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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사수 장면
▲ 연극 <푸르른 날에>의 한 장면. 도청 사수 장면
ⓒ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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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김지훈 감독이 CJ 엔터테인먼트와 손을 잡고 제작한 영화 <화려한 휴가>는 '5·18에 대한 죄의식을 일깨워주지만 흥행을 목표로 한 거대자본이 낳은 영화'(이성욱)라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나에게 있어선 비록 허구화된 진실이라 해도 5·18의 진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끌기에 적합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1980년 5월 17일에 전국으로 내려진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이로 인해 투입된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으로 평범한 시민들이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는 동생의 죽음을 겪으며 도청으로 들어가는 형의 시점에서 끝까지 투쟁하다 진압되는 결말을 예고하고 있기에 처음부터 예정된 비장미를 기조로 한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화려한 휴가>는 기억의 재생을 통한 5.18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교정하자는 데에 방점을 둔 것이라 여겼고 광주시민의 명예를 어느 정도 회복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2014년 그 비극의 도시 광주에서 맞이하는 연극 <푸르른 날에>는 그런 의미에서 5.18에 대한 또 하나의 변주곡처럼 다가왔다. 이미 평단의 상찬과 화려한 수상경력, 관객의 호응을 통해 익히 알려진 작품인지라 과연 그 명과 실이 부합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마지막 공연을 택한 것도 그런 나름의 거리두기가 작용했을 것이다.

민호가 물고문을 당하는 장면
 민호가 물고문을 당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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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푸르른 날에>는 한 발짝 비껴서서 5.18 광주항쟁에 휘말린 평범한 남녀의 비극을 명랑한 신파 어법으로 풀어낸 이야기이다. 그래서 웃을 수 있었고 울 수 밖에 없었다. 막공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마치 극을 처음 올리는 것처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합을 맞춘 것임에도 연극이 주는 본질적 현실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물고문을 당하는 장면에선 온몸이 떨리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합법을 가장한 권력이 한 인간에게 가하는 끔찍한 폭력 앞에서 공포와 분노를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투사도 아니었던 그냥 평범한 한 젊은이의 영혼은 마치 질그릇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야차가 되어버린 그는 사랑도 구원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자 했던 것이다.

녹차밭이 보이는 암자에서 수행 중인 스님 여산(과거의 오민호)은 딸 운화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그의 기억은 30여 년 전 전남대를 다니던 야학 선생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민호는 전통찻집 아르바이트생인 윤정혜와 사랑에 빠져 있었고, 정혜의 동생 기준은 민호를 친형처럼 의지하고 있었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 항쟁이 터지고, 그 소용돌이 속에 도청을 사수하던 기준은 죽고 살아남은 민호는 고문을 당하며 그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이 된다. 결국 벼랑끝 삶을 살던 민호는 일정 스님을 만나 불가에 귀의한다.

<푸르른 날에>는 그날의 상처를 끄집어내기에 가혹하며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을 다시 떠올리게 하기에 잔인하다. 나는 묻는다. 너라면 그 때 광주에 있었다면 어디에 있었을 것이냐고......그러나 <푸르른 날에>는 그날의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런 기억들을 되살리겠다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과거의 아픔을 덮어만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시 치유하자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민호는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 젊은 날의 정혜에게 면사포를 씌워준다. 그리고 과거의 용서할 수 없었던 자신과 진정으로 화해를 한다. 용서는 결국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30년이 지난 시점에 조심스럽게 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여산 스님이 자신과 진정한 화해를 하는 장면
▲ 연극 <푸르른 날에>의 한 장면 여산 스님이 자신과 진정한 화해를 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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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멤버 그대로 해가 갈수록 완성도를 더해가는 <푸르른 날에>는 5.18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중에서 가장 무거운 주제를 신파적 유머로 균형을 잡고 상처와 치유에 대한 미래지향적 서사라 할 수 있겠다. 평범한 사람들의 꿈은 소박한 행복에 있기에 민호와 정혜를 젊은 날의 사랑으로 다시 맺어주는 장면은 마치 영혼결혼식처럼 5월의 노래와 함께 가슴아프게 눈물겨운 장면으로 남았다. 두려움과 설렘으로 광주에서 열정적으로 호연을 보여준 캐스트와 스태프들에게 광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 번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태그:#푸르른 날에, #화려한 휴가,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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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리뷰어. 2013년 계간 <문학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명왕성 소녀>(2023), <물 위의 현>(2015), 캘리그래피에세이 <캘리그래피 논어>(2018), <캘리그래피 노자와 장자>, <사랑으로 왔으니 사랑으로 흘러가라>(2016)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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