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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지 마라 대한민국


그날 밤 7시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민족시인 김남주 20주기 추모문화제 포엠콘서트'는 노래와 시낭송과 대담 등으로, 보고 들을 거리가 많았다.

 

전국에서 김남주를 기리고자 몰려온 시인들이 준비해온 자작시 낭독과 김남주의 오랜 친구 이강, 박석무 선생의 고인에 대한 추모 대담, 그리고 초청가수 안치환의 노래로 포엠콘서트 막이 내렸다. 해남에서만 할 수 있는 행사로 여겨졌다.

 

이강, 박석무 선생의 김남주 추모 대담에서 김남주의 호 '물봉'에 얽힌 이야기로 물봉이란 '손해를 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남주는 거기에 합당한 인물로 끝내 묵묵히 자기희생으로, 바보처럼 우직하게 이 세상을 살다간 그의 인품을 흠모했다.

 

이 포엠콘서트는 해남군민뿐 아니라, 전국에서 온 관람객 모두를 감동시켰다. 이날 낭독된 시 가운데 해남 출신 김경윤 시인의 '미안하다 아이들아! 용서하지 마라 대한민국'의 일부만 옮겨본다.

 

…………

아, 아직도 바닷속을 떠도는 영가들아

이제 더는 용서하지 마라

침묵과 복종만을 가르친 어른들을 용서하지 마라

늘 제도와 현실을 탓하며 나태하게 살아온

비겁한 우리를 용서하지 마라

제 목숨만을 위해 너희를 버린 선원들을

돈을 위해서 너희들을 죽음의 바다로 내몬 자본가들을

우왕좌왕 눈치만 보며 골든타임을 놓친 관료들을

용서하지 마라

재벌을 위해서 규제 완화만 외쳐 왔던 대통령들을

진실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인들을

용서하지 마라, 자신의 배를 침몰시킨 이 대한민국을

…………

 

이제 갓 열일곱

들에 핀 나리꽃 같은 아이들아

하늘나라에선 지지 않는 꽃으로 피어라

야자도 보충도 없고, 학원도 입시도 없는 나라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도 없고

엎드려 잔다고 야단치는 선생님도 없는 나라

그 아름다운 하늘나라에서

부디 꽃으로 다시 피어나라

미안하다, 아이들아!

 

그날 밤 해남유스호텔에 마련된 뒤풀이 모임은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100여 작가회의 회원들의 친교시간으로 이 지방의 일품 전어와 홍어회, 그리고 막걸리, 소주를 마시며 자기소개와 김남주 시인에 대한 추억으로 밤 깊은 줄 몰랐다.

 

김남주 생가

 

이튿날(9월21일)도 날씨는 '어매 환장하도록' 좋았다. 오전 9시 30분, 1박한 유스호텔을 떠나 전남 해남군 상산면 봉학리 535번지 김남주 시인 생가로 향했다. 화창한 가을 날씨에 언저리 남도의 들판에는 벼 알들이 여물고, 토담집 감나무에는 감들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금판사가 되면 돈을 갈퀴질한다고 아들에게 금판사가 되라던 아버지도, 성치 않는 눈으로 당신네 머슴과 결혼했던 어머니도 떠나버린 텅 빈 생가는 옛날의 초가지붕 대신 강철지붕을 인 채 정갈하게 복원돼 있었다. 이 시대 초가지붕을 이기도, 관리도 어려운 줄 알지만 문화의 원형을 잃은 것 같아 그 점이 무척 아쉬웠다. 

 

오랜만에 고향집에 돌아온 김남주 아우 덕중씨는 생가에 얽힌 이야기와 형에 대한 가슴 아픈 얘기를 했다. 1974년 남주 형이 <창작과 비평> 여름 호에 '진혼가' '잿더미' 등의 시로 등단한 뒤 창비사에서 보내준 우편환 원고료를 자기가 우체국에서 찾아 형이 시킨 대로 됫병 소주를 사다가 아버지에게 드렸다는 얘기와 전남대에서 제적 후 광주에서 백수생활 때는 먹을 양식이 없어 자기가 군에 입대하며 주머닛돈을 털어준 얘기들을 옛날 얘기처럼 들려주었다.

