특히 충서당은 증자(曾子)가 공자의 도(道)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 표현한 말이 바로 충서(忠恕)라고 한 <논어> 글귀에서 따와 의미가 더한다. 마음을 집중하여 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이고, 마음을 다른 사람과 같이 하여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이 바로 '서'이니 자신과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세계를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간명하게 일러준다.

나무, 태호석, 연못, 꽃 등이 잘 조화를 이룬 후화원에서 전통 예악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 후화원(後花園) 나무, 태호석, 연못, 꽃 등이 잘 조화를 이룬 후화원에서 전통 예악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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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북쪽 끝에는 후화원(後花園)이 있다. 명대 대학사를 지낸 이동양(李東陽)이 1503년 직접 설계하였는데 그의 딸이 공자 62대손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이후 건륭제의 딸도 공자 72대손 연성공 공헌배(孔憲培)에게 시집오면서 후화원은 다시 한 번 보수, 확장이 이뤄졌다. 후화원의 명물은 '오백포괴(五柏抱槐)'라 불리는 나무인데, 다섯 그루의 측백나무가 한 그루의 홰나무를 둘러싸고 한 몸처럼 자라고 있다. 마치 공자를 그 제자들이 둘러싸고 추앙하는 것 같기도 하고, 수많은 사상이 융합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는 것 같기도 하다.

다섯 그루의 측백나무가 한 그루의 홰나무를 둘러싸고 한 몸처럼 자라고 있다.
▲ 오백포괴(五柏抱槐) 다섯 그루의 측백나무가 한 그루의 홰나무를 둘러싸고 한 몸처럼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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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는 송, 원, 명, 청의 황제들이 공자 집안에 선물한 수많은 보물들이 가득한데, 어쩌면 저 '오백포괴'가 가장 빛나는 진주인지도 모르겠다. 오후에 한가로이 울려 퍼지는 예악(禮樂)을 들으며, 수많은 사상의 줄기를 모아 그 정수를 빚어낸 성인의 진주처럼 연못가에 놓여 있으니 말이다.

유교문화의 발상지에서 공자의 먹물을 듬뿍 머리에 담아서인지 다리도, 머리도 무겁기만 하다. 공부 하나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만으로 벅찬데 이어서 바로 공묘가 펼쳐진다.


태그:#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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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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