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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고발하는 피고들을 나는 알지도, 보지도 못했으며 그들에게 아무런 원한도, 증오심도 없습니다. 내게 있어서 그들은 사회악을 구현하는 하나의 실체일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고발행위는 진실과 정의를 앞당겨 분출시키기 위한 하나의 혁명적 방법일 뿐입니다. 크나큰 고통을 겪어 이제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인류의 이름으로 진실의 빛을 밝히는 것, 그것이 단 하나뿐인 나의 정열입니다. 불타오르는 나의 항변은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나를 중죄 재판소에 고발한다 해도, 백일하에 나를 심판한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 에밀졸라 <나는 고발한다> 중.

1991년 여름은 데일 정도로 뜨거웠지만, 마음은 얼어붙을 듯 추웠습니다. 그때 강기훈은 제게 그저 대학 선배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한 날인 5월 8일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강기훈의 인생도, 그를 지켜보며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낀 후배들의 삶도 바뀌었습니다.

오는 10일에 '강기훈을 기억하는 음악회'가 열립니다. 여기에 '강기훈'이라는 이름 대신 '그 시절'이나 '파시즘' '비겁함' 등 여러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23년 전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1991년 어느 날, 빗속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1991년 4월 26일은 금요일이었습니다. 모교인 단국대 한남캠퍼스에서 세미나 마치고 선술집이 모여 있는 '개골목'으로 가다 서문 앞에 한 장의 대자보가 붙었습니다. "명지대 강경대 학우, 전경폭행 사망".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한 줄짜리 속보에 놀랐지만 그 누구도 앞으로 펼쳐질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생 천세용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5월 8일 전민련 김기설, 5월 10일 윤용하... 계속 되는 분신에 우리는 덜컥 겁을 먹었습니다. 특히 5월 25일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토끼몰이로 쫓기다 성균관대생 김귀정 압사 사건이 벌어졌을 때, 저는 그 곳에서 있었습니다.

함께 넘어지고 깔리면서 한 쪽 신발을 잃었고, 한 쪽 다리를 쩔뚝이며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왔고,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졌고, 최루가스에 온몸이 따가웠습니다. 서문에는 또 한 장의 대자보가 붙어 있더군요. "성균관대생 김귀정 사망". 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빗속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 때는 선택지가 없는 스무 살 청춘이었지요.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

우리는 동맹휴업을 했습니다. 뽀얀 최루가스를 속에서 캑캑대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허름한 선술집에 모여 소주를 마셨습니다. 자꾸 눈물이 났고, 이러다가 우리  중 누군가 몸에 불을 붙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라고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울었습니다. 지금 젊은 친구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죽지 말자"고 이야기를 했지요. 스무 살 청춘의 가슴에 불길이 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5월 8일 김기설씨 분신사건이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언론이 김기설이 누군가의 사주로 죽었다고 자꾸 떠드는 겁니다. 박홍 서강대 총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 우리사회에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지하 시인도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라고 얘기했습니다.

곧 우리 학교 선배인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이 배후로 지목됐습니다. 검찰이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단국대학교 조직계보를 만들었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참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지만, 상황이 엄혹하다 보니 강기훈 선배와 알고 지낸 선배들은 몽땅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배들이 떠난 자리에서 남은 우리들은 그냥 습관처럼 싸웠습니다. 세상이 미운 건지 시간이 미운 건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싸웠습니다. 그렇게 6월이 되고 '정원식 총리 외대생 폭행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어 교수직을 사퇴하는 정 교수에게 학생들이 계란과 짱돌, 인분 등을 던진 일이었습니다. 여론은 싸늘해졌습니다. 6월 20일 광역의회의원 선거에서 그토록 밉던 민자당이 압승을 거둡니다. 스무 살 우리의 가슴은 시체처럼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5월 분신정국에 떠나 보낸 13명의 열사에게 미안했습니다.

경찰과 실랑이 끝이 들어간 재판장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강기훈 선배의 재판을 방청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뭔 전경들이 그리 꽉꽉 막고 있던지...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전경 사이 몸싸움에 가까운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어떤 관계야?"
"학교 선밴데요?"
"아는 선배야?"
"아, 모르면 오겠어요?"

몸싸움 직전까지 간 끝에 겨우 뚫은 우리는 툴툴거리며 재판정에 들어갔습니다. 판사가 이야기 하면 방청객들이 웅성웅성 대고, 때로는 쥐죽은 듯 조용하고... 가슴이 답답한 상태로 앉아 있던 기억이 납니다.

꼬박 징역을 살고 나온 강기훈 선배와 술집에 갔습니다. 삼각지 대구탕 집으로 기억합니다. 이날 저는 강기훈 선배와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형님'으로 부르기로 했지요. 강기훈 형님은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제일 막내라서 그저 주는 술이나 받아 먹고 선배들 이야기만 거들기만 하면 되는 처지였습니다. 제가 조용히 관찰한 기훈 형님은 말이 별로 없고 그저 미소만 짓는 타입이었습니다. '세상을 달관했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달관이 아니라 '버틴' 것이라는 걸 나중에 기사를 보고 알았습니다.

"과거의 불행했던 일이라 치부하고 어쩌면 잊고 싶었을지도 모를 1991년의 기억들은 이승을 뜨지 못하는 망령처럼 떠돌면서 제 삶을 압박했습니다. 죽어서도 명예롭지 못한 망자에 대한 부채감, 하루 한 시각도 용납할 수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저에 대한 연민, 처절하고 지옥 같았던 시간의 기억들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틀어 놓았습니다."
- 2014년 2월, 법정에서 낭독한 최후 진술서에서.

