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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신촌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김은주 대표
 6월 26일 신촌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김은주 대표
ⓒ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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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자 김두식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표현을 빌려 법률가들을 '신성가족'이라 표현한 바 있다. 법률가는 "불경스러운 대중과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투쟁"을 한 결과 "고독하고 신과 닮았으며 자기만족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거듭난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사법의 세계는 일반인들과 멀리 동떨어진 낯설고도 두려운 영역이다. 그곳은 일반인의 침입을 불허하는 '신성가족'의 세계다.

그런데 변호사도 없이 혼자서 산업재해 요양비 청구 소송을 해 승소한 사람이 있다. 진보마켓의 김은주 대표다. 진보마켓은 운영비를 제외한 수익금 전액을 장기투쟁 사업장이나 사회운동 현장과 '연대'하는 데 사용하는 인터넷 쇼핑몰이다(관련기사 : 수익금 모두 나눠주는, 이런 쇼핑몰 또 없다)

2010년 5월, 김 대표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골프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시설보안 공사를 하던 중 트럭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뇌 기능이 저하됐다. 지능이 4~6세 수준으로 떨어져 혼자서는 집을 못 찾아오고, 대소변도 보지 못해 항상 누군가가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김 대표는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근로복지공단(아래 공단)은 아버지의 사고를 산재로 인정했고, 치료비도 지급했다. 문제는 요양비였다. 처음 수술한 병원에 있을 때는 공단이 요양비를 지급했지만, 재활치료를 위해 다른 병원으로 옮긴 후 공단은 요양비 지급을 중단했다.

김 대표는 공단에 요양비를 청구했지만 불승인 판정이 났고, 2012년 3월 요양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13년 10월 1심에서 승소했고, 2014년 4월에는 공단 측의 항소가 각하되면서 마침내 김 대표의 승소가 확정됐다. 6월 26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김 대표를 만나 지난 4년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환자 한 번 보고 판단... 1~2분 만에 어떻게 아나"

우선 산재 요양비 청구 소송을 왜 했는지부터 물어봤다. 뭐가 문제였기에 수 년간의 법정 다툼까지 감수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던 걸까. 김 대표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단은 환자가 혼자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고 봐서 요양비 신청을 거절한 거 같아요. 그런데 그 판단이 너무 주관적인 거예요. 예를 들면 아버지는 식사하실 때 처음 집은 반찬 하나만 계속 드세요. 제대로 식사를 하려면 밥이나 국, 다른 반찬도 드시도록 옆에서 챙겨야죠. 그런데 팔은 안 다쳤으니까 혼자 식사할 수 있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공단에 심사받으러 간 날도 위험했어요. 가족들이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아버지께서 사라지셨거든요. 다행히 멀리는 안 가셔서 금방 찾았지만, 아버지 혼자서는 못 찾아오시니까 자칫 하단 큰일 날 뻔했죠. 그런데 공단은 방금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요양비를 줄 정도는 아니라면서 불승인 판정을 한 거예요."

김 대표는 이어 공단의 성의 없는 태도를 비판했다. 그녀는 최근 상담한 산재 전문 변호사의 말을 빌려 "공단의 일 처리가 주먹구구식"이라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아버지 경우에도 요양비를 지급하지 않은 근거를 제대로 명시하지 않았다"며 "요양비 승인의 기준이나 자료가 없다"고 말했다. 공단의 허술한 일 처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공단이 한 번도 환자 상태를 보러 병원에 온 적이 없어요. 요양비 심사할 때, 그때 딱 한 번 환자를 보고 요양비를 줄지 말지 판단한 거예요. 그때도 가족들은 다 나가라고 하니까 가족들이 환자 상태를 설명할 수도 없어요. 환자만 남겨둔 상태에서 심사위원들이 한 1~2분 만에 환자를 보고 판단한 거예요. 그동안 어떻게 환자 상태를 정확히 파악 수 있겠어요?"

이런 점 때문에 김 대표는 오히려 자신 있게 변호사도 없이 소송에 나설 수 있었다. "이견의 여지가 있다면 전문 변호사를 선임했겠지만,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소송했다"는 것이다.

"노동운동 경험 덕분에 용기 낼 수 있었다"

산업현장에는 늘 재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산재 판정과 보상까지 가는 절차는 너무나 멀고 복잡하다.
 산업현장에는 늘 재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산재 판정과 보상까지 가는 절차는 너무나 멀고 복잡하다.
ⓒ 노동건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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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 대표가 '나홀로 소송'에 나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노동운동 경험이었다. 그녀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20년 넘게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

"공단에 가면 괜히 주눅이 들어요. 공단 쪽에서 알아듣기도 힘든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써가면서 설명하면 괜히 움츠러들고, 그분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법처럼 느껴지죠. 그분들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구나' 싶고.

그런데 저는 노동조합을 오래 했으니까 그런 부담감은 별로 없었어요. 부당한 것에 문제 제기하는 것은 노동조합 하면서 늘 했던 거니까 특별한 용기를 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저쪽에서 안 된다고 해도 '그게 왜 안 되냐'고 항의하고 뭔가를 요구할 수 있었어요. 또 주변에 노동문제를 잘 아는 분들이 많으니까 도움받을 수도 있었고."

이 말을 뒤집어보면, 노동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요양비 청구 소송은 더 그렇다. 환자가 요양비를 청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안다고 해도 공단이 불승인 판정을 했을 때 소송하기가 쉽지 않다. 요양비는 산재 등급이나 산재 손해배상 관련 소송보다 소액이라 승소해도 경제적으로는 별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걸린 게 크면 소송까지 가겠지만, 요양비 청구 소송은 돈도 안 되는데 괜히 신경만 쓰인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며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저도 소송을 못 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노무사들이 병원에서 영업을 많이 하시는데 그분들도 치료비나 산재 등급 이야기는 하지만, 요양비 이야기는 안 하시거든요. 산재 중에서도 요양비가 소외된 부분인 거죠."

"산재 요양비 받는 건 권리... 당당하게 요구하길"

소송에서는 승소했지만,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현재는 2011년 1월까지의 요양비만 청구한 상태고, 그 이후의 요양비도 청구할 계획이다. 병원 치료는 끝났지만 집에서도 주기적으로 약을 먹어야 한다. 2년마다 산재 장해등급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등급이 떨어지면 지원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찾으라"고 조언했다.

"지금은 산재 때문에 생기는 여러 피해를 가족들에게 떠넘기고, 가족들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가족들이 다 달라붙어서 환자를 간호하고, 요양비를 벌기 위해 일하고…. 저희는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는데 어머니도 암 환자예요. 환자가 환자를 돌보는 거죠. 이런 고통은 치료비를 주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거고,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산재를 당했을 때 요양비 받는 걸 권리로 생각하고, 당당하게 요구하셨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민주노총 법률원 같은 곳에서 도움받을 수도 있으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몸으로 부딪혀나가면 권리를 많이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태그:#김은주, #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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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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