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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시립 오스나부뤽 카펠 마이스터 송안훈
 독일 시립 오스나부뤽 카펠 마이스터 송안훈
ⓒ 송안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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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지휘자가 되고 싶습니다."

고3 송안훈이 말했다. 1996년 12월 마지막 주말 저녁, MBC 예능프로그램 <1318 힘을 내>에 출연했을 때였다. 각 학교를 돌며 청소년들의 고민과 에피소드를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수능 시험 직전, 방송국에서 "군산여고 어떤 학생이 안훈 학생을 짝사랑한대"하며 찾아왔다. 여학생의 용기 있는 '선빵' 고백에 안훈은 피아노 연주로 화답했다. 그 모습은 전국 방송을 탔다.

얼마 후, 출판사 시공사의 이학종 이사가 안훈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너를 만나고 싶구나."

그 덕분에 안훈은 지휘자가 되겠다는 꿈을 계속 끌어안고 갈 수 있었다. 이학종 이사는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 티켓을 보내줬다. 안훈은 전남대 음대에 다니면서, 종종 서울에 올라가 공연을 봤다.

"그때 음악회 보러 서울을 안 다녔으면, 저는 평범하게 음악 하는 사람으로 살았겠죠. 피아노 학원 하면서요. 제가 지방 도시에만 머물지 않도록 계속 도전의식을 키워주신 게 시공사 이학종 대표님이에요. '잠자리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자라'고 하셨어요. 세종문화회관 처음 갔을 때는 솔직히 눈물이 났어요. 새로운 세상이었죠."

안훈은 음악 신동이 아니다. 군산의 열대자마을에서 봄이면 보리 이삭을 구워 먹고, 여름이면 들판을 쏘다니며 놀던 남자아이였다.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안훈이가 교회에서 반주라도 하면 좋겠다"라는 소박한 바람을 갖고 있었다. 둘째 아들 안훈을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 피아노 교습소에 보낸 이유다.

그는 중1 때 양쪽 손목뼈가 다 나가는 큰 사고를 당했다. 친구들과 까불고 장난치다가 피아노 학원 2층에서 떨어진 것. 두 달 간 깁스를 하고 풀어보니 손목뼈가 잘못 맞춰져 있었다. 손목에서 손이 곧게 펴지지 않았다. 결국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됐지만 아쉽진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안훈, 복막염을 앓은 뒤에 갑자기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했다.
▲ 송안훈 고등학교 2학년 안훈, 복막염을 앓은 뒤에 갑자기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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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몸이 아파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별 거 아니라고 했다. 터지기 직전에야 복막염인 것을 알았다. 한 달 동안 입안에 호스를 끼고 지냈다. 그 때 오만 가지 생각을 했다. '지휘자를 하면 어떨까, 피아노도 치고 싶다'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제가 자란 열대자는 버스가 1시간에 한 대 다니는 촌이잖아요. 몰랐으니까 용감했어요. 퇴원하고 피아노 학원을 다녔어요. 체르니 30번 정도 치면, 어느 대학 음대라도 들어갈 줄 알았어요. 콩쿠르 우승한 친구보다 가까이 있는 애를 목표 삼아서 '일주일 뒤면 쟤처럼 하자'고 생각했어요. 학원에 있는 애들을 다 따라잡기도 전에 선생님이 '너는 입시하기 힘들겠다'고 했어요. 학교 음악 선생님도 그러시고."

그는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었다. 학교 음악실을 쓸 수 있게 허락 받았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 짬을 내 10분이라도 꾸준히 쳤다. 음대 다니는 대학원생에게 주 1회씩 개인레슨도 받았다. 음악 전공을 반대하던 부모님도 안훈의 설득에 레슨비를 대줬다. 고3 때는 밤 11시에 집에 와서 새벽 3시까지 피아노를 쳤다.

무작정 시작한 독일 유학

전남대학교 음대에 간당간당 합격한 안훈. 베토벤과 쇼팽이 전부였던 군산 열대자 촌놈은 처음으로 작곡가 스칼라티를 알았다. 새로운 작곡가들을 알아갈 때마다 행복했다. '만약에 서울로 대학을 갔다면,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라는 생각을 했다.