 

그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아들의 생가를 둘러보고자 전국에서 몰려온 인파를 보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아마도 어깨춤을 추시며 다음의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매 내 아들 남주가 금판사보다 훨씬 출세했당께. 남주야, 너 정말 허벌나게 출세했다. 그럼, 하루 아침에 나가 떨어지는, 백성들의 원망 대상이 되는 잡것 금판사에 견주당께. 아, 어림도 없어. 장차관은 물론 나랏님과도 안 바꿔."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학교에 늦을까봐 아침밥 뜨는 둥 마는 둥 책보 메고 집을 나서면

내 뒤통수에 대고 냅다 고함을 쳤다

 

"너 핵교 파하면 핑 와서 소 띧겨야 한다

길가에서 놀았다만 봐라 다리몽댕이를 분질러 놓을 팅께"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방학 때라 내가 툇마루에서 낮잠 한숨 붙이고 있으면

작대기로 마룻장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아야 해 다 넘어가겄다 빨랑 일어나 나무하러 가거라"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저녁 먹고 등잔불 밑에서 숙제 좀 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숨 자고 일어나 다그쳤다

 

"아직 안 자냐 섹유 닳아진다 어서 불끄고 자거라"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소가 병이 나면 어성교로 약을 사러 간다

읍내로 수의사를 부르러 간다 허둥지둥 몸 둘 바를 몰랐으되

횟배를 앓으며 내가 죽을상을 쓰면 건성으로 한 마디 뱉을 뿐이었다

 

"거시기 뭐드라 거 뒤안에 가서 감나무 뿌리나 한두 개 캐다가 델여 멕여"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공책이란 공책은 다 찢어 담배말이종이로 태워버렸다

내가 학교에서 상장을 타오면

"아따 그놈의 종이때기 하나 빳빳해 좋다" 면서

씨앗봉지를 만들어 횃대에다 매달아놓았다

 

그는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

그는 밭 한 뙈기 없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

그는 죽었다 화병으로

내가 자본과 권력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대고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그는 손을 더듬거리고 나를 찾았다 한다

 

- 김남주의 '아버지'에서

 

해남 미황사

 

마지막 여정으로 거기서 가까운 해남 미황사로 갔다. 그곳은 이전 김남주 추모제를 찾은 이들에게 잠잘 곳과 공양을 제공한 곳으로, 이 날도 점심공양을 정성껏 마련해 주었다.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미황사는 아주 깨끔하고 아담했다. 나는 대웅전 부처님 앞에서 평소보다 일 배를 더 올렸다.

 

주지 금강 스님 상호에는 온화함이 가득했다. 스님은 떠나는 객들을 굳이 붙잡고는 손수 차를 끓여 일일이 차 공양을 들게 했다. 절이나 교회, 성당은 백성들의 최후로 숨고 의지할 안식처다. 마치 물고기들에게 수초와 같은 곳일 것이다. 스님은 임란 이후 오늘까지 국난 때마다 미황사가 백성들의 안식처였음을 말씀하셨다.

 

나는 친히 산문 앞까지 배웅하는 스님에게 법명을 묻고 합장배례한 뒤 서울 행 버스에 올랐다. 서울로 오는 도중 옆자리 청주에 사시는 김창규 시인이 죽암휴게소에서 내리기에 그분을 따라 하차했다. 그 덕분에 애초 2박 3일 예정보다 하루 빨리 원주 내 집에 이르렀다.

 

참 좋은 남도문화기행이었다.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 김남주의 '사랑 1'

 

*가실; 가을걷이

 

    

덧붙이는 글 | 민족시인 김남주 20주기 추모문화제
때; 2014년 9월 20일(토) ~ 10월 4일(토)
곳; 전남 해남문화예술회관


태그:#김남주, #김남주 20주기 추모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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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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