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책표지.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책표지.
ⓒ 청어람미디어

관련사진보기

'상상임신(pseudocyesis)'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아기를 갖고 싶은 욕구를 가진 여성이 상상만으로 임신하는 것을 말한다.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뇌 과학자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은 상상임신을 '병'으로 규정한다. 라마찬드란은 수백만 유로의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는 첨단 실험 대신 가령 거울 두 개와 나무 상자 하나만으로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내는 과학자다.

상상임신을 한 여성은 실제로 임신한 여성과 똑같다. 입덧하고 배와 가슴이 부푼다. 산달에는 산통까지 느낀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상상임신이 임신한 아내의 남편에게서까지 나온다는 사실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만들어지는 '프롤락틴'이라는 호르몬 작용 때문이다. 프롤락틴은 환자 본인이 임신했다는 생각을 강하게 품기만 해도 분비된다고 한다.

라마찬드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준 치료법은 더욱 놀랍다. 환지통(幻肢痛)은 팔다리를 절단한 환자가 이미 없는 수족에 아픔과 저림을 느끼는 현상이다. 그런데 라마찬드란은 있지도 않은 수족, 곧 유령 팔다리(phantom limb)를 절단하는 수술법을 개발(?)했다.

이민 절단된 팔다리 절단하는 수술법

우리 팀은 그런 환자들을 나무로 만든 상자 안에 앉혔어요. 그 상자에는 거울이 달려 있었고요. 환자의 왼팔이 절단되었다면, 거울에 비친 환자의 모습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는 오른팔이 왼팔로 보이죠. 그러면 환자의 뇌는 절단된 왼팔이 다시 돌아왔고 모든 것이 정상화되었다고 믿어요. 통증의 원인이 사라지는 거죠. (263쪽)

라마찬드란은 이러한 거울 환상만으로 환지통을 영구히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환상 그 자체인 환지통을 또 다른 환상(거울)을 이용해서 없앤 것이다. 질병도 놀랍고 수술법 또한 기발하다.

'세계 최고의 과학자 13인이 들려주는 나의 삶과 존재 그리고 우주'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세계적인 석학 13인과 유럽 최고의 과학 저널리스트가 나눈 매혹적인 과학 인터뷰 모음집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13인의 주인공들을 2년 동안 만나가며 인터뷰했다고 한다.

저자가 만난 인터뷰 대상자들은 모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과학자들이다. 화학자 겸 시인(로알드 호프만)이 등장하고 근대 자연과학의 시작을 알린 천재 예술가(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우리를 맞이한다. 정의와 도덕에 매달린 경제학자(에른스트 페르), 타인에 대한 공감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비토리오 갈레세)도 눈길을 끈다.

인터뷰 주인공들 각각의 관심사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들이 나눈 대화는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로 수렴된다. 우리 인간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거울로 된 방'에서 인간 뇌의 작용을 연구하다가 의식과 환상이 가져오는 놀라운 작용을 발견한 라마찬드란 박사 이야기는 그 흥미로운 사례들 중 하나다. 몇 가지 더 살펴보자.

우리에게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신경생물학자 한나 모니어는 냄새를 꼽는다. 후각이 뇌 속의 감정 시스템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와, 뇌에서 감정을 일으키는 구실을 하는 편도체가 직통 신경 경로로 이어져 있어 과거의 기억을 금방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모성애는 흔히 본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과연 그럴까. 랑구르원숭이들의 영아 살해를 연구한 인류학자 세라 허디는 모성애의 본능성을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그(랑구르) 원숭이는 여러 암컷이 단 한 마리의 수컷을 중심으로 집단을 이뤄 생활합니다. 다른 수컷은 집단 바깥에 머물면서 그 수컷을 밀어내고 암컷을 차지할 기회를 노려요. 그러다가 권력 교체가 이루어지면, 새로 권력을 잡은 수컷은 과거 권력자의 새끼들을 물어 죽입니다. 암컷들을 다시 임신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서 자신이 곧바로 번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 (암컷 랑구르원숭이는) 그냥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 랑구르원숭이 어미들은 집단을 장악한 새로운 지배자의 폭력 앞에 굴복할 뿐이죠. 반면에 인간 어머니는 양육할 능력이 없다고 느끼면 자신의 아기를 버릴 수 있어요. 또 자기 자식에게 폭력을 가할 수도 있고요. 대형 원숭이 종을 다 뒤져도 그런 암컷은 없을 거예요. (232, 241쪽)