철없는 생각이지만 그때는 좀 답답했습니다. 그날 저는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기훈 형님은 별로 마시지 않았습니다.

23년만에 무죄...몸 속 암덩어리는 어쩌나

20대 청년에서 50대 중년이 된 ‘암환자’ 강기훈의 인생은 누가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인가?
▲ 무죄판결 직후 20대 청년에서 50대 중년이 된 ‘암환자’ 강기훈의 인생은 누가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인가?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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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3일 오후 2시. '23년 만에 무죄'. 기훈형 소식이 신문을 장식했습니다. 2007년 진실화해위가 "유서는 김기설씨가 직접 작성"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재심을 권고했습니다. 2009년 9월 서울고법이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지만, 검찰의 항고로 개시가 늦어졌지요. 대법원은 2012년 10월에야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하면서 재심 개시를 확정했습니다. 1년 2개월 동안 공방을 벌인 끝에 2014년 2월 13일에야 '무죄'판결을 받게 된 것이죠.

기사를 보는 순간 더 억울해졌습니다. 기훈이형은 1994년에 이미 출소해서 다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2012년 검찰의 항고를 하는 기간에 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2008년에 기훈 형의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만 해도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는 건강해 보였습니다. 기훈형은 어느 인터뷰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사법고시생이 자신의 사례로 '자살방조죄'를 공부한다는 걸 알았을 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간암판정까지.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진 이 참혹한 삶을 도대체 누가 보상해주나 싶었습니다. 

프랑스의 드레퓌스는 포병대위로 근무하던 1894년에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끈질긴 노력 덕택에 재심을 거쳐 1906년에 무죄가 입증되었습니다. 12년 만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복권이 되어 육군에 복직, 소령 진급은 물론 레지옹 도뇌르(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라는 프랑스 훈장 중 가장 명예로운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프랑스 파리에는 드레퓌스 동상까지 있다고 합니다.

19세기 말에 벌어진 ‘드레퓌스’사건은 프랑스 지성을 일깨우는 힘이 되었다.
▲ 드레퓌스와 에밀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19세기 말에 벌어진 ‘드레퓌스’사건은 프랑스 지성을 일깨우는 힘이 되었다.

 
그런데, 강기훈은 어떤가요?

그는 지난 1월 8일 CBS라디오의 <김미화의 여러분>에서 "사과 한마디로 다 보상이 되겠냐"는 사회자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보상이 아니라 지금하고 있는 재판보다 그 한마디가 더 멋지고 값지지 않느냐는 얘기고요. 가장 큰 용기는 자기가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얘기하는 거잖아요. 자기한테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왔잖습니까. 그 기회를 날려버리면 안 되죠. 옛날과 똑같은 판결을 내리면 안 되죠. 그 멍에를 누가 집니까? 사법부, 검찰이 질 겁니다. 제가 지지 않아요. 그리고 두고두고 얼룩으로 남겠죠. 후대에까지. 그리고 그것만 남나요?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이름도 남습니다. 그런 무게감을 갖고 이 재판에 임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나!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주고 있는 거죠? 예전에 말이 없어 세상을 달관한 게 아닐까 느꼈던 제 감이 틀리지 않았나봅니다. 강기훈은 강신욱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은 물론 신상규 수석검사와 곽상도, 남기춘, 윤석만 검사들과 노원욱 1심 재판장, 임대화 2심 재판장,  박만호, 김상원, 박우동, 윤영철 등 대법원 재판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때나 지금이나 잘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강기훈은 외칩니다. 역사의 법정에 당신들의 이름이 남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책임자였던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오는 10일 '강기훈을 기억하는 음악회'가 열립니다.

여기에 '강기훈'이라는 이름 대신 '그 시절'이나, '파시즘'이나 '비겁함'이나 여러 단어를 대신 읽어도 무방합니다. 23년이나 지났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이런 역사의 비극은 또 반복됩니다. 유신헌법 초안을 준비했던 김기춘 법무부 과장이 노태우 정권에서 법무장관으로, 이제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또 다른 오류의 역사를 써가고 있으니까요. 우리, 제대로 기억합시다. 합창단원인 저는 노래하며 기억하겠습니다.

-행사명 : 강기훈을 기억하는 음악회
-일 시 : 2014년 7월 10일(목) 오후 7시
-장 소 :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1층 중강당
-출 연 : 민중가수 방기순, 한겨레 평화의 나무 합창단

강기훈은 현재 ‘간암’으로 투병 중이다.
▲ 강기훈 음악회 포스터 강기훈은 현재 ‘간암’으로 투병 중이다.
ⓒ NCCK 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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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음악회 티켓은 만 원입니다. 현장에서도 구매가 가능합니다.



태그:#강기훈 음악회, #방기순, #평화의 나무 합창단, #유서대필, #드레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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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한, 1969년 서울 산(産), 2000년부터 방송에 관심 있어 주변을 맴돌다 2005년 우연히 얻어 걸린 라디오 전화인터뷰부터 시사평론 방송시작, 2014년부터는 경제 Agenda에 집중, 시사경제평론을 하면서 몇몇 경제채널 출연하고 있음, 어떻게 하면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지 종일 고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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