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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4일로 세월호 참사 100일이 넘었다. 하지만 아직도 시원하게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국회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한 도보행진도, 집회도 했지만 여태 여야가 갑론을박 중인 모양이다. 나는 한 전직교사로서 세월호 참사의 계기가 된 수학여행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와 바람직한 수학여행 문화에 대한 제언 등을 서너 차례 연재하고자 한다. -기자의 말

남설악 오색계곡, 심한 가뭄인데도 골이 깊어 맑은 물이 흐른다.
 남설악 오색계곡, 심한 가뭄인데도 골이 깊어 맑은 물이 흐른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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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설악 오색에 가다

지난주초 오색에 사는 정덕수 시인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당신이 사는 마을 앞 계곡(국립공원지역 밖)에서 메기와 잡어를 잡아놓았으니 피서 겸 어탕을 들고 가라는 권유에 혹하여 집을 나섰다.

아내는 "오뉴월 손님은 범보다 더 무섭다"는데 이 삼복에 남의 집에 간다고 한 소리했다. 하지만 숙소는 정 시인 집이 아니고, 또 초대한 손님도 귀한 분들이라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강릉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강릉에 도착한 뒤 그 자리(강릉시외버스터머널)에서 양양행 버스를 타고, 양양에서 다시 오색마을 버스를 갈아탔다. 기사에게 약속 장소인 오색초등학교를 몇 차례 물어 그곳에 이르자 정 시인이 교문에서 활짝 웃으며 반겼다. 곧 서울에서 오는 손님도 한계령을 넘어 도착했다. 잠시 나무 그늘에서 정 시인으로부터 오색초등학교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그 학교는 당신의 모교인데, 지금은 당신 딸아들이 재학 중인 바, 전교생이 8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교직원이 6명으로 초미니 시골학교였다. 학교 건물도 아주 튼튼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한 학년이 고작 한두 명으로 그야말로 전인교육을 할 가장 좋은 교육환경이었다.

동행한  김태동(성균관대 명예교수) 박사는 경제학자답게 이는 대단한 국가 예산낭비로 도시의 아이들이 해외로 나갈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산촌이나 어촌학교로 유학할 때라는 견해를 폈다. 그러자 동석한 정운현씨는 실제로 시골의 어느 학교는 도시에서 유학 온 학생들로 즐거운 비명을 울린다는 반가운 얘기도 했다.

개점휴업 상태인 농촌체험교육장

우리 일행은 곧장 전날 정 시인이  메기 등 잡어를 잡아 냉동시켜둔 냄비를 들고 가까운 오색허브농원으로 갔다. 그곳은 오색천 둔치에 자리 잡은 매우 큰 규모의 농촌체험교육장인데,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개점휴업 상태로 우리가 머무는 동안 오색허브농원장으로부터 한숨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당신 가족들은 수십 년 전부터 이곳에다 먼 앞날을 내다보며 여러 가지 나무와 온갖 꽃들을 심어 가꿨다. 농촌진흥청지정 청소년 체험장으로 가꿔 이즈음 한창 바빠야 할 시기에 그동안 석 달 동안이나 공치고 있으니 서로 처지를 바꿔도 한숨이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즈음 그곳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전국의 각지 수학여행지나 청소년수련장은 세월호 참사 이후 거의 개점휴업 상태로 파리만 날린다는 보도다.  

아무튼 세월호 참사는 일파만파로 우리 사회 곳곳에 경종을 울리며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태를 유야무야 대충 넘어간다면 또 다른 세월호 사태를 가져올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이즈음 여당의 정책위원장 주아무개 의원은 세월호 참사는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라고 인식하는 모양인데, 아마도 그들은 보상금 몇 푼을 생색내듯 주고 어물쩍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넘어갈 공산이 커 보인다.

그들은 영악하게도 역사의식이 없는 대중에게는 '망각'이라는 기막힌 게 있다는 것을 대학에서 잘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도특설대원도 세월만 지나면 '구국영웅' 대접을 받는 오늘이 아닌가.

