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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섭양복점> 간판이 다시 걸렸다.

아니, '다시'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지 모른다. 김복섭양복점이 생긴 이래 37년동안 그 이름이 지워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맞춤수요가 크게 줄면서 <보스턴매너>라는 이름으로 바꿔 반기성(시스템오더) 제작방식을 도입했을 때도, 그 뒤 <화산세탁소>로 간판을 올렸을 때도 귀퉁이 어딘가에는 늘 '김복섭양복점'이라는 작은 글씨가 존재했다. 그렇게 명맥을 이어오던 김복섭양복점이 이번엔 화산세탁소를 귀퉁이로 밀어내고 간판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아는대로 양복시장의 판도가 달라져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예산군의 간판정비사업 과정에서 김복섭(63) 사장이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양복점 간판을 크게 내건 것이다. 11년만의 일이다.

"마누라 그만 고생시켜야지. 세탁소 일은 아무래도 나보다 마누라 손이 더 가요. 어깨 빠지고 허리 부러지고…. 손님들이 '세탁소 문 닫은거냐'고 물어본다고 마누라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나는 오히려 당장이라도 양복만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속상해요"

김 사장은 거절 못하는 자신의 성격 탓에 좋은 기술로 모은 재산을 남 좋은 일에 날려버려 40년 가까운 세월 함께 살면서 고생만 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먼저 꼽는다.

명동에서 갈고 닦은 기술

 “양복기술의 최고는 재단이다” 원단 위 제도 배치가 끝나자 초크와 자를 든 김복섭 사장의 손이 춤을 추듯 움직인다.
 “양복기술의 최고는 재단이다” 원단 위 제도 배치가 끝나자 초크와 자를 든 김복섭 사장의 손이 춤을 추듯 움직인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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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양복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제대로 배운 '양복장인'의 자부심과 못다한 꿈이 묻어난다.

"열다섯살 때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양복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국민학교만 졸업하는 사람이 숱했는데 그러고 나서 이발소나 양복점, 정비공장에 취직하면 성공하는 거였죠.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던 시절이었으니까"

시작은 천안에 있는 미술양복점에서였다. 그러다가 열일곱살 되던 해에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생각에 명동으로 진출했다.

"내가 못배워서 기술에 대한 욕심이 많았어요. 양복쟁이한테 명동은 서울대나 마찬가지였죠. 최고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만큼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는데, 휴스턴양복점이라고 잘 나가던 곳 사장이 예산사람이었고, 거기 일하던 대한민국 최고의 이용화 선생님도 고향이 예산이었어요. 그렇게 인연이 돼서 배우는데 선생님이 참 이뻐하셨죠. 남들 1~2년 배울 거 한달만에 배운다면서"

그는 거처할 곳도,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지만 힘든 줄 모르고 지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명동에만 양복점이 수십군데 있던 때였는데, 기술 좋은 사람 중에 예산사람이 많았단다. 이후 다른 양복점으로 옮겨 기술을 더 배우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1973년 유류파동으로 원단값이 오르자 문을 닫는 양복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원래 우리 일이라는게 아주 단순한 심부름부터 시작해서 기술을 하나 하나 익혀가다가 맨 마지막에 재단을 배우는 거예요. 양복쟁이들이 양장점 같은데로 빠져나가기 시작했지만 나는 재단을 배우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수선일을 하면서 또 선생님을 찾았죠. 세계기능대회 나가 금메달 따는 게 꿈이었는데 재단까지 다 배우고 나니 자격기준인 스무살이 넘어버리대요"

'김복섭' 하면 최고 기술

 “양복쟁이는 가위 하나로 먹고산다” 30년 넘게 쓰고 있는 가위를 보여주는 그의 손등과 손가락 마디에 못이 박혀있다. 가윗날 두개를 연결하는 부위의 쇠가 닳아진 것은 당연하다(왼쪽). 35년된 어깨자. 정확한 치수를 위해 그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수십년된 대나무 곡자, 표면이 닳아 뭉개진 쇠로 만든 격자같은 것들이 50년 가까운 그의 경력을 증명해 주고 있다(오른쪽).
 “양복쟁이는 가위 하나로 먹고산다” 30년 넘게 쓰고 있는 가위를 보여주는 그의 손등과 손가락 마디에 못이 박혀있다. 가윗날 두개를 연결하는 부위의 쇠가 닳아진 것은 당연하다(왼쪽). 35년된 어깨자. 정확한 치수를 위해 그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수십년된 대나무 곡자, 표면이 닳아 뭉개진 쇠로 만든 격자같은 것들이 50년 가까운 그의 경력을 증명해 주고 있다(오른쪽).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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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든 옷은 지나가다 봐도 한 눈에 안다”는 김복섭씨. 마침 세탁을 맡은 자신의 ‘작품’ 안쪽에 붙여진 상표를 보여주며 설명하는 그의 표정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내가 만든 옷은 지나가다 봐도 한 눈에 안다”는 김복섭씨. 마침 세탁을 맡은 자신의 ‘작품’ 안쪽에 붙여진 상표를 보여주며 설명하는 그의 표정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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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스물두살 때 부모님 곁으로 돌아온 그는 광시에서 <휴스턴양복점>을 열고 직접 운영을 시작했다. 기술자를 3명이나 두고 학생복도 함께 하면서 호황을 누렸다.

