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온 국민의 끓어 오르는 집단 죄의식을 씻어내기 위한 제의에서일까 아니면 무능한 정부를 지키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의도 차원에서일까. 정권 친화적인 언론이 마침내 '희생양' 찾기에 돌입한 것 같다. 세월호 사고 수습에 임하는 정부의 총체적인 미숙을 물타기하기 위해 주류 언론들 간의 공공연한 짬짜미가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공영방송인 KBS 공중파와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보수 신문들은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 해운과 그 실질적인 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한국해운조합 등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세월호 침몰의 주요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 사고의 책임을 특정 부류에게 돌리려 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게 풍겨 나온다. 보수적인 주류 언론이 정부의 실책을 물타기하려는 비판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지난 24일, KBS는 밤 9시 뉴스에서 두 개의 단독 보도를 내보냈다. 순서상으로 6, 7번째 꼭지였으나 세월호 현장 소식을 전한 1~5꼭지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헤드라인 기사나 다름 없었다. 세월호 선사와 해운조합이 돌아가며 골프 외유를 했다는 내용과 이들이 해경과 해양청에 명절 때마다 선물한 의혹을 취재한 내용이었다. 이번 사고와 관련이 있는 이해관계자들의 구린 뒤를 캐서 도덕적인 비난을 받게 하자는 의도가 짙어 보이는 보도였다.

이날 뉴스에는 유 전 회장과 관련한 자극적인 내용의 보도 기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기사에서 케이비에스는 수사 검사들의 말을 빌려 유 전 회장을 "신비주의 교주"로 빗대거나, 그의 숨겨진 차명 재산을 보도하면서 '아방궁'이라는 선정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다.

25일, KBS <뉴스 9>는 헤드라인 직후의 다섯 꼭지를 한미 정상 회담 관련 보도로 채웠다. 청해진 해운과 유 전 회장, 그리고 유 전 회장 일가와 관련 계열사들에 관한 기사도 일곱 꼭지를 차지했다. 정부의 사고 수습 및 대책과 관련해서는 '사고대책본부, 실종자 가족 요구 대부분 수용'과 '정부 장례지원단 구성…24시간 가동'라는 두 건의 보도가 있었다. 이들 기사에서 정부의 사고 수습과 관련한 비판적인 분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26일에는 '오바마 "한국 방어 위해 군사력 사용 주저 안 해"'와 '포사격 지휘 김정은, "전쟁 예고 없다"' 등의 제목으로 정치 기사를 첫머리에 내세웠다. 뒤이어 인천 지역 여객선 선주들의 단체인 '인선회'가 거액 후원금으로 국회에 입법 로비를 한 의혹을 제기한 기사와, 해양 안전을 총괄하는 해양수산부가 선사들로부터 선박 안전 규정을 느슨하게 풀어달라는 요구를 받고 이를 받아준 내용을 지적한 기사를 '단독'으로 내보냈다.

지난 며칠간 공영방송인 KBS의 주요 뉴스에서는 사고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부실한 대처와 안이한 태도 등을 심층적으로 분석·비판하는 보도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청해진 해운과 유 전 회장, 해운조합 등의 뒤를 캐는 자극적인 보도가 주를 이뤘다.

이는 보수 신문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보수 신문들은 급격하게 기사 방향을 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마이뉴스> 보도(조중동, '구원파' 도배... '박근혜 구하기' 시동 거나)에 따르면, 유 전 회장이 보수 언론에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조선일보>가 1면 기사로 "유병언 전 회장 일가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인천지검 특별수사팀이 횡령, 배임, 탈세, 국외재산 도피 등 6가지 혐의를 잡고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등의 내용을 보도한 지난 23일부터라고 한다.