2001년 2월.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대학 졸업하자마자 백수 신세가 됐다. 복막염 수술 흉터로 군대도 못 갔다. 군산에 돌아와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음악 가르치는 봉사를 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생각이 미칠 때즈음 발밑에는 개불알꽃이 피어 있었다. 몸에 감기는 바람이 부드러워졌다. 햇볕도 따스해졌다. 봄이 와 버렸다.

"그날은 날짜까지 기억해요. 4월 13일이었어요. PC방에서 '유학'을 쳐 봤어요. 인터넷이 막 발전하던 때라서 수많은 정보들이 있었죠. 독일은 학비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독일 유학'을 쳤어요. 데트몰트 한인교회 사이트가 나오는 거예요. 이메일을 보냈어요. 독일로 유학가고 싶은데 좀 도와달라고요."

다음 날 한인교회 목사님은 '빨리 서류를 보내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안훈은 곧장 전남대로 가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팩스로 보냈다. 4월 15일, 그가 보낸 서류는 데트몰트 음대에 접수됐다. 마침 원서 접수 마감 날이기도 했다. 한 달 뒤 안훈의 집에는 초대장이 날아왔다. 독일의 음대에서 보내온 우편물, 독일어라서 읽을 수도 없었다.

그의 의지는 3개월만에 독일어를 독파하게 만들었다.
 그의 의지는 3개월만에 독일어를 독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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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훈은 그 초대장을 다시 목사님한테 이메일로 보냈다. '독일로 나오기만 하면 되겠네요'라는 답장. 그때서야 두려움이 일었다. 농사짓는 부모님은 "우리가 어떻게 유학자금을 대냐? 그 돈으로 차라리 피아노 학원을 차리는 게 낫지 않겠냐?"라고 했다. 안훈은 "돈을 버리더라도 가서 해보고 싶어요"라고 맞섰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 부모님은 말했다.

"6개월의 시간을 줄게. 안훈아, 합격 못하면 다시 돌아와라이."

그는 태어나 처음 비행기를 탔다. 프랑크푸르트에 내려 파다본까지 가는 국내선으로 갈아탔다. 한밤중 군산공항보다 더 작은 파다본공항에 내렸다. 마중 나오겠다던 목사님은 없었다. 전화를 거는 방법도 몰랐다. '사기 당한 건가? 일단 자고 보자' 가져간 침낭을 펴는데 한국 사람이 "송안훈?"하고 말을 걸어왔다.

"그때 6개월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내고 갔거든요. 150만 원 들고 갔어요. 한국 돈으로요. 그쪽에서 통장 개설할 생각으로 많이 안 가져갔어요. 돈도 없는데 비행기 표는 편도로 끊었어요. 돌아올 비행기 표를 끊어 놓으면, 깡이 안 생기잖아요. 스물네 살 때는 그런 마음으로 뭐든지 해 볼 나이였어요."

안훈은 바로 데트몰트에 입학하지 않고, 어학원이 있는 빌레펠트로 갔다. 독일 말을 할 줄 알아야 학교에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어학 공부만 했다. 낮에는 독일 사람 페터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2시간씩 가르쳐줬다. 페터는 1970년대에 한국 여행을 와본 독일인이었다. 당시 한국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는 길을 가다 안훈을 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

"너 어디서 왔어?"
"한국."
"독일어 배울래?"

'뻥'이 아니다. 안훈은 3개월 만에 독일 말이 들렸다. 말문도 트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지휘과는 소수의 학생만 뽑는다. 합격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안훈은 뒤셀도르프 국립음대 피아노과 시험을 봤다. 합격했지만 당장은 자리가 없었다. 비자 만료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다시 카셀 시립음대 시험을 봤다. 다행히 그곳에선 자리를 얻었다.

4년 만에 박사까지... 독일 방송 다큐멘터리에도 출연

그 무렵, 군산에서 농사짓던 부모님도 투잡에 나섰다.

"안훈이 뒷바라지를 할라믄 장사를 합시다. 한 5년 정도는 도와줘야제."

부모님은 열대자 안에 냉면집을 열었다. 어머니는 음식 솜씨에 자신 있었다. 가게는 입소문을 탔다. 예상보다 빨리 자리 잡았다.

안훈은 걱정을 덜고 공부했다. 카셀 시립음대 피아노과에서 바라던 지휘과로 바꿀 수도 있었다. 한 학기 뒤부터는 뒤셀도르프 국립 음대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두 군데의 학교를 다닌 것. 이동 수단은 기차, 교통비가 비싸 값이 싼 기차를 골라서 탔다. 3~4시간씩 걸렸다. 그는 2년 반 만에 학교 두 군데를 마쳤다.