수학여행지 속리산 법주사 경내에서 오산중 3-11반 일동 맨 오른쪽이 필자(1974. 5.)
 수학여행지 속리산 법주사 경내에서 오산중 3-11반 일동 맨 오른쪽이 필자(1974.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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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아져야 할 학교

나는 이번 세월호 참사를 기하여 우리 교육의 기본 틀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가 학교는 작아져야 한다. 나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 오산중학교에서 근무했는데, 그 무렵 한 학급 정원은 70명에 한 학년은 12학급이었다. 그 학교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시절 대부분 도시의 학교는 비슷했고, 심지어 한 학년 20개 학급인 학교도 더러 있었다.

그런 대형 학교에서는 봄가을 소풍은 학생에게나 학교에서도 아주 고역이다. 소풍지는 대체로 교외인데 집결지 약속시간에 도착한 학생은 절반도 안 된다. 학생을 나무랄 수 없는 건 시내버스 배차가 드물기 때문이다. 사실 학생도 인솔교사도 그 버스를 타고 가면 짐짝으로 그때부터 소풍 기분은 싹 달아난다.

소풍지에서 지정시간보다 한 시간쯤 더 기다린 후 소집하여 인원 점검을 해 보면 몇 녀석이 없기 마련이다(이튿날 확인해 보면 아주 딴 곳에 가서 헤매다 온 녀석도 있다). 그때는 손전화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찜찜한 상태로 학생들을 인솔한 뒤 소풍지에 이르러 한 바퀴 돌고는 학생들에게 점심시간을 준다.

오후 두세 시, 심한 경우(주로 궂은 날)는 오후 1시 30분에 학생들을 집합시켜 인원 점검을 한 뒤 그때부터 한 반씩 버스에 태워 귀가시킨다. 그래서 학생이나 교사는 소풍은 즐거운 게 아니라 고생하여 소풍지에 가서 밥만 먹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서울 시내 창경원이나 경복궁으로 소풍을 가는 학교도 많았다.

나는 1974년 오산중 3-11반 담임을 하며 그해 봄에 속리산으로 2박3일 수학여행을 갔는데 3학년 학생이 840여 명 되다보니 전세버스만 21대였다. 그 버스가 학교를 떠나 속리산을 가는데 중간 중간에서 끊어진 다음 버스를 기다리느라 시간 낭비가 많다. 심한 경우는 도중에 버스 고장으로 거기 탄 학생들은 10여 등분으로 분산하여 다른 버스에 타는 일도 일어나기 마련인데 그때 그 학생들의 속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모산 건널목 참사사건

그래도 무사히 학교에 돌아오면 다행이다. 그 무렵인 1970년 10월 서울 경서중학교 학생을 태운 수학여행 버스가 충남 아산 장항선 모산역 근처의 건널목을 건널 때 운전기사가 앞차와 거리 유지에 신경을 쓰느라 옆에 소홀 특급열차와 충돌하여 45명이 사망하고 29명이 중상을 입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무렵은 학교나 교사나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그저 무사히 다녀온 것을 가장 다행으로 여겼다.

수학여행지 숙박업소는 그 많은 학생을 수용하다보니 자그마한 방에 10명씩, 심한 경우는 두 곳 여관을 썼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을 모아 멋진 추억이 될 만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도 없었다. 기껏 수행여행 중 넓은 곳에 모아놓고 반별 대표 장기자랑 정도가 고작이었다.  

요즘은 학급당 학생 수도 이전보다 적고, 학급도 줄어들고 있지만, 아무튼 발상의 대전환으로 이전과 같은 무지막지한 수학여행은 지향케 해야 한다. 이제는 학교도 수학여행도 작은 것이 아름다운 시대가 돼야 한다(다음 기사로 이어짐).


태그:#세월호,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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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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