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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에 큰 마을이 난다. 낙동강에 하회마을이, 그보다 작은 남사천에 남사마을이 났다. 지리산 줄기, 응석봉에서 발원한 남사천은 30여리 달려 남사마을을 휘돌아 간다.

같은 산청이라도 단계마을은 합천 황매산, 남사마을은 지리산의 정기를 받고 있다. 큰 물에 나서 하회가 남사보다 크지만 예부터 '경상좌도 안동에 하회, 경상우도 산청에 남사'라 했다. 40여 가구 사는 남사마을, 크기는 작아도 옴팡져 하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남사에서 제일 마음이 가는 장면이다. 크지도 않은 감나무를 살리려 담을 비켜 쌓았다. 남사사람들의 심성이 엿보인다
▲ 심성 고운 담 남사에서 제일 마음이 가는 장면이다. 크지도 않은 감나무를 살리려 담을 비켜 쌓았다. 남사사람들의 심성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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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전, 성주 이씨, 밀양 박씨, 진양 하씨가 들어와 터 잡았고 세종대에는 영의정, 하연(河演, 1376-1453)을 배출했다.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중심으로 최씨고가, 하씨고가, 정씨고가가 모여 있고 좀 떨어진 곳에 이씨고가가 있다. 고가들이 마을의 중심을 이루고 곳곳에 민가들이 흩어져 한 마을을 이루었다. 이씨고가가 제일 오래된 집으로 200~300년, 나머지는 대체로 100년 안팎 되었다. 

정몽주 후손 정제용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사로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엄청나게 크게 지었다. 마을의 중심에 서있다
▲ 사양정사 정몽주 후손 정제용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사로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엄청나게 크게 지었다. 마을의 중심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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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붙은 별명도 가지가지. 지금은 어울릴지 모르지만 지리산 어딘가에 '하늘아래 첫 동네'가 있고 양양 미천골에 '하늘아래 끝 동네'가 있는데 남사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을 1호'란다. 묵은 세월이 켜켜이 쌓인 남사, 수려한 자연풍광 같은 아름다움은 아닐 테고 특별한 뭔가가 있을 터, 어디 한 번 들여다 볼일이다.

해묵은 나무는 마을과 함께 켜켜이 세월을 쌓아가고...

오래된 마을은 해묵은 나무가 있기 마련, 조상신 같은 나무를 빼놓고 남사를 애기할 수 없다. 윤기 나는 마당과 정갈한 뒤뜰에 뿌리 깊은 나무 한두 그루쯤 있어야 고가의 면이 선다. 산청 삼매(三梅) 중의 하나인 670년 묵은 하씨고가 매화나무(원정매)가 이 마을의 제일가는 자랑거리고, 하연이 7세에 심었다 하는 뒤뜰의 630년짜리 감나무가 그 다음이다. 이쯤 되면 집안의 조상신으로 모셔야 될 판이다. 

630년 묵은 이 감나무를 빼고 남사를 말할 수 없다. 남사와 오랜 세월 같이 하여 레코드판마냥 나이테에 남사의 일들 모두를 기록하고 있다
▲ 하씨고가 감나무 630년 묵은 이 감나무를 빼고 남사를 말할 수 없다. 남사와 오랜 세월 같이 하여 레코드판마냥 나이테에 남사의 일들 모두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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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뒤질세라 마을 서쪽 사효재(思孝齋)의 530살 먹은 향나무는 용이 승천하듯 꿈틀대고, 그 옆 이씨고가의 450년 묵은 회화나무는 인조가 내린 나무라 하여 귀히 대접받는다. 문밖 300년짜리 두 그루 회화나무는 민망하게 몸을 섞고 있는데 모양이 묘하여 인기로는 최고다.

최씨고가 230년 된 매화나무와 정씨고가 220살 단풍나무가 그 뒤를 잇는다. 100살 된 이씨·정씨 매화나무와 120년 된 사양정사 배롱나무는 100년이 넘었는데도 돌을 막지난 애송이 취급받아 이 마을에서는 나무 축에도 못 낀다.  

나무 애기를 하자면 밤새워 얘기해도 모자랄 판이다. 온 동네가 매화향으로 뒤덮이는 춘삼월이면 나무 하나만으로도 남사가 우리나라 제일의 마을로 불리는데 누구 하나 토달 사람이 없다. 그러나 꽃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 꽃이 지면 어딘지 휑하여 허전하다. 이런 허전함을 채워주는 것이 오래된 담이다.  

남사마을은 흙돌담과 돌담이 공존하는데 민가는 주로 돌담을 낮게, 고가는 흙돌담을 높게 쌓았다. 돌은 남사천에서 가져온 강돌. 흙돌담은 다른 마을처럼 무릎 높이 정도는 큰 막돌로 건성건성 쌓았고 그 위에는 흙을 다진 뒤 돌을 박아 쌓았다.

남사마을은 돌담과 흙돌담이 공존한다. 돌담은 주로 민가에 낮게, 흙돌담은 고가에 높게 쌓았다
▲ 남사마을 돌담과 흙돌담 남사마을은 돌담과 흙돌담이 공존한다. 돌담은 주로 민가에 낮게, 흙돌담은 고가에 높게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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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의 담, 저 끝엔 뭐가 있을까

남사의 담은 가지가지. 모두 담 끝에 고가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담은 단조롭지 않다. 최씨고가의 긴장되는 담과 이씨고가의 운치 있는 담, 사양정사의 속을 알 수 없는 담 그리고 감나무 살리려 비켜쌓은 심성 고운 담이 있다.