"나는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작품을 한다고 했어요. 명동에서 제대로 배운 기술은 사람들도 금새 알아봤고, 내가 양복을 만들어 입고 나가면 명동스타일이라고 소문이 파다했죠. 그런데 한 1, 2년 하다보니 명동으로 다시 가고 싶더라구요"

가게를 정리하고 서울에 가려고 예산읍내에 나왔다가 주저앉은 게 지금 김복섭양복점 맞은편에 있던 대동양복점이다. 잠깐 도와달라는 부탁에 시작했다가, 기술을 알아보고 놓아주지 않는 사장의 청을 뿌리치지 못한 그는 여러 해 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양복점을 내게 된다.

"처음엔 삼산약국 사거리에 있던 해태집에서 시작했어요. 와이셔츠니 뭐니 혼자서 다했죠. 지금은 양복점이 쪼그라 들었지만, 당시만해도 하루에 7~8벌까지 주문이 들어왔죠. 다들 양복을 입던 때였고, 결혼할래도 기본 세벌은 했으니까. 양쪽 아버지거랑, 신랑거. 신랑양복은 겨울, 여름꺼 한 벌씩에 코트까지, 많이 하면 다섯벌까지 들어오던 때였죠"
그 뒤 현재의 자리로 옮겨 33년째다. '김복섭'하면 예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양복점은 "과장급 이상 기관장들만 가는 곳"으로 유명했다. 전국양복복장기술협회 예산군지부가 운영되던 때에는 총무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1987년에 전국대회에 나가 받은 우수상과 협회일을 하면서 받은 표창패는 지금도 한쪽 벽면에 걸려있다.

다시 전성기가 오기를...

양복점에서 세탁소, 다시 양복점으로. 정면간판과 돌출간판, 입간판의 내용이 서로 다른 모습에서 양복점의 성쇠와 꺼지지 않는 장인의 열정이 읽힌다.
 양복점에서 세탁소, 다시 양복점으로. 정면간판과 돌출간판, 입간판의 내용이 서로 다른 모습에서 양복점의 성쇠와 꺼지지 않는 장인의 열정이 읽힌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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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양복점이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도 유지되던 양복점들이 도미노폐업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이엠에프라고 한다. 예산군내에 40~50곳이나 있던 양복점들이 문을 닫거나, 세탁소로 전환해 수선일을 함께 하면서 사그라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현재 양복점 간판을 중심에 두고 있는 곳은 5곳 뿐이다.

"사실 저도 재산을 잘 지켰으면 양복점만 하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을텐데 '사람 좋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저희집에서 꼭 양복을 맞추는 단골손님들이 계셔서 손을 놓지는 않았죠"

김복섭양복점에는 최근 10년 이내에 방문했던 고객들의 본(제도)이 보관돼 있다.

"입었을 때 편하면서도 멋스런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몸의 치수를 재는 것부터 까다로워요. 앞진동, 뒷진동, 앞품, 뒷품, 총장, 허벅지, 뒤등품 등등 다 따로 따로 20개 정도를 재죠. 저는 수평을 정확히 재기 위해 물호스도 활용하고 어깨를 재는 줄자도 직접 만들어 쓰는데, 그게 다 몸에 더 잘 맞고 편한 옷을 만들기 위해서예요. 거기에 맞춰 제도를 하는 게 최고의 기술이죠. 그거할 때는 누가 말시켜도 몰라요. 계산하면서 집중 해야하기 때문에 사람있으면 아예 손을 놓고 안하죠. 그러고도 가봉을 하면서 혹시 모를 불편함을 또 없애야하고. 그렇게 만든 옷을 손님한테 입혀놓고 느끼는 기분, 양복쟁이 아니면 모를걸요?"

지금까지도 어딜가나 유난히 사람들 입은 양복을 보게 되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 유행경향도 예측된다고 하니 천직인가보다.

"내가 원래는 여름에도 짧은 소매를 안 입고 늘 넥타이를 매고 살았어요. 양복쟁이는 그게 기본이거든"

간판만 다시 걸었을 뿐, 아직 양복점 분위기를 갖추지 못한 게 아쉽다며 그가 자꾸 세탁소 기계들을 둘러본다. 하지만 보통 자신감이 아니면 자기 이름을 내걸지 못하는 법, 그의 말대로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김복섭양복이 21세기에 다시 전성기를 맞을 수 있기를 빌어본다.

"양복은 예술입니다. 입어서 멋있어야죠. 몸에 잘 맞고 편안하면서 멋스런 옷. 그런걸 보고 '딱 떨어진다'고 하는 거예요. 하하"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김복섭양복점,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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