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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예수>는 독일의 신약성서학과 남미의 해방신학을 동시에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 김근수 씨의 역작이다. 그리스도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복음서로 알려진 '마태오복음' 해설서다.

마태오복음을 모르면 그리스도교를 알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그리스도교 교리와 영성, 신심 등의 차원에서 그리스도교가 마태오복음에 크게 의지했다는 뜻이다. 마태오복음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해설서가 중요해지는 배경이다. 그런 점에서 김근수의 <행동하는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참 모습과 예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려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행동하는 예수> 책표지.
 <행동하는 예수> 책표지.
ⓒ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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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본문은 성서해설의 일반적인 체제를 따른다. 마태오복음의 전체 28개 장은 '예수의 유래'와 '예수와 고난의 땅 갈릴래아', '예수와 저항의 땅 예루살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네 개의 장으로 나뉘었다. 이들 네 개의 장은 절에 해당하는 각각의 소제목 아래에 마태오복음 본문의 절들과 이에 대한 저자의 성서신학적인 해설, 주관적인 논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 체제는 성서신학 특유의 정밀한 고증과 치밀한 해석, 이를 바탕으로 한 저자의 날카롭고 거침없는 논평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다. 넓은 범위에 걸쳐 독파했을 게 분명한 문헌과 텍스트 자료들, 이들에 대한 꼼꼼한 분석 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쉽게 쓸 수 없는 체제이기도 하다. 그만큼 저자가 자신의 성서해석에 대해 강한 자신감과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가 주목하는 마태오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부제에 잘 담겨 있다. 불의에 저항한 예수가 바로 그것. 책 제목이 '행동하는 예수'가 된 것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마태오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을 저자는 어떻게 그리고 있나. 저자에 따르면,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기 위해 부자들과 결별했다. 마태오는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신자라기보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저자는 가난한 사람이 그리스도교의 중심이요 신학의 주체라고 말한다.

저자는 마태오복음의 예수가 가르치고 행동하는 점에 주목한다. 가르치면서 행동하고, 행동하면서 가르치는 예수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행동을 믿음보다 우선적으로 보는 마태오복음 저자의 신학에 따라 행동하는 예수가 가르치는 예수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 행동하는 예수를 최초의 현장신학자로 부르는 이유다.

예수의 모습이 좀 더 집중적으로 돋보이는 장소가 곧 현장이다. 현장은 예수가 활동하는 곳이자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드러나는 곳이다.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이 만나는 신학적 장소 또는 삶의 자리가 곧 현장이다. 이러한 신학의 장소를 뒷받침하는 신학을 나는 '현장신학'이라고 부르겠다. (10쪽)

그러므로 저자에게 마태오복음은 예수의 현장신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마태오복음에서 저자가 읽어내는 현장신학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먼저 신학의 장소가 교회 안을 벗어나야 한다. 교회 안이 아니라 거리, 광장, 시장, 시위 장소 등 고뇌와 갈등이 어우러진 곳으로 가라는 말이다. 저자에게 교회는 세상의 고통을 그저 방관하는 이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악을 비판하고 저항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래서 현장신학은 예수를 교회 안에 가두려는 온갖 종교적 음모에 반대한다고 규정한다.

현장신학은 죽음 이후의 세상에 주목하는 그리스도교의 일부 풍조에도 반대한다. 죽음 이후의 삶보다 죽음 이전의 삶, 즉 죽음 이전의 사실상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삶 속의 십자가'를 보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식이다.

그래서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부당한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일을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에 주어진 두 가지 중요한 임무로 규정한다. 합법을 빙자한 국가폭력이 현장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가 시간과 공간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의 세력에 저항했다고 본다. 개인 차원의 추상적인 죄악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귀담아들어야 하는 말이 아닐까.

