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어 교육의 기본은 글을 읽는 것이다. 학습자가 좋은 글을 읽으며, 독해력과 사고력을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국어 발전과 문화 창조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어 교육의 목표이다. 그런데 교육부의 검정을 통과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들에는 원문의 일부를 삭제하거나 고친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교과서의 글들은 대부분 본래 교과서에 싣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다른 매체에 발표된 글들 중에서, 교육부의 '교과서 집필 기준'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교과용도서 편찬상의 유의점 및 검정기준'에 적합한 글을 선정한 후, 교과서 편찬 체제에 맞추기 위해, 원문의 일부를 삭제하거나 고쳐서 교과서에 실은 글들이다.

현재의 국어 교과서 편찬 체제로는 단편 소설도 전문을 싣기 어렵다. 현재 고1이 사용하는 한 국어 교과서는 김유정의 소설 <만무방>을 '앞부분 줄거리 → 소설 원문 → 중간 부분 줄거리 → 소설 원문'의 순서로 실었다. 원문을 싣지 않고 줄거리로 대체한 분량은 전체 소설의 약 40%에 해당한다.

설명문, 논설문 등의 비문학 글들도 전문을 싣기 어렵다. 다음에서 보듯이 국어 교과서는 설명문인 손화철의 '정보의 바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의 일부분을 삭제하여 실었다. 파란색 글씨로 표시한 부분은 원문의 '예시'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교과서에서 삭제했다.

-> "나아가 인터넷 상에서는 익명성이 상당 부분 보장되기 때문에 유형·무형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나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거칠고 폭력적인 언사도 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 사기사건 당시 '브릭'이라는 웹페이지에서 젊은 과학도들이 올린 익명의 제보들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던 것은 전자의 예이고,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피랍된 한국 종교인들이 피살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일부 네티즌들의 댓글은 후자의 예이다."

다음을 보면, 국어 교과서가 표현을 고친 경우도 있다.

-> "웹에는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게 되는 하이퍼링크 기능이 있어서 전쟁으로 죽어가는 아이의 이야기에서 몇 번 만에 포르노 사이트로 이동하는 것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위 원문의 파란색 부분을 "아이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몇 번 만에 쇼핑몰 사이트로 이동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로 고쳐서 교과서에 실었다.

한편,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에 출제된 글들도 기존에 발표된 글들 중에서, 출제에 적합한 글을 선정하여 일부 삭제하거나 고친 글들이 많다. 수능을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각종 문제집들도 수능 국어영역을 기준으로 만들므로 이와 같은 글들이 많이 실린다.

특히, 원문의 일부를 삭제한 글은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좋은 글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글이기 때문이다. 즉, 완결성(내용을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게 서술하는 것)과 응집성(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이 논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을 갖춘 좋은 글일지라도 일부를 삭제하면, 완결성과 응집성이 약화되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가 있는 글들로 학습하면서, 독해력과 사고력이 향상되기를 기대하고, 국어 교육의 목표가 달성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량 식품을 먹으면서 건강해지기를 기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원문의 일부를 삭제하거나 고친 글로 교과서를 만드는 현 상황을 시급히 해결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원문을 일부 삭제한 글에는 삭제했다는 표기(전략, 중략, 후략)를 명확히 하고, 원문을 학생과 교사가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교과서에 실린 글들은 글쓴이와 출처는 표기하지만, 글의 일부를 삭제한 경우, 그 사실을 대부분 표기하지 않고 있다. 어느 부분을 삭제한 글인지 알고 독해하는 것과, 모르고 독해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므로 삭제했다는 표기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원문을 구해 읽고 싶어도 시중에서 원문이 실린 책을 구입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구입할 수 있더라도 글 1편을 보기 위해, 책 1권을 구입해야 하므로 경제적 부담이 크다. 책값에는 글쓴이에게 지급되는 저작권료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책을 구입한 사람들에게 일부 삭제하거나 고친 글만 제공되고 원문이 제공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교과서나 문제집을 발행하는 출판사는 인터넷(홈페이지)을 통해 원문을 제공하거나, CD에 원문을 수록하여 책과 함께 판매하거나, 책 뒤에 부록의 형식으로 덧붙이는 등의 방법으로 책을 구입한 사람들에게 원문을 제공해야 한다. 더 이상 일부 삭제하거나 고친 글에 국어 교육이 멍들지 않도록, 삭제했다는 표기와 원문 제공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태그:#국어, #교과서, #삭제, #지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