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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이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어서 별 뾰족한 이유도 없이 이름도 몰랐던 사람을 한순간에 유명하게 만들어놓기도 하고, 또한 그토록 요란스럽게 떠들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일도 그리 드문 경우는 아니다." - 주제 사라마구의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중에서

모든 이름을 관리하지만 정작 그 이름의 주인공들은 제대로 알고 있을까. 주제 사라마구 소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는 이름뿐인, 허울뿐인 현대 도시문명의 그늘을 적시한다. 사라마구가 작가로서 원한 건 독자가 개개 인간의 삶을 한 번이라도 깊이 있게 보게끔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원제는 <All the names>이다. 한글 제목과 반대고 소설 내용과도 역설적이다. 소설은 일명 주제 사라마구의 '도시' 3부작(<눈먼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중 마지막이다.

책의 첫 장을 넘기기 전 이런 문구가 보인다.

'너에게 붙여진 이름은 알아도 네가 가진 이름은 알지 못한다.'

국가가 아무리 국민들을 향해 '민생', '서민의 삶'을 외친다 한들 진정 그들의 삶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국가뿐만 아니라 그 하부 기관 더 나아가 국민들 개개인조차도 자신 이외의 인물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함부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을까.

주제 사라마구의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 책 표지 주제 사라마구의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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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주인공 주제씨(작가의 이름을 차용)는 중앙등기소의 보조서기원이다. 등기소는 출생과 이혼, 사망 등 인간들의 단순한 날짜들이 칸 별로 정리된 자료실이 있다. 등기소 옆 기숙사에 살고 있는 주제씨는 매일 회사가 문을 닫은 저녁, 몰래 등기소에 들어가 알파벳으로 정리된 서류함에서 유명인들의 파일과 신상기록부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추기경 이외 백 명의 인물들을 두 주가 채 못 되어 수집, 정리한 그는 어느 날 또 다른 유명인에 대한 서류 다섯 장을 가져오던 중 한 장이 더 추가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서른여섯 살 된 여자의 것으로 한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이혼 기록이 등재되어 있는 서류였다. 등기소 부소장은 누군가 자료함을 몰래 여닫는 것을 알아채고 열쇠로 잠가버린다.

소설에 나온 등기소는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존재하였던 모든 이들의 이름과 기본적인 신상이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은 내재되어 있지 않았다. 우연히 한 여인의 자료를 손에 넣은 주제씨는 그 여자가 유명인들보다 더 알기 어려운 인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무게감은 신상 정보의 양에 따른 것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그녀 삶의 무게였다. 후에 그 여자의 집에서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목소리를 들을 때조차 그는 전율을 느낀다. 소설에는 주제씨가 오래전부터 매일 일기를 써 왔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는 인생을 일기장에 부각시키며 자신만의 이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붙여진 이름과 내가 가진 이름의 차이

주제씨는 여자의 서류를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단지 복사해둔다. 주제씨는 문뜩 그 평범한 여자에 대한 자료가 유명인 같지 않음을 느끼고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먼저 서류상에 기재된 주소로 찾아가 대모인 일 층 노부인에게 여자에 대해 물어본다. 또한 주말 저녁 여자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몰래 들어가 12년간 학교 생활기록부를 훔친다. 그날은 비가 내렸고 주제씨는 독감에 걸린다. 그러자 등기소 소장이 찾아왔다.

다음 날부터 소장이 보낸 간호사가 와서 매일 그를 돌보았다. 소장은 그에게 10일 간의 휴일을 허락한다. 주제씨는 소장의 서명이나 문체로 위조한 증명서를 들고 여자의 주변 인물들을 찾아다닌다.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어느 날 그는 다시 회사에 들어가고 우연히 여자와 성이 같은 사람의 서류를 서류함에 넣던 중 여자의 파일이 없음을 발견한다. 여자는 사망했던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무덤이었을지도 모르는 돌의 연도에 생사를 걸고 몰두하듯, 주제씨는 한 여인의 빈약한 한 장의 숲을 토대로 나무를 관찰하기에 이른다. 진정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할까. 사람들은 한 인간을 찾기 위해서 등기소, 전화번호부, 세무서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결론은, 결코 알 수 없다.

우리가 지닌 모든 사진과 추억이 모두 죽은 것이라면 과거에 생긴 우리의 이름 또한 거짓이다. 무덤 앞의 번호판도 시간이 지나면 무덤 속 주인의 것이 아니게 되며, 번호판을 다른 무덤과 바꾼다 한들 그 번호판 역시 시간이 지나면 죽은 번호판이 된다. 인간뿐 아니라 세상에 이름을 지닌 모든 것들에 진정한 이름은 없는 것이다. 처음 누군가를 대할 때 느끼던 감정이 마지막 순간 이름이라는 문자에 들어간 것일 뿐.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름이 아닌 그 대상의 이미지였다.

