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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물. 지구가 다른 별과 구분되는 점은 바로 전체 표면적의 70%가 물이라는 것이다. 지구 밖 천체의 다른 생명체들은 틀림없이 지구를 신비의 대상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 시선의 기저에는 당연히 '물'에 대한 경외감이 서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무>를 보고 나면 바다는 결코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다.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무덤에 가깝다. 거기에 바로 우리의 삶이 있다.

<해무>
 <해무>
ⓒ (주)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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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을 필두로 올 극장가를 강타한 바다 3부작 가운데 마지막인 해무에 대한 평가가 뜨겁다. 연일 흥행 잭팟을 터트리며 폭주하는 <명량>의 기세에 눌리기는 했지만 이 영화가 지닌 가치를 결코 흥행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한국영화의 '걸작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해무>는 문제작이면서 그 이상의 수작이다.

<해무>는 2001년 9월에 발생한 7호 태창호에서 실제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영화는 스케일이 큰 연극 무대 같다. 낡은 배 안을 배경으로 격한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배치해 쉬지 않고 관객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명량>에서 카타르시스를, <해적>에서 낭만을 체험하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힐링을 기대했다면 큰 오산이다. 수능 시험을 치르는 듯한 자세로 무장하지 않으면 관객은 남녀를 불문하고 어느새 혹평의 대열에 한 발자국 다가가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세월호 여파 때문인지 우리 사회는 아픈 것을 굳이 외면하고픈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가 아직 흥행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소재와 주제의 무거움 때문이라는 걸 애써 부인하기 어렵다. 실례로 홍매로 등장하는 조선족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남자들의 전유물로 진작 끝나 버렸을 것이다. 여자가 대통령인 시대에 이런 불친절함이 또 어디 있을까? 그 점은 앞이 캄캄할 정도로 유감이다.

<살인의 추억>을 쓴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심성보 감독은 봉준호 사단의 장학생이다. 이 영화의 기획이 봉준호라는 것을 알면 그닥 새로울 것이 없다. 시나리오도 심성보와 봉준호의 공동작품이다. 기획과 제작, 그리고 시나리오까지 서로의 호흡이 빚어내는 유대관계가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인지 영화 전편에 봉준호식의 블랙 유머와 무뚝뚝한 부조리가 글자 그대로 '해무'처럼 깔려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보여준 봉준호만의 색깔이 진해진 느낌이다. 관심 있다면 한 번 찾아보기 바란다. 충분히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다.

틈틈이 기관장을 노리는 창욱 역을 맡아 연기변신을 꾀한 이희준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색정광의 언행은 얼핏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죽어가는 유대인에 대한 관심 대신 수수께끼를 푸는데 골몰하는 나치 간부와 아주 그럴듯하게 닮아있다. 여자를 거느리지 못한 그의 발광은 극의 말미에 이르러 관객한테 기이한 웃음을 선사하는데 결국 폭력과 짝을 이루는 섹스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한다. 현실도피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경구와 창욱은 그 점에서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 오직 돈과 섹스만이 전부이기에 아무런 고민이 없다. 삶의 현장에 있다고 해서 다 참여가 아니라는 얘기다. 현장에 밀착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도피가 아니고 무엇인가?

박유천이 분장한 동식과 홍매의 러브씬에 대해서 말이 많지만 그것은 바로 이 영화가 가진 가장 소중한 가치다. 정화! 생명의 근원인 바다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살상극과 그 살상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돈과 섹스에 눈이 먼 자들에 의해서 크게 상처받은 바다의 구조신호를 수신하기라도 한 듯 한몸이 되어 서로를 얼싸 안는데 그것은 욕정이 아니라 홍일점을 통해, 더럽혀진 바다를 정화하는 메타포로 기능하는, 새로운 생명을 꽃피울 수 있도록 한 '물'의 깊은 배려다.

그래서 동식과 홍매는 '지옥'에서 탈출해 최후의 생존자가 될 수 있었다. 그 또한 물의 깊은 배려이리라. 홍매를 보호하려는 동식의 맹목은 그래서 단순히 살을 섞은 남녀의 감정의 연장선상이 아니다. 실제로 영화 말미에 이르러 사족이 되어버린 음식점 안에서 건설현장의 노동자로 변신한 동식이 눈을 마주친 어린 여자아이의 존재는 그들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음을 반증한다.