세라 허디는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무조건적인 유대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신화라고 단언한다. 원숭이들에게는 그런 본능이 있지만, 인간의 행동은 훨씬 더 복잡하다는 이유에서다. 세라 허디에 따르면 인간 어머니는 출산 후 약 72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자기 자식을 큰 감정적 비용 없이 처리해버릴 수 있다. 많은 문화권에서 출산 직후에 산모가 아기에게 무관심하더라도 산모를 나무라지 않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이라고 한다. 산모가 아기에게 애착을 갖는 것은 며칠이나 몇 주가 지나 뇌의 보상 시스템이 활성화할 때부터라고 한다.

분쟁과 협동의 본성에 대한 행동과학 연구 분야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과학자 중 한 명인 라가벤드라 가닥카는 '암수'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전혀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준다. 그가 관찰한 대상은 인도 남부의 원시 말벌이었다.

말벌 사회 수컷은 '잉여'에 불과...

가닥카의 관찰에 따르면 말벌 사회의 수컷은 '잉여'에 불과하다. 수컷 말벌은 암컷에 의해 양육되어 한동안 유목민처럼 떠돌다가 섹스를 하고 죽는 삶을 산다. 그런데 이 '수컷=잉여'라는 등식은 자연 전체에서 두루 발견되는 사실이라고 한다.

말벌뿐 아니라 꿀벌과 개미를 봐도 수컷은 잉여라는 사실을 더없이 분명하게 알 수 있어요. 이 녀석들의 사회에서는 심지어 번식을 위해서도 수컷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여왕의 아들은 수정되지 않은 알에서 태어나거든요. 여왕과 수컷들의 섹스는 오직 딸을 낳기 위해서만 필요해요. 여왕은 한 번 섹스를 하면서 수컷의 정액을 받아들여 몸속의 작은 주머니에 보관하지요. 그 주머니 속의 정액은 신선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필요할 때 사용되고요. 요컨대 여왕이 아들을 낳느냐 딸을 낳느냐는 전적으로 여왕 자신이 결정합니다. (122쪽)

경제학을 정의의 관점에서 다룬 에른스트 페르는 집단 안에 이기주의자가 있을 때 집단 내부의 협동이 순식간에 붕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 "처먹는 것이 우선이요, 도덕은 나중이다"(156쪽)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은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잘 드러낸다. 독일 극작가 막스 프리쉬가 인류 역사의 모든 혁명가가 행복이 아니라 정의를 약속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고 말한 맥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페르는 한 사회가 언제 부정의로 붕괴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 사회 고유의 이데올로기가 더는 통하지 않을 때입니다. 문제는 불평등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불평등이 실적을 통해 정당화되지요.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특별히 열심히 일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상을 받는 것은 사회에 이롭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드러나고 있듯이, 일부 최고경영자들은 탁월한 실적 때문에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158쪽)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노동의 결과가 노동한 사람과 함께 죽는 그런 노동은 하지 말라"라는 말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다 빈치의 그 말은, 개미처럼 죽도록 일만 하며 살다가 사라져가는 우리 평범한 인간들을 향한 경구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마틴 리스가 말한 '별이 남긴 먼지'인지 모른다. 광활한 우주의 '창백한 푸른 점'(지구에 대한 칼 세이건의 비유)에서 72억 개의 '먼지' 중 하나인 '나'를 떠올려 보라. 하지만 그 '먼지'는 수많은 각자의 '나'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고집에 가까운 끈기, 후퇴와 자기회의에 굴하지 않는, 특히 경쟁에 아랑곳하지 않는 끈기"(17쪽)로 수십 년을 자연의 수수께끼 속에서 헤맨 13명의 과학자들이 들려주는 교훈이다.

덧붙이는 글 |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슈테판 클라인 지음, 전대호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4. 6. 20. / 325쪽 / 17,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 최고의 과학자 13인이 들려주는 나의 삶과 존재 그리고 우주

슈테판 클라인 지음, 전대호 옮김, 청어람미디어(2014)


태그:#<우리는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슈테판 클라인 지음, #전대호 옮김, #청어람미디어, #과학자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