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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가슴에 품고 음악을 들었다.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노래 가사를 받아쓰고, 가슴 졸이며 녹음을 하고,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 두었다. 요즘은 클릭과 스킵을 하면서 음악을 빠르게 구하고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쉽게 소비한다. 한때는 소녀였고 지금도 소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는 [올드걸의 음악다방]에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마음 깊숙한 곳에 소장했던 노래를 꺼내 듣고, 누군가는 새로 알게 된 노래를 즐겼으면 좋겠다. - 기자말

"스타킹 사이로 털 나온 거 봐라. 숙녀가 됐으면 털 좀 밀어라, 얘."

3학년 담임이었던 스승이 졸업하고 처음 찾아 온 제자에게 던진 첫마디다. 동그란 안경너머 순진한 눈빛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독설을 뱉는 버릇은 여전했다. 스승의 날은 개뿔, 그녀와의 만남은 고등학교 졸업으로 끝내야했다. 친구들은 내 눈치를 보고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게졌고 나는 죄진 것도 아닌데 고개만 숙인 채 '비둘기색' 스타킹 사이로 분위기 파악 못하고 고개를 내민 털들만 노려봤다. 거기다 무릎까지 오는 샛노란 개더스커트를 입었으니, 오죽 눈에 잘 띄었을까. 스승의 날이고 뭐고 빨리 집에만 가고 싶었다.

혹자는 음악 얘긴 안하고 생뚱맞게 다리 털 얘길 여기서 왜 할까, 싶을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참아 주시길.

친구들은 그 말이 나를 한방에 날리는 원폭투하였다는 걸 모르는 듯 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저녁 먹고 신나게 놀자고 하는 걸 다 뿌리치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학교 앞 버스정류장으로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갔다. 그날따라 버스는 왜 그리 안 오는지. 방금 전까지 세상은 따뜻했고 즐거웠는데, 일순간에 야멸차게 등을 돌리는 듯했다. 누가 다리털을 볼까 안절부절하던 나는 눈도 껌벅이지 않고 버스 오는 방향만 노려보고 있었다. 한성운수 26번 버스 잊어지지도 않는다. 하도 욕을 해서. 눈물까지 쏟아졌다. 누가 나를 버스정류장에 가둬놓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억울해서도 화가 나서도 아니었다. 너무 두려웠다.

파란 한낮의 꼬마 아가씨
꽃그늘에 숨어서 울고 있을 때
노랑나비 하나가 맴돌아가며
댕기 끝에 자꾸만 앉으려 하네
난 아니야 꽃이 아니야
난 아니야 꽃이 아니야
난 아니야 꽃이 아니야
난 아니야 꽃이 아니야
해 저물면 찬바람에 시들어 내리는
그런 꽃은 싫어 난 아니야
울지 않을래 울지 않을래 나비처럼 날아가려네

노래는 레코드가게에서 아까부터 틀어놓았을 텐데. 이 노래만 내 귀에 들려왔다. 나만을 위해 들려주는 것처럼. 눈치 보며 졸아있던 심장에 따뜻한 혈액이 도는 느낌이었다. 레코드가게를 살짝 들여다보니 아저씨는 여전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자주 들렀던 곳인데, 좋아하는 노래를 뽑아 갖다 주면 테이프 가격만 받고 녹음을 해줬다. 당연히 우리가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 지 잘 알던 아저씨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면 그 노래들을 틀어줬다. 그것도 귀청이 떨어져나가도록 말이다.

조용필의 4집앨범 자켓 뒷장 사진
 조용필의 4집앨범 자켓 뒷장 사진
ⓒ 이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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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지 않은 우연이었지만 그 날도 아저씨가 틀어준 노래가 나를 토닥토닥 위로해 준 것이다. 나는 버스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조용필의 '난 아니야'가 들어있는 레코드를 사기위해 가게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반가운 얼굴로 숙녀가 돼서 못 알아봤다며 웃는데, 나는 속으로 '저는 다리에 털이 많아 숙녀가 아니에요'라며 서글프게 웃었다. 내가 돈을 내미니 대학입학 선물이라고 늦었지만 축하한다고 돈도 받지 않았다.

'올드걸의 음악다방'을 쓴다고 오랜만에 아저씨가 준 레코드를 들쳐본다. 빨간 점퍼를 입고 약간은 촌스러운 용필오빠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게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다. 이제 그 시절의 기억은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하다. 레코드가게 아저씨도 검정 베레모만 떠오를 뿐이다. 그래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됐던' 그 순간만은 노래와 함께 추억하고 있다.

조용필 4집앨범 자켓 앞장 시진
 조용필 4집앨범 자켓 앞장 시진
ⓒ 이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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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혹시 내 다리털의 운명이 궁금한 분을 위해 몇 마디 더 보테면 나의 털은 무탈하게 나와 살고 있다. 다만 어둠의 자식으로 살고 있다. 그 이후 내가 치마를 입지 않는다는 얘기고 혹 치마를 입을 땐 어두운 스타킹을 신는다는 얘기다.

영화배우 김부선이나 줄리아 로버츠처럼 털을 드러내도 당당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공공장소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할 용기는 아직 없다. 하지만 알고 있다, 털에겐 아무 죄가 없다는 걸. 길들여진 자기 검열의 시선을 걷어내기만 한다면 털이 없어 아름다운만큼 털이 있어서 아름답다는 걸 회복할 것이다. 사진작가 벤 호퍼의 겨드랑이 털을 드러낸 여성들의 사진에서 느껴지듯이 말이다.

하얀 손마디 꽃물 들여서
눈물처럼 아직도 지우지 못해
고개 숙여 자꾸만 얼굴 감추고
작은 어깨 흔들며 울고 있는데
난 아니야 꽃이 아니야
난 아니야 꽃이 아니야
난 아니야 꽃이 아니야
난 아니야 꽃이 아니야
해 저물면 찬바람에 시들어 내리는
그런 꽃은 싫어
난 아니야
울지 않을래 울지 않을래 나비처럼 날아가려네


태그:#올드걸의 음악다방, #조용필, #털,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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