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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법"이라면서도 당 내 강경파를 제압하고 등원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기소권과 수사권은커녕 유가족 참여마저도 불투명하게 됐다. 추후에 논의하겠다는 말은 마치 그러할 의향이 없다는 얘기인 것만 같다.

이러한 와중에도 세월호 얘기만 나오면 "그놈의 세월호가 뭔데", "그만 좀 듣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4·16 세월호 침몰사고가 터지고 난 뒤 수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정확한 배의 침몰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 됐다는 사실이다. 그 수많은 지겨움이 모여 지금의 세월호 특별법 협상이 나온 것은 아닐까. 깊은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이 지겨움의 근원은 대체 어디서부터 출발했을까.

지겨움의 근원은 무엇인가

영화 <에일리언 4(Ailen : Resurrection)>를 기억하는가. 주인공 리플리가 우주선을 탈출하기 위해 일행들과 내부 통로를 따라가던 도중 이상한 낌새를 느끼며 잠시 걸음을 멈추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는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어떤 방으로 들어선다. 들어선 방 안의 풍경은 복제에 실패한 수많은 또 다른 그녀들, 즉 수많은 리플리가 즐비해있다.

수많은 그리고 실패한 자신의 복제물을 보며 그는 분노한다. 복제품 중 하나의 죽여 달라는 외침을 듣고, 리플리는 절규하며 방을 화염으로 뒤덮는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필시 그 중에는 또 다른 '나'의 고통에 쉽게 감정이입이 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고통 받는 대상이 타인이 아닌 '내'가 된다면 공감능력은 상승하게 된다.

괴기스럽게 뒤틀린 그녀의 복제물이 죽여달라 애원하자 울부짖으며 방 안을 태운다
 괴기스럽게 뒤틀린 그녀의 복제물이 죽여달라 애원하자 울부짖으며 방 안을 태운다
ⓒ 20세기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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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달라 외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어떠할까. 내가 나를 태우는 심정 또한 어떠할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녀'를 모조리 태운다. 실험체들이 들어 가 있는 모든 수중시험관이 깨지고 부수어진다. 유리 깨지는 소리는 마치 그녀의 흉부가 깨지는 소리와 같다.

세월호 사고가 터지고 벌써 다섯 달이 넘어갔다.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며 아픔을 함께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 않은데 끊임없이 이견이 발생한다. 이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하니 "세월호 얘기 좀 그만하자"고 한다. 유행가조차 길거리에서 자주 들리면 지겨워지는 법, 그 마음을 헤아릴 수는 있다. 허나 밝혀지지 못한 진실 앞에서 방관하겠다는 이야기에 안타까운 것을 어찌하랴.

사건에 대한 올바른 수습에는 관심이 없으며 고통에 공감치 못하고 방관만을 일삼는 자들이 이따금 보인다. 그들은 방관 전에 진전 없는 논쟁과 조롱을 즐기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가벼운 유흥일지 모르겠지만 유가족들의 가슴은 찢어지고 있다. 책임 없는 언어의 돌을 방향성 없이 마구 던지고 있다. 누군가는 그 돌에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리플리는 또 다른 '나'로 탄생된 수많은 복제물들을 들여다보며 절규한다. 그것은 나와 복제물이 '타자'가 아닌 '동일시'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곧 복제물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나의 고통은 복제물의 고통이다.

주인공 리플리는 복제인간이다
 주인공 리플리는 복제인간이다
ⓒ 20세기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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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존재하는 모든 이가 자신의 복제물이라면 사람들은 보다 밀접한 공감능력을 지닐 수 있을까? 모든 이가 타인을 타자로 보지 않는다면 그 때는 세상이 매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참으로 이상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군의 뿌리, 한민족, 한 핏줄을 강조한다. 민족성과 애국심을 중요시하면서 정작 현실의 사람들을 나와 별개로 여긴다.

이따금 올바름에 대해 논쟁하고 떠들썩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혀를 움직여보지만 돌덩이 같은 가슴은 뛰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이 들어갈 틈이 없다. 공감하지 못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관심 밖에서 멀어지면, 이재는 방관으로 침묵한다. 대체로 나라 안의 문제를 방관하는 자들의 면면을 지켜보면 모두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타인의 문제는 철저하게 내 영역 밖의 일일 뿐이다. 돌덩이 사이로 타인의 고통을 한 스푼 넣어보려 하지만 미처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

박영선 원내대표의 말 대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법이 타결 됐다. 마냥 새정치민주연합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태껏 방관만 해왔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지겨움 또한 인과관계에 포함될 것이다. 모두가 타자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날이 온다면,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공감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살기 좋은 세상이 올까 싶다.


태그:#세월호, #특별법, #타결, #현재상황, #에일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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