저자는 책 곳곳에서 공부하지 않는 성직자들의 불성실하고 오만한 태도, 성서의 원래 맥락과 무관하게 자신의 욕심과 의도에 맞춰 성서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인들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성서가 쓰인 시대 상황을 잘 모르면서 성서를 해석하면 성서 메시지를 본문이 실제로 의도한 바와 다르게 강조하는 위험에 마주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예수의 직업은 목수, 전문직이었다

이와 관련된 예를 몇 가지 보자. 예수의 첫 번째 제자가 된 베드로는 어부였다. 예수는 직업이 목수였다. 당시 목수는 어부보다 훨씬 더 대접받던 직업이었다고 한다. 전문직 중산층에 속하는 호평 받는 일자리였다. 반면 어부는 농부처럼 하층 직업에 속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성직자가 목수는 가난한 직업이었다고 설교한다. 가난한 하층 직업에 속하는 어부를 제자로 둔 예수를 자기 멋대로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신자들이 이런 멍청한 설교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것이냐며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서 탐욕스러운 위선자의 대명사가 된 바리사이파에 대한 해설도 눈길을 끈다. 바라사이에 대한 저주가 중심 내용인 마태오복음 23장은 15세기경까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6세기경 인쇄술 발달에 따른 성서번역 덕택에 많은 이가 성서를 읽게 되면서 바리사이는 위선자의 비유를 넘어 아예 위선자가 되기에 이른다.

저자는 바리사이가 그리스도교에서 오늘도 가장 흔히 쓰이는 언어폭력의 대명사라고까지 말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교회 안에서 바리사이에 대해 공정한 가르침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역사적인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마태오복음에는 바리사이와 마태오 공동체 사이의 갈등과 분열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분열의 당사자요 목격자인 마태오는 유다교와 분열하는 과정에서 겪은 개인적 아픔과 분노를 숨기지 않고 있다. 마태오복음은 분열의 당사자가 쓴 분열의 기록이다. ··· 예수는 유다교 여러 그룹 중에서 바리사이파에 가장 가깝다. ··· 그러나 예수는 바리사이파에 가담하지 않았다. 예수는 유다교 분파 중 어느 한 곳을 택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유다교 어느 분파도 가난한 사람을 환영하지 않았다. 예수 그룹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626쪽)

저자에 따르면, 유다인 박해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저지른 유럽 그리스도에서 바리사이에 대한 저주를 담고 있는 마태오복음 23장은 이제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마태오복음 23장은 성서학자들도 감히 언급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이에 저자는 설교자들이 바리사이를 아주 조심해 쓰거나, 가능하면 차라리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이 책 곳곳에서 한국의 그리스도교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차가우면서도 뜨겁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심이 깊어 보인다는 말이다. 저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통 받는 모습에서 예수가 저항하는 모습을 떠올려야 함을 강조한다. 부패한 제도나 불의한 권력에서 오는 고통을 참으라고 설교하는 성직자들을 사기꾼에 빗대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가, 오히려 교회 안이 복음화가 덜 된 커다란 문제에 부딪혔다는 점도 저자가 날카로게 꼬집는 문제다. 돈과 세속적 권력에 집착하고, 신자 수를 늘려 교회를 크게 하는 데 몰두하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적나라한 현실이 새삼스럽다. 교회 밖 선교도 중요하지만 교회 안 선교가 더 시급하다는 저자의 역설적인 주장이 크게 다가온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는 불의한 세력에게 저항하다가 정치범으로 처형당했다. 이것이 뜻하는 게 뭘까. 저자는 성서를 교양서적으로 축소하는 요즘 유행에 속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성서는 힐링을 꾀하는 책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라고 권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에게 배워서 예수처럼 행동하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에는 행동 없는 가르침은 공허하고, 가르침 없는 행동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식 어법이 여러 번 인용된다. 해석하는 종교가 아니라 행동하는 종교이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려는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 밖으로 나가라'라고 말했다. 교회 밖으로 선교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포섭하라는 말일까. 결코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신앙적인 차원의 선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 교회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다. 저자의 말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지 교회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성당과 교회가 세속적으로 큰 권세를 가진 이들에게 중요한 직분을 맡긴다. 말 잘 듣는 가난한 평신도 백 명보다 돈 많은 장로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성직자들도 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에게 교회와 성당 문턱은 너무나도 높다. 가난하지 않은 성직자들의 설교에는 예수의 핵심 주제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불의한 세력에게 저항하는 행동하는 예수를 그렸던 마태오가 우리나라의 그런 그리스도교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

덧붙이는 글 | <행동하는 예수>(김근수 지음 / 메디치 / 2014. 2. 25. / 798쪽 / 28,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김근수 지음, 메디치미디어(2014)


태그:#<행동하는 예수>, #김근수, #메디치, #마태오복음, #현장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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