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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은 예술인들이 많이 모이는 도시다. 집을 나서면 각종 공연 포스터를 만날 수 있다. 개성 있는 공연 장르와 다양한 공연장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베를린은 서유럽에서 생활비가 가장 덜 드는 도시기 때문에, 예술인들에겐 매력적인 도시일 수밖에 없다.

한국에선 흔히 '연극'이라 불리는 '무대 드라마' 장르도 매우 다양하다. 최근 베를린 샤우뷔네(Schaubühne) 극단에서 'F.I.N.D. 2014'라는 페스티벌을 열었는데, 그중 <미트(MEAT)>라는 드라마가 주목을 받았다. 이 드라마가 특히 눈길을 끈 이유는 240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공연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240시간, 열흘 동안 쉼 없는 공연이라니... 그게 가능할까?

폭발하는 궁금증을 억누를 수 없었던 난, 지난 5일 오후 5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편의점, 술집, 호스텔 세트가 모두 드라마 무대?

무대의 입구가 되는 독일식 편의점(Spatkauf)/인터넷 카페
 무대의 입구가 되는 독일식 편의점(Spatkauf)/인터넷 카페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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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검사를 받은 후 입구를 통과하니, 해골마스크를 쓴 이들이 나를 맞았다. 독일식 편의점(Spatkauf)을 지나 무대 중앙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그곳엔 인터넷카페, 술집, 네일살롱, 분식집, 호스텔, 보석점, 고고바(Gogo bar) 등으로 이루어진 무대가 있었다. 그랬다. 평소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무대 위 연극이 아니었다.

술집에서는 맥주 및 음료를 주문하면서 배우들 혹은 관객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등 참여할 수 있고, 가끔 공연도 했다. 방 한 칸 크기의 고고바에서는 맥주를 마시면서 댄서들의 봉춤을 감상할 수 있고, 작은 방 크기의 분식집에서는 음식을 주문해 먹을 수도 있었다. 단칸짜리 방들 및 고고바 댄서 대기실과 같은 곳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유기적으로 구성된 각각의 무대에서 배우들이 열흘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캐릭터로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구조다. 또 나를 비롯한 관객들도 무대에 들어가 4시간 동안 자신의 캐릭터를 바탕으로 드라마를 구축해 갈 수 있다. 따라서 드라마의 전개 방향도 다양하게 진행될 수 있다.

무대 주위로는 카메라도 여러 대 설치돼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무대를 감시하는 빅 브라더 구조라고 해야 할까? 배우들끼리 서로 대화하는 것과 관객들과 배우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또 배우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배우들끼리 혹은 제3자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광경도 볼 수 있다.

호스텔에서 한 청년을 만났는데, 미국 국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다. 미국에서 왔냐고 물어보니까 사실은 캐나다에서 왔고, 이름은 커크 브래이던(Kirk Braydon)라고. 나도 사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살았다고 하니 반가워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오란다. 캐나다에서 어떤 일을 했냐고 물어보니, 마술공연을 했었다면서 연필을 이용한 마술을 보여준다. 그리고 곧 있으면 무대 중앙과 술집에서 공연하니, 보러오란다.

240시간 동안 배우-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무대

마술을 선보이는 커크 브래이던(Kirk Braydon)
 마술을 선보이는 커크 브래이던(Kirk Braydon)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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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가 술집에서 마술공연을 하는 동안 눈에 띄었던 친구는 제레미(Jeremy Weber). 같이 동석했던 독일기자와 함께 어린이용 공룡서적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마침 나도 전에 '코레아노사우루스(koreanosaurus, 실제 공룡학명이다)'에 관하여 지난 번 읽은 글이 있어서, 한국의 공룡 얘기를 해주었다. 인터넷 카페에 가서 코레아노사우루스에 대한 위키디피아를 보여주니, 페이스북 친구를 맺자고 제안한다. 흔쾌히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수락하고 위키디피아 정보를 링크해주니 상당히 만족해한다.

술집으로 다시 돌아가니, 바텐더로 일하는 중년 여성이 앞서 내가 만난 제레미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했다. 제레미 어머니(Jaqueline Warembourg-Weber)는 내가 아들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상당히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드라마 <미트>는 이처럼 배우들과의 대화를 통해 관객들이 스스로 이들을 알아갈 수 있는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무대 속 가공의 인물로서 이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었다. 

이 인물들 말고도 특이한 차림의 인물들도 있었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고고바 남녀댄서, 보석점 사장, 백수같이 보이는 아저씨, 인터넷 카페 아르바이트생 등등의 여러 캐릭터들이 존재했다. 내가 관람했던 시각이 오후 5시였기 때문인지, 대체로 화기애애했다. 그래서 드라마와 IT의 크로스오버 그리고 배우와 객석 간의 벽이 허물어진 새로운 장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후 9시 공연에 갔던 지인의 경험은 나와 전혀 딴판이었다. 실제로 싸우고, 때리고, 희롱하는 광경이 펼쳐졌단다. 즉 배우들을 도발하는 관객들이 있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본인에게 부여된 캐릭터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위험을 느껴 무대 밖으로 뛰쳐나간 배우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특이한 드라마는 감독이 배우들을 직접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벌어지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닌 듯했다.

