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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적 246호인 김유신 집터의 우물(재매정). 돌이 놓인 자리 가운데에 우물이 남아 있고, 사진에 보이는 유허비(각)는 1872년(고종 9)에 세워졌다.
 국가사적 246호인 김유신 집터의 우물(재매정). 돌이 놓인 자리 가운데에 우물이 남아 있고, 사진에 보이는 유허비(각)는 1872년(고종 9)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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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2세기, 백제 3세기, 신라 4세기 순이었다. 당대의 선진국이었던 중국과 거리가 가까워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유리했던 고구려가 가장 빨랐고, 이어서 백제, 산맥으로 가로막힌 외진 곳의 신라가 마지막이었다.

전성기는 백제, 고구려, 신라 순

그러나 전성기는 백제 4세기(근초고왕), 고구려 5세기(장수왕), 신라 6세기(진흥왕)로 그 순서가 바뀐다. 이는 세 나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시기와 일치한다. 고구려가 중국과 맞서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식량이 많이 나는 한강 일대를 차지한 채 강력한 해상 왕국을 건설한 백제는 371년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만큼 성장한다. 그 후 장수왕이 475년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개로왕을 죽여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자,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위기를 느낀 백제와 신라 두 나라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어 대항한다.

국보 33호인 창녕 척경비. 본래 창녕 화왕산(사진의 비각 뒤로 보이는 산)에 있었는데 1914년 발견되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비석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국보 33호인 창녕 척경비. 본래 창녕 화왕산(사진의 비각 뒤로 보이는 산)에 있었는데 1914년 발견되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비석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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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554년(진흥왕 15), 신라는 백제가 잠시 점령했던 한강 유역을 기습, 성왕을 전사시키면서 그 땅을 차지한다. 진흥왕은 555년 북한산, 561년 경남 창녕, 568년 함경도 황초령과 마운령에 국경을 넓힌 사실을 기념하는 척경비(순수비)를 세우는 등 한껏 기세를 드높인다. (창녕은 경남이지만 대구 달성군에 붙어 있어 대구시민들과 창녕군민들이 동일 생활권으로 여기므로 대구경북역사여행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전국 곳곳에 순수비 건립 등 진흥왕 "기세"

고령 우륵 기념탑도 진흥왕 시대의 신라 강성 유적이라 할 만하다. 소수림왕(371∼384) 또는 그 이전에 <유기>를 펴낸 고구려와, 근초고왕(346∼375) 때 <서기>를 펴낸 백제보다는 늦지만 진흥왕은 545년 국가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 <국사>를 펴낸다. 왕은 551년 대가야의 우륵이 망명해오자 그를 통해 음악을 발전시켰다. 우륵이 음악을 연구했던 고령읍 쾌빈리에는 우륵박물관, 우륵기념탑 등이 세워져 있다.

추사 김정희가 진흥왕릉으로 추정했던 무덤(사적 177호). 무열왕릉에서 선도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에 있다. 진흥왕릉 앞의 무덤은 진지왕릉.
 추사 김정희가 진흥왕릉으로 추정했던 무덤(사적 177호). 무열왕릉에서 선도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에 있다. 진흥왕릉 앞의 무덤은 진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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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7호인 천전리 각석. 진흥왕이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와서 놀다가 간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글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보물 147호인 천전리 각석. 진흥왕이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와서 놀다가 간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글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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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땅이었던 만주에는 천하를 호령한 광개토대왕의 능과 비가 남아 있다. 광개토대왕릉 가까이에는 장수왕의 묘로 추정되는 장군총도 있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가 무열왕릉 뒤편 서악 등산로 입구의 무덤을 '신라의 광개토대왕' 진흥왕릉(사적 177호)으로 비정했지만, 아직 그 진위가 불분명한 상태이다. 다만 진흥왕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남기지 못한 유적을 남겼으니, 바로 어릴 때 뛰어놓았던 물가 놀이터이다.

추사는 이 무덤을 진흥왕릉이라 했는데...

울주군 두동면 산201번지에는 진흥왕이 여섯 살 때 찾아와 놀았다는 내용이 새겨진 커다란 서석(書石)이 있다. 벽면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이 비바람으로부터 자연스레 보호받을 수 있게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이 거대 바위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예술 작품도 남아 있다. 주변에는 공룡발자국들도 여기저기 뚜렷하다. 천전리 서석(보물 147호)에서 대곡천을 따라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을 잠깐 걸으면 유명한 반구대가 나온다. (천전리 서석은 경주와 붙어 있어 대구경북역사여행에 넣을 수 있지만 반구대까지 그렇게 하기는 곤란하다.)

사적 20호인 무열왕릉
 사적 20호인 무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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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당은 연합군을 조직,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마침내 고구려도 멸망시킨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이용했고, 국토가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되었다는 한계를 보여주지만, 끝내 당을 몰아내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다. 또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운동 세력과 힘을 합쳐 당과 싸우는 동안 민족의식이 강해지고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감은사 쌍탑, 통일 이후 1가람2탑의 최초 작품

신문왕이 부왕을 기려 완성한 감은사 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국보 112호) 은 통일신라 일가람쌍탑(법당 1, 탑 2)의 최초 작품이다. 이때 감은(感恩)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감은사 터 삼층석탑 외에 무열왕릉(사적 20호), 문무왕 화장터 능지탑, 대왕암, 재매정(사적 246호), 김유신 묘(사적 21호), 그리고 문경시청에서 볼 수 있는 당교 사적비 등도 통일 유적이라 할 만하다.

국보 112호인 감은사터 쌍탑. 신라는 통일 이후 감은사를 시작으로 1가람쌍탑의 사찰을 지었다.
 국보 112호인 감은사터 쌍탑. 신라는 통일 이후 감은사를 시작으로 1가람쌍탑의 사찰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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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유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한 곳 더 있다. 무장사 터와 그곳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보물 126호)이다. 문무왕은 당을 몰아낸 뒤 "어진 사람이 오래 사는 세상이 왔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라"면서 투구를 무장사 터에 묻는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는 선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아득한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인가? 남북은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를 이루고 있고,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 공세'도 여전히 난무하고 있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라고 했던 문무왕도 오늘의 이 지경을 아는지, 무장사 터에는 언제나 적막한 바람만이 어두운 산골짜기를 무겁게 흘러간다.

문무왕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의 모습. 선덕여왕릉과 중생사(고려 '시무28조'의 최승로 유적) 사이에 있다.
 문무왕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의 모습. 선덕여왕릉과 중생사(고려 '시무28조'의 최승로 유적)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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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라도 왜구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문무왕은 사후 화장되어 동해에 뼛가루로 뿌려졌다. 사진은 문무왕의 산골처로 여겨지는 대왕암. 감은사터에서 동해로 나아가면 바로 나타난다.
 "죽어서라도 왜구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문무왕은 사후 화장되어 동해에 뼛가루로 뿌려졌다. 사진은 문무왕의 산골처로 여겨지는 대왕암. 감은사터에서 동해로 나아가면 바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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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진흥왕, #김유신, #문무왕, #신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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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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