최씨고가로 들어가는 담은 'ㄱ'자로 꺾여 그 다음 무엇이 나올까 자못 궁금해 긴장되는 담이다. 잡귀를 물리친다는 모퉁이 회화나무는 오는 이를 반기는데 주인의 마음씨와 멋이 담겨 있다. 꺾어 들어가면 최씨고가. 제일 큰 집이라 그런지 마음도 후하다. 전주최씨 고가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주인의 마음을 담은 문구를 대문에 달아 놓았다.

‘ㄱ’자로 꺾여 약간의 긴장감이 돈다. 귀신을 쫓는다는 모퉁이 회화나무는 오는 이를 반갑게 맞아준다
▲ 긴장감 도는 최씨고가의 담 ‘ㄱ’자로 꺾여 약간의 긴장감이 돈다. 귀신을 쫓는다는 모퉁이 회화나무는 오는 이를 반갑게 맞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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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사대부 한옥처럼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는데 사랑채 문 위의 조그만 창이 이채롭다. 환기창인가? 봄이라면 사랑채 마루에 앉아 마당 주인 노릇하는 230살 '최씨매화꽃' 이라도 감상하겠건만 지금은 잎마저 장담 못할 계절인지라, 남사는 역시 춘남사(春南沙)라 여기며 봄에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해 본다.

이씨고가로 들어가는 죽 뻗은 길, 담이 없었다면 얼마나 밋밋했을까? 그래서 그런지 담을 쌓았다. 주인의 눈에는 아직도 밋밋해 보이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담 한가운데에 회화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나이는 300살. 사실은 불기운을 다스리려는 비방(秘方)이라 하는데 미군 폭격으로 이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을 때 이씨고가만 화를 면했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얘기가 전한다.

죽 뻗은 담 길에 묘하게 몸을 섞은 두 그루 회화나무는 운치를 더한다
▲ 운치 있는 이씨고가 담 죽 뻗은 담 길에 묘하게 몸을 섞은 두 그루 회화나무는 운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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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그루 회화나무는 묘하게 서로 몸을 섞었다. 이런 이유로 이 나무 밑을 지나면 금실이 좋아진다 하여 '부부나무'로 알려져 있다. 다 만들어 낸 얘기다. 인기로는 남사에서 1위, 설악산국립공원 곰동상 사진처럼 남사에 오는 사람 모두 여기서 찍은 사진 한 장쯤 갖고 있다.

사양정사로 들어가는 담 길은 속이 깊다. 막다른 곳, 깊숙이 사양정사가 자리 잡았다. 정사 옆집은 정씨, 앞집은 하씨, 뒤는 최씨고가다. 담 길이 길고 깊은 이유가 있었다. 정씨집안의 후손을 교육하고 문객을 맞는 정사로 남사에서 제일 큰 건물이다. 

사양정사로 가는 담 길은 깊어 그 속을 통 알 수가 없다
▲ 속 깊은 담 사양정사로 가는 담 길은 깊어 그 속을 통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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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또한 엄청나게 커서 함양 안의마을 허삼둘의 솟을대문마냥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80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신흥부호들 사이에 유행한 건축양식을 따른 거로 보면 된다. 하기야 허세도 유행이 될 수 있다만은 사양정사 뒤편 초라하고 낮은 굴뚝을 보면 단순히 허세만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사양정사는 큰 건물이지만 뒤뜰에 세워진 두 기의 굴뚝은 키가 작다. 연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려는 주인의 배려다
▲ 사양정사 낮은 굴뚝 사양정사는 큰 건물이지만 뒤뜰에 세워진 두 기의 굴뚝은 키가 작다. 연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려는 주인의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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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난 발을 식힐 겸 마루에 오르면 뒤뜰 담 너머 최씨고가 담장 기와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까무잡잡한 툇마루 기둥 사이로 붉은 배롱나무가, 앞쪽으로 하씨집안의 감나무가 보인다. 마루에 걸터앉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한참 쉬었다 가도 되는 남사의 쉼터다. 정씨집안의 문객을 맞는 곳이 이제는 여행객을 맞고 있었다.  

툇마루에 올라보면 최씨고가로 들어가는 담과 지붕, 주변 오래된 나무들이 어우러진 남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 사양정사에서 본 남사 툇마루에 올라보면 최씨고가로 들어가는 담과 지붕, 주변 오래된 나무들이 어우러진 남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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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비켜쌓은 담, 마을사람들의 심성을 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겠지만 제일 마음이 가는 담이 있다. 감나무를 베지 않고 비켜 쌓은  심성 고운 담이다. 주인의 심성이 고와 담까지 고와 보인다. 둥글게 비켜쌓아 멀리서 보면 감나무 밑동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담에 숨었다. 아니 주인이 숨겨준 것이다.

풀 한포기 돌 하나라도 함부로 해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질기고 긴 심성이었다. 이런 우리의 고운 심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보듬고 나가지는 못할망정 상처에 소금 뿌리는 사람들이 있다. 무서운 세상이다. 남사의 아름다움이 농축되어 나타난 이 담은 우리는 그런 민족이 아니었다고, 상처받은 사람 모두를 보듬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감나무를 비켜 쌓은 심성 고운 담이다. 죽 뻗은 담 중간에 둥글게 변화를 주어 고운 심성과 멋까지 더하였다
▲ 심성 고운 담 감나무를 비켜 쌓은 심성 고운 담이다. 죽 뻗은 담 중간에 둥글게 변화를 주어 고운 심성과 멋까지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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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마을을 돌며 어느 한군데 아름답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 우리의 오래된 마을은 어디를 꼭 집어 아름답다고 얘기할 거리가 없다. 집과 담, 골목 그리고 뿌리 깊은 나무, 집주인의 배려, 더 나아가 마을사람들의 성정이 한데 어우러질 때 마을은 아름다운 것이다. 남사마을이 그렇다. 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태그:#남사마을, #사양정사, #감나무, #회화나무, #옛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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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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