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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기가 법의 문을 지키고 서 있다. 그리고 그 문지기에게 한 시골 사람이 다가와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겠느냐고 애원한다. 문지기는 비켜서지 않는다. 그는 시골사람에게 나를 이기고 들어간다고 해도 뒤에는 더 힘이 센 문지기가 있을 뿐이라고 알린다.

법이란 누구나, 또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골 사람은 법의 문 앞에서 절망한다. 문지기에게 간절히 빌어도 보고, 회유도 해봤지만 소용없다. 긴 세월을 법 안에 들어가고자 골몰했지만, 야속하게도 법은 죽음을 앞둔 시골 사람을 외면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에 나오는 '시골 사람'은 과연 소설 속에만 존재할까. 헌법은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11조 1항)고 선언했지만, 슬프게도 카프카의 소설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지난 6월, 6년 넘게 벌여온 해고무효소송에서 최종 패소한 기타 생산 업체 콜텍의 해고노동자들도 소설 속 시골 사람의 모습과 똑 닮았다.

"법이 평등하다고요? 우리에겐 그렇지 않았습니다"

18일 첫 선을 보이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와 카페 '그' 임차상인들의 다큐멘터리 연극 <법 앞에서>. 극 속에서 문지기 역을 맡은 콜텍 해고노동자 김경봉씨와 시골사람 역을 맡은 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씨가 대본 연습을 하는 장면.
▲ 연극 <법 앞에서> 18일 첫 선을 보이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와 카페 '그' 임차상인들의 다큐멘터리 연극 <법 앞에서>. 극 속에서 문지기 역을 맡은 콜텍 해고노동자 김경봉씨와 시골사람 역을 맡은 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씨가 대본 연습을 하는 장면.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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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들어가게 해줘유."
"지금은 안 돼요."
"왜 안 된다는 거요?"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말이 많아."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한 소극장 안. 문지기 역을 맡은 콜텍 해고노동자 김경봉(56)씨의 목소리가 대학로 소극장 안에 메아리쳤다. 시골 사람 역을 맡은 임재춘(52·콜텍 해고노동자)씨는 문지기를 회유하는 대목에서 능청스럽게 연기를 했다. 법의 문을 가로막는 문지기 옆에서 좌절하는 장면에서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2008년 기타 생산 업체 콜트악기의 자회사인 콜텍 해고노동자들은 매년 수십억의 흑자를 내는 회사가 실적 악화를 이유로 공장을 폐쇄하고 직원 40여 명을 해고한 것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다. 그리고 2014년 6월 대법원은 '공장 폐쇄는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는 고등법원의 판단을 그대로 수용하며, 2600여 일을 기다린 해고자들을 끝내 외면했다.

대법원이 회사의 손을 들어줬지만, 이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법정 싸움이 끝났을 뿐이다. 대신 해고노동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었다. 제목은 짐작대로 '법 앞에서'다.

이들은 과연 법이 모든 국민 앞에 평등한지 따져보고 싶었다. 제작은 지난해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참여한 연극 <구일만 햄릿>을 만든 극단 진동젤리가 맡았다. 주연은 콜트 부평공장에서 농성 중인 김경봉, 임재춘, 이인근(49·콜텍지회 지회장)씨다.

12일 오후 혜화동 한 소극장에서 연극 <법 앞에서> 대본을 보고 있는 콜텍 지회 이인근 지회장. 이 지회장은 지난 7년 동안 복직 농성을 벌이면서 "법이 우리를 지켜주는 가장 공정하고 평등한 것이란 생각이 틀렸다는 걸 느꼈다"고 전했다.
▲ 콜텍 지회 이인근 지회장 12일 오후 혜화동 한 소극장에서 연극 <법 앞에서> 대본을 보고 있는 콜텍 지회 이인근 지회장. 이 지회장은 지난 7년 동안 복직 농성을 벌이면서 "법이 우리를 지켜주는 가장 공정하고 평등한 것이란 생각이 틀렸다는 걸 느꼈다"고 전했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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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8일 첫 공연을 앞두고 소극장에 모인 이들은 15평 남짓한 작은 무대 위에서 대사를 외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A4용지 30여 장을 묶은 두툼한 대본과 허공을 번갈아 보며 끊임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연극은 2007년 직장폐쇄와 함께 해고된 과정, 이듬해 시작된 법정 싸움 등 지난 7년의 기억을 관객에게 구술하는 형식이다.

연출을 맡은 권은영(32)씨는 오래전부터 카프카의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느끼던 중, 해고노동자들이 대법원으로부터 패소 판결을 받는 과정을 봤다. 그리고 이들을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했다. 은영씨는 "법이 누굴 보호하고, 무엇을 지키는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극은 해고노동자의 이야기와 법원의 판결을 대조해서 보여준다. 해고노동자 셋이 번갈아가며 지난 기억을 이야기하는 동안, 무대 한편에 설치된 스크린에는 법원 판결문이 자막으로 띄워질 예정이다. 둘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법이 소외시키는 게 무엇인지 드러나게 하는 것이 연출자의 의도다.

지회장 인근씨는 이날 대본 연습을 마치고, 지난 7년 동안 그에게 법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는 "예전에는 법이 우리를 지켜주는 가장 공정하고 평등한 잣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키려고 노력했다"면서 "그런데 막상 법을 접하니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미래를 비관하지는 않는다. 원작 소설에서 시골 사람은 결국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지만, 인근씨는 법정 판결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법은 그 사건을 종결시켜주는 역할 정도만 할 뿐이고, 어차피 노사 관계는 노사 간의 합의가 있어야만 끝이 난다"며 "법원 판결과 상관없이 우리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는 카페 '그' 임차상인 최지원(36)씨와 이선민(38)씨도 배우로 나선다. 카페 문을 연 지 8개월 만에 건물주는 재건축을 이유로 가게를 비워달라고 통보했다. 5년을 내다보고 실내장식과 시설에 투자한 이들로서는 억울했다. 결국 임대인이 재건축을 이유로 임대차계약 갱신을 거절할 수 있도록 한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고, 지난 3일 헌법재판소는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공연은 오는 18일(목)부터 21일(일)까지 4일 동안 열린다. 현재 공연제작비 조달을 위해 선 예매(http://bit.ly/beforethelaw)를 진행 중이다. 정규직은 2만 원, 비정규직 또는 예술가와 활동가는 1만 원이다. 장소는 혜화동 1번지 소극장.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과 카페 '그' 임차상인들의 다큐멘터리 연극 <법 앞에서>의 첫 공연이 오는 18일에 열린다. 12일 오후 혜화동 한 소극장에 모여 대본을 맞춰보고 있는 콜텍 지회 해고노동자들.
▲ 연극 <법 앞에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과 카페 '그' 임차상인들의 다큐멘터리 연극 <법 앞에서>의 첫 공연이 오는 18일에 열린다. 12일 오후 혜화동 한 소극장에 모여 대본을 맞춰보고 있는 콜텍 지회 해고노동자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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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법 앞에서, #콜트콜텍, #카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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