전진호의 선장 역을 맡아 열연한 김윤식은 국보급 배우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한 마디로 명불허전. 그를 보면 코엔 형제의 영화에 단골로 등장했던 존 터투로가 떠오른다. <바톤핑크>로 전 세계 영화인들을 열광시켰던 아웃사이더의 향기를 김윤식에게서 맡는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의 연기가 대단한 것은 노련함이 연륜을 뛰어넘어서다. 넉넉한 아버지에서 광기의 소유자로 돌변해 가는 선장역을 누가 그 이상 감당할 수 있을까? 폐선을 거부하고 바다로 나간 그에게 배는 요람이자 무덤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바꿀 수 없는 족보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미워할 수만 없는 애증의 역할을 제대로 묘사한 김윤식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래서 선장이란, 결국 이 땅의 모든 아버지의 분신일 수도 있음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한 배를 탔다는 말은 고해에서 한 가정이 난파하지 않도록 키를 잡아야 하는 동시대의 모든 가장과 오버랩된다. 해무는 사실 바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는 불안요소는 정작 뭍에서,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가? 겨우 눈을 뜬 것도 아닌데도 우리는 표류하고 있지 않은가? <해무>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영화에서의 시공간의 설정이 IMF 이후라는 것이 말없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오랜만에 관객을 찾아온 노병, 문성근을 보는 재미도 나쁘지 않다. 트라우마를 통제하지 못하고 실성한 존재로 죽은 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설정은 바다의 안개와 함께 아주 몽환적인 설정으로 조화를 이루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법을 피해 낡은 배의 한쪽 구석에 숨어 살 수밖에 없는 그에게 자유를 선사한 것이 정작 죽음이라는 것은 차라리 그에게 씌워진 혐의를 벗어던질 수 있는 용기였다. 단지 가장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한 자가 실성한 자라는 아이러니가 버거울 뿐이다.

기관실에 숨긴 홍매를 들킨 동식의 저돌성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갑판장은 사실 선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어창에 홍매를 숨겨주는데 여기서 우리는 엇갈리는 진실과 정의의 안타까움을 목격한다.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고 선과 악의 경계가 뚜렷해지며 일상과 광기가 서서히 분리되는 시점에서 무너져 가는 배 안의 모든 군상들, 과연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지옥으로 변해가는 전진호에서 선원들은 마침내 아수라가 되어버린다. 밀항한 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과응보식의 귀결을 떠나 모든 생명을 잉태한 바다만이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잡은 물고기를 보관하는 어창은 죽음과 생명의 공간으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얼마 안 되는 좁은 공간, 좌표에 의지해 떠다닐 수밖에 없는 배를 다시 축소시켜 놓은 이중의 삶과 죽음의 공간이 소멸되는 것은 전진호가 침몰할 때 물에 잠기면서다. 모든 불확실성을 해제해버리는 무심한 대자연의 순리가 마지막으로 선장을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사실상 영화는 막을 내리는데 그것은 지옥 묵시록의 종결을 의미한다.

6년 후의 설정은 이 영화의 옥에 티가 아닐까 싶다. 한국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뱀 발이기에 감흥을 떨어뜨리는 작용을 하지만 메시지에 집착하는 감독의 권한을 용인하는 것도 이젠 관객의 몫이 아닌가 싶다.

어창에서 밀항자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가 프레온가스 때문이라는 것과 그 전에 기관실에서 홍매가 살짝 무엇을 건드려 기관부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과의 연관성에 어떤 혐의를 두는 것은 도입부에 그물을 바다에 던질 때 동식의 발이 걸려 기계로 빨려가는 것을 선장이 도끼로 유압선을 끊어 작동을 멈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이 책임소재에 대한 뉘앙스를 음미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추리는 관객 각자의 몫이다.

어제 내린 비로 이제 여름과 결별이다. 더 추워지기 전에 냉방이 약해진 극장에서 바다 3부작의 마지막을 진지하게 감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감히 말하건대 이 영화,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다. 


태그:#해무, #박유천, #김윤식, #바다, #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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