그는 자신을 더 다그쳤다. 곧바로 세계적인 음악학교 라이프찌히 국립음대 지휘학과에 합격, 4년 만에 학사와 석사, 그리고 연주학 박사를 마쳤다. 그 위 과정인 마이스터 클라스 (Meisterklasse konzertexsamen)를 수학하면 2년 동안 매달 생활비로 1천 유로(우리 돈 150만 원)가 나온다. 안훈은 동양인 최초로 그 과정을 밟았다. 졸업 후 동양인 최초로 그 학교의 지휘 강사가 됐다. 독일 방송의 다큐멘터리에도 나왔다. 

스물네 살 안훈,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돈 150만원과 깡으로 독일에 갔다.
 스물네 살 안훈,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돈 150만원과 깡으로 독일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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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라이프찌히 국립음대에 계속 강사로 남고 싶었어요. 학생 가르치는 게 너무 재밌었으니까요. 근데 비자가 걸렸어요. 제가 강의하는 시간이 10시간 45분인데 비자청에서는 강의 시간이 11시간 이상이어야 비자를 내준다는 거예요. 극장으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지금은 오스나부뤽 극장에서 카펠 마이스터(상임 지휘자)를 하고 있어요. 140회의 오케스트라 지휘를 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저마다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 자부심을 모으는 게 지휘다. 더구나 독일은 지금까지 클래식 음악을 이끌어온 국가. 거꾸로, 독일인이 국립 국악원에 상임 지휘자로 일 한다고 하자. 뭔가 어색하다. 카펠 마이스터 송안훈은 그런 생각을 변화 시키는 게 힘들었다. 1년은 고생했다. 

현재 독일 시립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정식 활동하고 있는 한국 사람은 두 명. 그 중 한 명이 송안훈이다. 그는 무작정 독일로 건너가 카펠 마이스터가 됐다. 14년 타국에서 살다 보니 올 때마다 확확 달라진 한국보다 독일이 익숙하다. 복지가 잘 돼 있어 보험을 따로 들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언젠가는 돌아오고 싶다. 고향 군산으로.

"길 가다 갑자기 '커피 마시고 싶어'하는 것처럼 일상 안에 클래식이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군산 예술의 전당을 지나다가 '오늘 공연 뭐 하지?' 했으면 좋겠고요. 800억을 들여 만든 극장인데, 잘 활용하고 싶어요. 영화관이나 카페에 자리가 있듯이, 예술의 전당에도 항상 공연이나 연주가 있어야 해요. 한국은 고등학생도 연주 때 떠들어요. 독일은 다섯 살 애들도 조용하죠. 교육 차이예요. 우리나라도 할 수 있는데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거예요. 그런 시스템을 배워서 한국에 풀어놓는 것, 그게 제 꿈이에요."

올여름, 그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군산 청소년 오케스트라 공연을 봤다. 첼로 협연하는 학생이 눈에 띄었다. 따로 만나자고 했다. 그가 당장 큰 도움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물 밖 세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줄 수 있다. 그가 그러했듯이, 우물 뚜껑을 들어 올리는 데 그다지 엄청난 괴력이 필요치 않다는 것도.

그를 만나기 전까지 기자가 알고 있던 지휘자는 단 한 명이었다.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 나온 '치아키 센빠이(선배)'. 지휘자 송안훈에게는 치아키 센빠이 같은 천재성은 없다. 마성의 미모도 없다. 열대자 촌에서 뛰어놀다가 늦게 피아노를 시작해 지방 국립 대학을 졸업한 청년. 그가 지휘자라는 막연한 꿈을 붙잡고서 20여 년간 내달린 여정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움직인다. 내가 수없이 돌려보기 한 드라마 속 치아키 센빠이를 넘어선다. 카펠 마이스터 송안훈, 그의 인생은 아름다웠다.

송안훈과 독일 음악 친구들
▲ 독일 음악가들 송안훈과 독일 음악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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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매거진군산 9월호에 실렸습니다. 다음 블로그에도 보낼 예정입니다.



태그:#송안훈, #독일 유학, #카펠 마이스터, #세계적인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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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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