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증각대사 응료탑비
 증각대사 응료탑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극락전 앞에 펼쳐진 실상산문의 역사

극락전 앞에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증각대사(證覺大師) 응료탑비(凝蓼塔碑)다. 여기서 증각은 홍척(洪陟)스님의 시호고, 응료는 스님의 탑호다. 증각은 깨달음을 증거한다는 뜻이고, 응료는 올바르고 크다는 뜻이다. 이 탑비는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았다. 귀부는 용머리가 아니고 거북이여서, 태종무열왕비의 거북과 유사성이 느껴진다. 이수의 조각은 부여에 있는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수의 한 가운데 전액에서 응료탑비라는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이 비석의 주인공이 증각대사 홍척임을 알 수 있다. 홍척스님은 실상산문의 개산조다. 그러나 비신이 사라졌기 때문에 홍척대사에 대해서는 다른 비문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이 고운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 '지증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이다.

이수에 '응료탑비'라는 전액이 보인다.
 이수에 '응료탑비'라는 전액이 보인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고운은 이곳에서 도의선사가 중국에 가 서당지장에게 선종의 현묘함을 배우고 돌아와 가장 먼저 이 땅에 선종을 전했다고 말한다. 이어 홍척대사가 서당 지장에게 가서 심인을 증득하고 돌아와 이 땅에 선종을 계속 전한다. 도의는 북산(北山)에서 홍척은 남악(南岳)에서 활동했다고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이 땅에 돈오(頓悟)의 선풍이 흥기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銘)에 이르기를. 

북산의 도의와 남악의 홍척이여                      北山義與南岳陟
홍곡의 날개 드리우고 대붕의 날개 펼쳤도다.   垂鵠翅與展鵬翼
해외에서 제때 돌아와 도를 한껏 떨쳤나니       海外時來道難抑
멀리 뻗을 선의 물줄기 막힘이 없었어라.         遠派禪河無擁塞

홍척과 수철, 그들이 남긴 자취

실상사 극락전
 실상사 극락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이곳 극락전의 양쪽에는 증각대사 응료탑과 수철화상(秀澈和尙) 능가보월탑(楞伽寶月塔)이 있다. 우리는 먼저 극락전 왼쪽에 있는 증각대사 응료탑으로 향한다. 극락전 앞에 있는 응료탑비를 먼저 보았기 때문이다. 응료답은 통일신라시대 자주 볼 수 있는 팔각원당형 승탑이다. 여늬 승탑과 마찬가지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 하대석, 간주석 형태의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대석이 사각형이다. 그 위로 팔각형의 하대석이 3단으로 되어 있다. 그중 아랫단에 복련 무늬를 양각해 넣었다. 팔각의 중대석에는 조각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는데,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에 비해 상대석은 세 겹으로 앙련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

증각대사탑으로 잘못 알려진 수철화상탑
 증각대사탑으로 잘못 알려진 수철화상탑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그 위의 탑신부는 탑신 받침, 탑신석,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 받침은 난간 형태의 구조물로, 탑신석을 받치는 역할을 한다. 난간기둥을 조각하면서 변화를 주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탑신석은 8면으로, 두 면에 문비가, 네 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고, 두 면에는 조각이 없다. 문비와 사천왕상의 조각이 상당히 정교한 편이다. 지붕돌로 불리는 옥개석은 목조기와집처럼 처마선이 잘 표현되어 있다.

상륜부도 앙화, 복련, 보주 형태의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탑의 주인으로 알려진 증각대사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실상산문의 개산조인 홍척스님이다. 그는 도의선사와 함께 한국 선종의 제1세대다. 도의가 북산에서 활동했고, 홍척이 남악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초기 선종은 이 두 스님에 의해 남과 북에서 전해졌다.