주제씨는 여자의 무덤을 찾아간다. 그리고 세무원이 알려준 여자의 비석번호를 발견해 밤새 그곳에 머문다. 다음날 일찍 주제 씨는 한 양치기가 무덤가에 와서 비석을 바꿔 놓는 것을 본다. 주제씨는 여러 생각을 품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데 그곳에 소장이 있었다. 소장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최근에 벌어진 사건의 결말에 대해 주제씨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소장은 출생과 사망이 나뉘었던 자료들을 한 데 묶기로 한다. 그리고 주제씨에게 그 여자를 살아있다고 기재하기로 하자며, 자료실 내에서 사라진 사망증명서를 찾아서 불태우라고 한다.

그녀를 찾기 위해 주변인들을 심문하던 주제씨는 그녀가 어린 시절 어떠한 삶을 살았고, 전 남편과 왜 이혼했으며, 이혼한 후 그녀의 심경은 어떠했는지 등을 듣게 된다. 등기소에 있을 때는 단지 몇 개의 글자로 된 이름과 날짜가 전부였던 그녀가, 실은 매우 깊이 있는 삶을 가졌음을 알게 된다. 그 깊이는 자신의 삶과는 다른 형태였지만 주제씨는 흥미를 느껴 더욱 그녀 삶을 이루는 이름들에 몰두하게 된다.

우리는 표면적인 인간성 속에 놓여있다

소설 속에는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이 나온다. 등기소 소장과 공동묘지의 양치기 노인이다. 만약 주제씨가 국민들의 삶을 이해하고 느끼기 시작한 국회의원이라면, 소장은 대통령이나 왕에 해당된다. 소장은 등기소의 모든 직원들의 삶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주제씨가 독감에 걸려 앓아누울 때 조차 주제씨를 감시하였다. 간호사는 주제씨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소장)가 이곳에 와서 주사를 놓으라고 했다면, 그건 표면적인 것이죠......상처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발견했는지"

이전부터 등기소에는 산자와 죽은 자의 서류가 각각 다른 공간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장이 등기소의 모든 서류들을 이름순으로 섞으라는 명령을 한다. 마침내 출생, 사망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자료가 섞이게 되었다. 세월은 표면적인 이름을 바꾸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바뀌는 것이 아니다. 표면적인 이름이 인간성을 대표하여 삶과 죽음으로 분류될 수 없기에, 소장은 하나의 서류처럼 치부하여 표면적으로 배열시킨 것이다.

공동묘지의 양치기는 이름 모를 여인의 무덤을 찾은 주제씨에게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이름과 출생, 사망일이 적힌 이 대리석판 앞을 지날 때, 어떤 생각이 든다는 것뿐이야, 눈앞에 바로 보고 있어도 거짓을 보지 못할 수가 있다는 걸"이라는 의문의 말을 던지며 번호가 새겨진 무덤들의 비석을 서로 바꾼다. 죽음이란 다 똑같은 것이기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양치기는 죽음을 나타내는 현실이 섞이고 뒤바뀌는 상황에 대해 개의치 않아했다. 오히려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을 남긴다.

소장과 양치기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대상들의 이름을 표면화해 눈에 보이는 물건처럼 다루는 독재자의 역할과, 보이는 이름이 개인의 역사를 덮어 버리므로 이름이라는 장막을 걷어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진정성을 보게 하려는 선구자적 역할이다. 소장과 양치기는 각각 산자와 죽은 자의 대변인이었다.

역동적인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이름뿐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름이 지닌 역사를 보며 진정성을 느끼기를 바랐다. 죽은 자의 이름이 후에 태어나는 자의 이름과 겹칠 수 있듯, 이름이란 사람들을 시각적으로 식별하는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 표면적 이름이 없어도 우리는 그 사람을 느끼고 구별할 수 있다.

소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는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 보길 바라고 있다.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추억의 한 부분인지 '이름'인지. 주제 사라마구는 인간들을 사랑했다. 단단하게 물질화 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말랑거리게 되돌릴 방법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닌 역사를 기억해주는 것이라고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 (지은이)/ 송필환 (옮긴이) / 해냄 / 2008년 2월)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해냄(2008)


태그:#주제 사라마구,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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