4월 26일에는 <조선일보> 1면에서 처음으로 진도와 안산 소식이 빠지는 대신 인천지검 특별수사팀이 유 전 회장을 소환한다는 내용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정부 비판 기사 비중이 줄면서 정부 비판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물타기'가 아니냐는 비난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유 전 회장 수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점은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주요 언론들의 이런 행태는 예견된 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5일, 국내 주요 언론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제공한 '해양사고(선박) 위기관리 실무 매뉴얼'상의 '충격 상쇄용 기사 아이템 개발' 내용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해양수산부(해수부)가 지난해 6월 작성했다는 이 매뉴얼은 선박 침몰·충돌 사고시 실무 부서가 언론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해양 사고 관련 정보를 국민들에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리는 것보다 언론 플레이를 하려는 것으로 의혹을 받은 이유다.

해수부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온라인 <정책브리핑>의 '정책뉴스'를 통해 '기사 아이템 개발'이, 선박사고의 본질과 달리 사회에 미칠 수도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해 보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해수부는 비판이 거세지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홈페이지에 공개된 매뉴얼 상의 언론 대응 관련 문구를 즉각 삭제했다고 한다.

이번 매뉴얼 논란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평소 친정부적인 언론과 정부 사이의 공공연한 유착 관계를 전제하면 특별히 이채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를 두둔하거나 비호하기 위해 스스로 눈치껏 보도하는 기성 주류 언론의 보도 행태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해수부의 '충격 상쇄용 기사 아이템 개발' 매뉴얼 논란이 있기 며칠 전인 지난 21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모두발언에서 '대언론 협조 요청' 발언을 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언론과 방송의 역할'이 국민들과 희생자 가족들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분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실 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시기를 당부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발언은 언론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신중하고 차분한 보도를 주문하는 원칙적인 메시지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 한 마디가 갖는 중대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발언 취지도 해수부의 매뉴얼이 의도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공교롭게도 박 대통령의 이 발언이 나온 이후부터 언론들은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과 유 전 회장, 해운조합 등에 대한 기사 비중을 급격하게 늘리기 시작했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과 관련하여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이준석 선장, 밥 잘 먹고 잠도 잘 자'와 같은 유의 기사가 그것이다.

KBS는 지난 23일, 세월호 참사 관련 뉴스특보의 신뢰도 문제와 관련하여 보도자료를 통해 해명했다. 이 보도자료에서 KBS는 "재난방송 주관방송사로서 피해자 가족을 위로하고 사회안전망 구축과 점검에 적극 나설 것"이라며 "재난방송 보도준칙에 의거, 올바르고 정확한 재난방송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밤을 지새우고, 뛰어다닌 KBS 기자들의 열정과 투혼을 부정하지는 말아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KBS는 아직도 '기자들의 열정과 투혼'이 가져온 문제를 깨닫지 못한 것일까. KBS는, 구조당국을 인용해 "선내 엉켜 있는 시신 다수 확인"이라는 특보를 내보내 논란이 인 것과 관련하여 "다소 정제되지 못한 표현으로 논란을 일으킨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속보 처리에 더욱 신중을 기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들 스스로 열정과 투혼보다 신중한 사실 확인이 더 필요함을 인정한 것이다. 시청자와 국민들 앞에서 유감 정도가 아니라 진심 어린 사과를 했어야 하는 이유다.

주지하다시피 KBS는 재난방송 주관방송사다. KBS는 예의 보도자료를 통해 사회안전망 구축과 점검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사회안전망 구축과 점검은 무엇보다 정부의 몫이 크다. KBS는 대형 재난이나 참사 시 사회안전망 구축과 점검에 소홀한 정부를 질타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데 힘써야 한다. KBS 기자들의 열정과 투혼이 쏟아져야 하는 대목도 바로 여기가 아닐까.

언론이 '기레기'('기자 쓰레기'의 준말)로 조롱을 받는 데 국내 대표 언론인 KBS의 책임이 얼마나 되는지 겸허하게 되돌아봐야 할 일이다. 그들이 스스로 치켜세운 기자들의 열정과 투혼이 정작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들과 일반 국민들에게 짜증과 분노로 다가올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케이비에스, #기레기, #보수 언론, #박근혜 대통령, #대언론 협조 요청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