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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중략)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변절자! 1942년 <만선일보>에 대동아전쟁의 당위성과 일본제국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글로 친일한 나라에 대한 변절자, 결혼한 채로 다른 여자를 사랑한 변절자, 청마 유치환 이야기다. 앞에 인용한 시는 그의 <행복>이란 시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애끓는 사랑이 구구절절이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제킨다.

불륜의 열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

<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 표지
 <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 표지
ⓒ 책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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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시가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병처>인 그의 아내 권재순에게 바쳐진 시가 아니다.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지낼 수밖에 없는 먼 먼 그 별"<별>인 어려서 청상과부가 된 시조시인 이영도를 흠모하는 마음을 담은 시다.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바닷가 통영의 우체국에서 연애편지를 붙이는 한 사내, 방에 홀로 누워 아파하는 아내를 두고 나온 한 사내,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는 말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고. 그리곤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고 크게 외친다. 이게 정상인가. 음~ 정상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는. 유치환이 살고 있던 그 시대에도.

만약, 만약에 말이다. 처자식을 둔 유치환이 미망인 이영도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애끓는 시, <행복>의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는 구절이 나왔을까. 유치환은 이영도에게 5천통의 연서(戀書)를 보냈다고 한다. 이영도는 끝내 그의 구애의 손을 잡았고 그들의 불순한 사랑은 20년을 이어졌다. 유치환의 시는 그렇게 영글어 우리들의 식탁 위에 진수성찬을 들이민 것이다.

아내와 자식을 둔 유치환에게 이영도와의 사랑은 "한량없이 지복한 복음"이었고, "숱한 통곡과 몸부림을 겪고 치른 후"에 얻은 사랑의 쟁취였다. 그의 불륜은 얼마든지 "보이지 않는 인정의 꽃밭 속에서" 이뤄낸 업적이다. 유치환은 자작시 해설집인 <구름에 그린다>(도서출판 경남 펴냄)에서 자신의 시 <행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한량없이 지복한 복음에 이르기까지에는 얼마나 숱한 통곡과 몸부림을 겪고 치른 후이었겠습니까? (중략) 그러므로 세상에는 많은 미움처럼 보이는 그 안쪽에는 더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랑이 서로 연분 얽히고 거래되어 보이지 않는 인정의 꽃밭 속에서 삶들을 이룩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구름에 그린다> 119~120쪽)

불륜이라고? 위대한 업적이 말한다

설미현 작가는 그의 책 <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책미래 펴냄)에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 이유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통해 성장한 사람들이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의 성장은 후대에 놀라운 영향력을 미쳤다.

책은 불륜을 미화하려는 의도로 쓰인 건 아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에게 불륜이 발견되고 그 불륜이 그들의 업적을 더 빛나게 했지 않나 하는 점에 천착하고 있다. "그의 사랑이 '지적 교류'라 불리든, '불륜'이라 비난받든, 그의 감정을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저자의 의도는 도덕이나 윤리를 말하는 게 아니란 뜻이리라.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에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 불륜 이야기를 한다. 한나 아렌트와 하이데거, 브람스와 슈만 부부, 쇼팽과 조르주 상드, 이영도와 유치환 이야기를 한다. 둘째 장에서, 사회적 통념을 깬 사랑 이야기를 한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 에드워드 8세와 심슨 부인, 헤밍웨이와 여러 아내들의 사랑 이야기를 한다.

세 번째 장에서, 지적 공통점 때문에 어떤 차별도 이겨낸 꿋꿋한 사랑 이야기를 한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헬렌과 스콧 니어링, 도미와 그의 처, 박에스더와 박유산의 사랑이야기를 한다. 마지막으로, 모성과 자아의 이해를 통해 성장한 보편적 사랑 이야기를 한다. 로렌스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 생택쥐페리와 콩쉬엘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사랑 이야기를 한다.

저자는 '불륜과 위대한 업적'이란 도식으로 글을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대학교 2학년 때 한나 아렌트가 스승인 하이데거를 만나게 된다. 물론 하이데거는 유부남이다. 그들의 만남은 발전과 타격을 한꺼번에 체험했을 거고 사회적 관념과는 다른 선택이기에 분명히 갈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깊이 있는 지성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슈만은 어린 브람스의 재능을 보고 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스승이다. 로베르트 슈만은 그의 음악을 제대로 연주한 클라라를 만나 결혼한다. 슈만 부부에게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들기 쉬운 나이 스무 살의 청년 브람스가 뛰어든다. 마흔세 살의 클라라와 스무 살의 브람스의 만남으로 부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작품2번>과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9번>이 작곡되고, 모두 그녀에게 바쳐졌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죽자 이렇게 말했다.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본문 38쪽)

위대한 업적이 불순한 사랑을 미화하는가?

서른두 살의 조르디 상드와 스물여섯 쇼팽의 만남 또한 위대한 쇼팽을 만들었다. 상드 또한 70여편의 소설과 20편의 극작을 통해 스탈 부인과 쌍벽을 이루는 대문학가가 된다. 유치환을 시의 천재로 눈뜨게 한 이영도 역시, 유치환의 뮤즈로서만이 아니라 시조시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한다.

원효대사와 설씨녀, 즉 요석공주와의 밀회는 어떤가. 설총이란 위대한 언어학자, 그리고 설중업이라는 신라의 3대 문장가를 낳았다. 유태인 혈통의 모딜리아니와 가톨릭 부르주아 출신 에뷔테른의 아슬아슬한 사랑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가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위태로운 사랑으로는 에드워드 8세와 심슨 부인의 사랑이 압권이리라. 사랑을 위해 에드워드 8세는 왕위를 포기했다.

퀴리 부부의 인종을 초월한 사랑은 좀 특별나게도 과학에 한 획을 긋는 업적을 만들어냈다. 헤밍웨이는 개성 넘치는 네 부인을 거느린 여복의 천재다. 역시 위대한 소설들로 보답했다. 박유산의 자기희생의 사랑 때문에 신여성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가 있었다. 그가 구원한 생명이 그 얼마인가.

사랑, 그것이 윤리적이든, 비윤리적이든 사랑은 위대하다. 사랑을 아주 색다른 각도에서 풀어헤친 <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의 내용은 신선하고 참 착하다. 임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설미현 작가의 해박한 지식 또한 책 곳곳에 스며있다. 그의 질문과 한 마디 경구를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브람스를 가리켜 남의 부인을 사랑했다고 비난하는 자가 없는 것은, 그의 사랑이 숭고하기 때문인가. 그의 작품이 위대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이 만든 제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인가."(본문 39~40쪽)

"사랑은 어느 날 사고처럼 일어난다."(본문 30쪽)

덧붙이는 글 | <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설미현 지음 / 책미래 펴냄 / 2014. 8. / 1만4000원 / 254쪽)



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 - 다양한 사랑의 모습, 그 안에서 성장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설미현 지음, 책미래(2014)


태그:#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 #설미현, #서평, #새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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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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