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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6일 중국 정부가 신장 지역의 테러범 13명을 사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09년 신장에서 위구르족의 중국 정부에 대한 항거 이후 발생한 신장지역의 테러 혐의자들이 한꺼번에 사형을 당한 것이다.

얼마전까지 내가 있던 신장에서 일어난 일이라 가슴이 아팠다. 과연 중국정부의 이런 강압적인 조치가 신장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신장이 갈등과 폭력으로 점점 물들어 가는 것 같아 서글프게만 느껴졌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신장이라는 땅을 제대로 이해하려하지 않고 단순히 테러 폭동 위험지역이라는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규정짓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쓰라렸다.

베이징에서 40시간 기차를 타고 도착한 우루무치역
 베이징에서 40시간 기차를 타고 도착한 우루무치역
ⓒ 이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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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말, 나는 신장에 있었다

2014년 5월 21일 베이징에서 40시간 기차를 타고 도착한 우루무치역은 어느 역보다 분주하고 복잡했다. 중국의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이들을 검사하는 공안들로 붐비는 우루무치역은 생각보다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예전에 우루무치역에서 일어났던 테러때문인지 경비가 굉장히 삼엄했고 왠지 모를 긴장감까지 흐르고 있었다. 역을 나와 바라본 우루무치는 중국의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었다. 높은 빌딩들과 잘 발달한 대중교통은 우루무치가 굉장히 발달된 도시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다만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한족과 다른 외모의 위구르 족이 눈에 띄었다.

우루무치의 거리
 우루무치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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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성도인 우루무치의 점심시간은 아이들로 붐볐다. 체육복 같은 학교 교복을 맞춰 입은 아이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녔다. 다만 한족 아이들은 한족 아이들끼리 위구르족은 위구르족 아이들끼리 몰려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5월 22일에는 우루무치의 이교도 시장을 둘러보고 홍산공원 등을 둘러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평화로운 우루무치였다. 홍산공원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한가로이 쉬고 있는 사람 들도 보였다.

홍산공원에서 바라본 우루무치
 홍산공원에서 바라본 우루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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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아침일찍부터 톈산톈츠(天山天池)를 보기 위해 출발했던 그날, 내가 머물고 있던 숙소와 그다지 멀지 않은 인민공원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당시 정확한 소식은 알 수 없었으나 인민공원의 한족들이 많이 이용하는 아침시장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폭탄테러에서 31명이 숨지고 94명이 다쳤다. 하루 전 우루무치의 아이들이 평화롭게 걷던 길이 또 다시 발생한 테러 때문에 전쟁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위구르족이 이번 테러는 한족 일반인들을 겨낭해 일반 시장을 테러한 것이라서 충격적이었다.

내가 머물던 숙소 인근에서 테러 발생

이 사건을 통해 위구르족의 테러가 중국정부에 대한 분노를 넘어서 일반 한족에게까지 뻗쳐 민족간의 갈등으로 번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중국 전역에서 위구르족과 한족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족과는 위구르족은 외모, 종교, 문화적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에 서로 섞이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있는 산동의 산동제정대학교 기숙사에도 위구르족 학생들은 따로 기숙사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식생활에 있어서도 위구르족은 종교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지만 한족은 돼지고기 식품을 선호한다. 음식을 비롯한 문화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한족과 위구르족이 같이 어울리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게다가 2009년 신장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2009년 7월 15일 신장에서 위구르족과 한족이 충돌한 사건. 중국 정부 발표로는 197명이 사망했으나, 800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추정)와 그 이후 발생한 일련의 테러 사건들 때문에 위구르족과 한족의 서로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해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혼자 신장을 간다고 하자 대부분의 한족 중국인들은 위구르족 중에는 위험한 사람들이 많으니 특히 조심을 하라고 당부를 했었다.

특히 위구르족은 온 몸에 칼을 소지하고 다니며, 그들만 모여있는 골목은 특히 위험하니 절대 가지 말라는 것이 었다. 한족의 인식 속에는 위구르 사람들은 위험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이었다. 사실 중국전체인구 중 한족의 비율이 90% 이상인데 반해 위구르족은 1% 미만이다. 게다가 신장의 경우에도 한족유입정책이 실시된 후 한족이 6%에서 40% 이상으로 증가 하였다. 신장을 제외한 다는 중국에서는 위구르족이 정말 소수이다. 또한 한족의 위와 같은 인식 들 때문에 위구르족 대부분은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위구르족 언어
 위구르족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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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장에서 만나본 위구르족 사람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는 중국어로 말을 몇마디 하는 것 외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지만 내가 웃으면 환한 웃음을 나에게 다시 돌려주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같지 않은 외모 때문에 먼저 말을 걸기가 조금 꺼려지기도 했지만 막상 말을 해보면 그들은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보며 여행 조심히 잘 하라며 내 걱정을 해주곤 했다.

투루판에서 만난 위구르족 할아버지
 투루판에서 만난 위구르족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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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장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연민이었다. 그들은 고유의 언어가 있음에도 중국어를 사용해야 하고 기본적인 교육 또한 중국어로 받아야 한다. 또한 위구르족 아이들은 자신들의 선조와 역사가 있음에도 한족 기준의 역사를 중국어로 배우며 살아간다. 내가 일제시대에 태어났으면 저런 기분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성도인 우루무치에는 한족들과 위구르족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지만, 대부분의 큰 상점과 건물의 소유주는 한족이었다. 또한 도시의 고위직 공무원은 물론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공안들과 중국군 또한 대부분 한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도 한족이 위구르족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장은 위구르족을 비롯한 다른 소수민족들이 살아오고 일궈온 땅인데 이들은 현재 대부분의 지역에서 한족에게 관리되어 살아간다. 위구르족은 신장에서 자신들이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오고 있었지만, 변화하는 중국은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신장을 도시화시켰고 그들이 중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지 못하게끔 하였다.

중국 정부는 신장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중국화를 강요했고, 이에 반하는 위구르 사람들과 중국 정부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2009년 7월 5일 유혈사태이다. 그 이후 계속해서 신장에서는 폭력적인 테러가 일어난다. 신장 전 지역 중 한족의 비율이 가장 많고 가장 도시화되고 중국화된 우루무치에서 이런 테러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2014년 4월 우루무치남역 테러, 2014년 5월 우루무치 인민공원 폭탄테러 등) 물론 폭력적인 테러는 기본적으로 용납할 수 없지만, 이 테러들은 어찌보면 그저 자신의 땅에서 자신들의 선조가 살아온 것 들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은 위구르족의 울부짖음인 것이다.

사실상 한족의 지배 받는 위구르족, 해법은?

타슈쿠르간에서 만난 아이와 엄마
 타슈쿠르간에서 만난 아이와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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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을 떠나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그곳에서 만난 신장사람들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어디서 왔냐며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 눈빛들, 신장사람들은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훨씬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폭력과 편견으로 신장사람들의 눈에는 순수함 대신 중국정부 그리고 한족에 대한 증오가 점점 더 맺혀 가고 있다.

신장 문제의 핵심은 그 지역 위구르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순수함이 중국 정부에 인해 파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신장 문제의 해결을 그들의 삶을 어떻게 존중하고 보존할 것인가에서 시작해야 한다. 신장은 중국 영토이기 앞서 그들의 터전이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먼저 바라봐야 한다. 아름다운 신장이 더 이상은 폭력으로 물들지 않기를 바란다.


태그:#신장, #위구르, #우루무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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