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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9월 17일, 나는 처음으로 빛을 보았다. 같은 날 김대중 대통령은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훗날 대한민국에서 진정으로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되었다. 8년 후 생일에는 서울올림픽이 개막하였다.

그밖에 대한민국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 날이지만 내 기억 속에는 단 한 번 잊을 수 없는 생일잔치로 남아있는 날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꺼내어 보면, 그 때가 초등학교 3,4학년 정도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1980년대 후반, 친구들을 초청해 생일잔치를 여는 것은 일종의 로망이었다. 당시에는 맞벌이를 하는 집안이 상당히 많았다. 어머니가 맛있는 요리를 한가득 차려주시고 친구들을 선별해(?) 당당히 잔치에 초대하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유는 하나, '먹고 살기 바쁘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먹고 살기는 여전히 바쁘다'- 그나마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을 두었던 것이 일찍 요리에 입문했다는 자부심은 갖게 했다.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지금도 어린 시절을 자랑하며 20대 친구들에게 한다는 소리가 '너 5살 때, 라면 끓여봤어?', '너 7살 때, 밥 해봤어?', '너 9살 때, 찌개 끓여봤어?' 이다.

가을바람이 추석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할 때 즈음 내 생일은 온다. 물론 추석은 음력이라 내 생일 며칠 앞뒤로 온다. 1월 말이나, 9월 중순에 태어난 사람들은 공감할 듯 한 데, 명절과 생일이 비슷한 시기에 오면 생일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하락한다. 가끔은 명절 연휴에 생일이라도 끼면, 정말 찬밥신세가 되기도 한다. 

그 때는 추석 연휴가 생일보다 3~4일 정도 앞에 있었다. 오랜만에 등교를 하고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아침 조회시간에 태어난 날짜를 조사한다. 부득이하게 며칠 후가 내 생일이란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날아오는 질문들, "너 생일잔치 안 해?"

안 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나한테 물어오는 그 친구도 부모님이 맞벌이라 동네 즉석 떡볶이 집에서 해결했다. 그걸 아는 나는 무슨 자존심인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당연히 하지. 생일날 우리 집에 와 내가 초대할게!" 10여명의 친구들이 생일잔치에 오기로 확정 되었다.

어린시절의 내 모습.
 어린시절의 내 모습.
ⓒ 박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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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를 철없는 아들은 끊임없이 졸랐다.

"한 번만 해죠!"
"엄마, 바쁜데, 그날도 일 나가야 돼."
"이번만 해주면, 다시는 부탁 안할 게!"

그동안 자식이 원하는 걸 해주지 못한 미안함, 그것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까 어머니는 고민 끝에 알았다고 하셨다. 당시 뛸 듯이 기뻐 소리를 질렀지만, 그 때의 기뻐한 만큼 어머니께 미안하고 감사하다.

생일날이 되었다. 친구들에게 2시간 정도 후에 오라하고 서둘러 집으로 달려갔다. 한창 음식 준비 중일 어머니를 생각하며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집 안은 생각보다 너무 조용했다.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엄마! 어딨어?"

어머니를 찾으며 두리번거리는 데 거실 탁자 위에 쪽지 한 장과 1,000원짜리 지폐 두 장이 놓여있었다.

'아들 미안해. 이걸로 친구들이랑 떡볶이 사먹어.'

후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학교에 있는 사이 아버지의 사촌뻘 되시는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은 장례식장에 급히 가신 거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어린 초등학생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있으면 친구들이 몰려온다. 물론 당시 2천원이면 친구들이랑 같이 분식점에서 먹을 수 있는 돈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생일잔치로 초대를 했고 나만큼이나 친구들도 기대하고 있었다.

'2000원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어린 초등학생의 머릿속에는 당시 인기 있었던 외화시리즈 '맥가이버'의 주제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속에는 명절에 먹고 남은 음식이 있었다. 우리 집은 큰집이라 항상 명절 음식을 넉넉하게 만들었고 가짓수도 많았다.

'잡채, 전, 오징어 튀김, 고기 산적... 음...'

냉장고를 확인 한 후 슈퍼로 달려가. 라면 몇 봉지와 소고기 스프, 어묵, 카레 가루와 기본 양파, 감자, 당근, 파 등 기본 채소를 조금 샀다. 당시 집 앞 슈퍼마켓에서는 라면 한 봉지에 90원, 100원 하던 시절이다. 그렇게 2000원으로 재료를 사고 집으로 돌아와 요리를 시작했다.

채소를 잘라 기름에 볶고 카레 가루를 물에 풀어 끓이고, 한 쪽에서는 전과 오징어 튀김을 기름에 살짝 데웠다. 그리고 전과 오징어 튀김 위에 만들어진 카레를 부어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산적과 잡채를 데우며, 한 쪽에서는 김치와 라면, 어묵 그리고 햄 전을 넣어 부대찌개를 끓였다. 그리고 마지막 소고기 스프까지 끓여 놓았다. 잔칫상이 하나씩 채워져 가더니 어느 덧 꽉 찼다. 부대찌개를 두 곳에 나누어 상에 두고 그 옆으로 잡채와 카레 소스를 뿌린 전, 오징어 튀김이 위치했다. 짭조름한 고기 산적도 상 한 켠을 당당히 차지했다. 그리고 배추김치와 총각김치를 썰어서 채웠다. 마지막으로 스프와 밥을 떠서 아이들 수만큼 자리에 놓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니 네 엄마 어디 가셨어?"
"급한 일 있으셔서 음식 해 주시고 가셨어."

잔칫상을 준비했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그 후 친구들이랑 어떻게 생일날을 보냈는지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케이크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던 친구에게 '내가 케이크를 별로 안 좋아해'하고 둘러댔던 정도이다.

그때로부터 25년 정도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분식점에서 라면 한 그릇 먹어도 2000원으로 부족하다.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는데, 그렇다고 살기 더 좋아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곧 돌아오는 어머니 생신 때 '좋은 옷이라도 한 벌 사드려야겠다' 생각이 드는 10월의 어느 한가로운 오후, 단돈 2000원으로 셀프생일잔치를 벌였던 그날을 추억한다.

덧붙이는 글 | '잔치, 어디까지 해 봤나요?' 공모글입니다.



태그:#박주초, #JC, #생일잔치, #잔치,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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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Director JC 공연기획, 영상제작 전문회사 (주) 얼터 기획사업부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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