수철화상탑으로 잘못 알려진 증각대사탑
 수철화상탑으로 잘못 알려진 증각대사탑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이 승탑을 보고난 우리 일행은 극락전을 돌아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을 보러 간다. 탑 전체가 검은 빛을 띠고 있으며, 비례와 균형이 맞아 상당히 안정적이다. 가까이 다가가 조각을 살펴보니 증각대사 응료탑에 비해 마모가 좀 더 심한 편이다. 이번 답사에 참가한 현장답사 전문가들이 증각대사 응료탑을 살펴본 후 내린 결론은 증각대사탑과 수철화상탑의 고증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극락전을 향해 오른쪽에 있는 승탑이 증각대사 응료탑이고 왼쪽에 있는 탑이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이다. 왜냐하면 양식으로 보나 영향 관계로 보나 오른쪽의 탑이 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 승탑 역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 지대석은 팔각형으로 무늬가 전혀 없다. 이것은 후대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선명한 사천왕상
 가장 선명한 사천왕상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하대석에는 구름, 용, 사자가 표현되었는데 마모가 심한 편이다. 중대석에도 안상을 새기고 그곳에 불교관련 도상을 새겨 넣었다. 상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다. 탑신부의 탑신받침은 비교적 단순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탑신은 팔각의 모서리에 8개의 기둥을 분명히 표현했다. 그리고 각 면에는 문 모양과 사천왕상을 새겨 넣었다. 마모가 심하지만 도상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경사가 완만하며, 아래로 기왓골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했다. 처마부분은 엷은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극락전 왼쪽 승탑에 비해 서까래를 분명히 표현했다. 상륜부는 2층의 단만 남아있을 뿐 그 위 조각품들은 사라지고 없다. 이 승탑은 양식뿐 아니라 돌의 재질로 보아도 증각대사 응료탑이 틀림없다. 증각대사 응료탑과 탑비가 재질뿐 아니라 색깔까지 같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진실을 찾는 일만 남아

증각대사 응료탑(왼쪽)과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증각대사 응료탑(왼쪽)과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사실 우리 팀은 재야사학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때문에 사학계에서 발언권이 미약한 편이다. 그리고 주류에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비주류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문제점을 찾아내고 잘못을 고치려 한다. 왜냐하면 주류의 주장이 분명히 틀렸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극락전을 향해 오른쪽에 있는 승탑이 증각대사 응료탑이고, 왼쪽에 있는 승탑이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승탑의 몸짓을 잘못 파악해 다른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의 이름을 잘못 붙여줘 참꽃이 아닌 개꽃이 되고 말았다. 진달래와 철쭉을 구별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이 승탑 앞에는 탑비가 하나 서 있다. 일반적인 탑비와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사용했다. 받침돌에는 안상과 복련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신라시대 양식과는 거리가 멀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이수로 불리는 머릿돌 역시 후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름 속에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나 정교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수 가운데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각의 수법이나 양식 등에서 수준이 아주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원래의 탑비는 전하지 않고, 1714년(숙종 40년) 탁본을 가지고 다시 새겼기 때문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815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829년 출가하여, 830년대 초반 경주를 찾은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북산(설악산)의 진전사(陳田寺)을 찾아 도의선사를 만난다. 하지만 곧 남악의 실상사로 와 홍척의 인가를 받는다. 그리고 835년 명주(溟州) 복천사(福泉寺)에서 구족계를 받는다. 그렇다면 수철화상은 북산과 남악을 아우르는 당대의 큰스님인 셈이다.

진전사 도의선사 부도탑
 진전사 도의선사 부도탑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이후 수철은 840년경 홍척이 입적하자 문성왕의 후원으로 실상사에 스승의 부도와 탑비를 건립하고, 사우를 크게 확장하였다. 그는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렀으나 이때부터 실상사에 들어와 실상산문의 두 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893년(진성여왕 7년) 77세로 입적하였으며, 왕은 '수철화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고 했다. 탑비는 905년경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봄꽃 가득한 실상사를 떠나며

홍척과 수철 두 스님의 흔적을 찾아보고 나서 우리는 잠시 극락전을 살펴본다. 극락전의 옛 이름은 부도전(浮屠殿)이다. 1684년(숙종 10년) 계오대사에 의해 건물이 지어졌다. 이와 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전각 좌우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탑이 있기 때문이다. 1788년(정조 12년)에는 관오대사가 이 건물을 중수했다. 그리고 1832년(순조 32년)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또 다시 중건하고 이름을 극락전으로 바꿨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다.

극락전의 꽃과 부도
 극락전의 꽃과 부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좌우에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했다고 한다. 불상이 도난당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문화재적 가치 때문일까? 사실 불상은 문화재이기 이전에 신앙의 대상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극락전을 나오면서 보니 절에 봄꽃이 한창이다.

올해는 봄이 일찍 와서 그런지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이 큰 시차 없이 피었다. 절을 나오면서 보니 요사채 주변에도 꽃이 만발했다. 우리는 답사를 모두 마치고 남원 시내에 있는 숙소로 향한다. 저녁으로는 매운탕이 준비되어 있다. 장수에서 발원해 남원을 지나는 요천(蓼川)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끓인 매운탕이다. 그리고 내일은 남원의 남쪽과 서쪽 문화재를 답사할 것이다. 수지면, 사매면, 보절면, 산동면을 찾아간다. 불교문화재 탐사가 목적이지만, 최명희의 혼불문학관도 잠깐 살펴볼 것이다.


태그:#실상사 극락전, #증각대사 응료탑과 탑비, #수철화상 능가보월탑과 탑비, #부도전, #도의선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