미니어처로 만들어진 무대서 배우-관객 소통

<미트> 무대에 서는 유일한 한국인 배우 하지운씨는 240시간 동안 네일아트 살롱 사장 역할로 열연한다.
 <미트> 무대에 서는 유일한 한국인 배우 하지운씨는 240시간 동안 네일아트 살롱 사장 역할로 열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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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시간 동안 공연을 이어간다는 점 외에 내가 <미트>를 흥미롭게 본 이유 중 하나는 배우 중에 한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하지운씨를 만나 <미트>란 드라마의 의미와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 안녕하세요. 이번에 샤우뷔네 극단에서 하는 F.I.N.D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베를린에서 매년 진행되는 영향력 있는 드라마 페스티벌이에요. 이번에는 18개 작품이 초청되었는데, 독일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작가들의 작품도 초청될 정도로 국제적인 규모지요."

- 드라마 <미트>의 내용이 궁금합니다.
"공연을 보시면 알게 되겠지만, 무대랑 객석이 구분되는 기존 드라마 구조가 아니에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설치(installation)'라고 할까요. 한 마디로 다른 세계죠. 베를린의 어느 한 동네를 미니어처(miniature)화 해서 수많은 공간에서 배우들이 관객들과 소통하는 구조로 된 드라마랍니다. 미니어처 공간은 술집, 나이트클럽, 아파트, 독일식 분식집(Imbiss), 네일살롱 등으로 구현되어 있어요."

- 드라마 제작에 영감을 받았던 사건이 있었나요?
"루카 마그노타(Luka Magnotta) 살인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는 유명한 배우가 되고자 하는 큰 꿈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성형수술에 집착했고 외모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했죠. 하지만 현실은 그의 뜻대로 잘 안 풀렸고, 그래서 잘못된 집착에 빠지게 돼요. 대중의 관심을 원했던 그는 처음엔 고양이를 죽이는 동영상을 찍어서 유튜브에 올렸어요. 이는 캐나다 동물보호단체의 반발을 가지고 오지요.

대중의 이런 관심을 이상하게 해석한 그는 동물을 죽이는 영상을 계속 올리다가 결국 중국인 유학생을 살해하는 과정을 녹화해서 유튜브에 올려요. 루카 마그노타는 페이스북 및 여러 소셜미디어를 조직적으로 운영했었고, 심지어는 그를 옹호하는 팬 페이지도 있었어요. 이에 착안하여 감독(Thomas Bo Nillson)님이 작품을 짜신 것 같아요. 작품 속의 60명의 배우들은 루카 마그노타의 세계를 투영한 것이지요. 마치 드라마와 IT의 결합이라고 할까요."

루카 마그노타는 범행 이후 파리로 도피하다가 베를린에서 체포된다. 그가 체포당한 곳이 바로 베를린 노이쾰른의 인터넷 카페였다. 이 드라마의 무대는 당시 체포 현장 및 범행 현장 그리고 그의 삶의 무대를 미니어처로 구현한 것이다.

- 240시간 동안 공연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저도 사실 40~60시간 공연을 반복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240시간 동안 라이브로 진행하는 공연이에요. 240시간 공연의 풀 시나리오 작성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60명의 배우들에게 이름, 나이, 직업, 가족관계, 캐릭터 특성과 같은 필수적인 요소만 주어집니다. 이를 바탕으로 관객들과 소통하며 즉흥연기를 해 나가는 구조예요. 지난 4개월 동안 연습 및 리허설을 통해 피드백을 받으면서 배우들은 구체적으로 캐릭터를 구축해 나갔지요. 하지만 관객들이 무대 안으로 들어와서 배우들과 소통하며 참여하기 때문에 드라마가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어요."

드라마와 IT의 만남...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

<미트>는 섹슈얼리티 및 성인클럽에 대한 내용도 다루고 있어서 16세 이상 관람가다.
 <미트>는 섹슈얼리티 및 성인클럽에 대한 내용도 다루고 있어서 16세 이상 관람가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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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맡은 역할은 어떻게 되나요?
"한국인 뷰티살롱 사장이에요. 북한에서 탈출해 중국에서 독일 유학생과 결혼한 다음 독일로 온 여자예요.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만, 아메리칸드림을 강하게 꿈꾸는 인물이지요. 이름이 너무 촌스러운데, '매춘애'예요. 이름의 의미가 성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라고 하니까, 오히려 더 부각될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채택하셨지요.(웃음)"

- 240시간 공연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는데, 휴식이나 잠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우리 공연은 상당히 열려있는 구조예요. 240시간 논스톱(Non-stop)공연 참여여부도 배우들이 자발적으로 결정했는데 생각보다 많았어요.(20여명) 그리고 치밀하게 짜인 시프트(각각의 시간에 배우들이 해야 할 일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음)를 바탕으로 공연에 임하지요. 휴식해야 하는 경우 자연스럽게 쉬거나 취침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요.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은 실시간으로 인터넷에서 누구나 볼 수 있지요. 그래서 감독님이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을 누군가는 반드시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진지하게 임하라는 것이에요. 다만 무대 내에서 개인 핸드폰 및 개인물품의 이용은 금지됩니다. 오로지 무대에서 주어지는 핸드폰 및 도구 그리고 무대의상만 입고 240시간 동안 연기에 임해야 하지요. 심지어 속옷도 제공받은 걸 입어야 해요."

- 이 드라마엔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건가요?
"배우가 뻔 하죠. 캐스팅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제출하고 인터뷰를 했지요. 950명의 배우 중에 60명이 선발되었지요. 물론 인터뷰 당시에는 피부로 와 닿지 않았지만, 나중에 큰 프로젝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사실 독일에 와서 연기생활을 시작한 지 겨우 1년 남짓 지난 상황인데, 저에게는 굉장한 영광이었지요."

- 한국에서도 배우지망생이었나요?
"원래는 조경가였어요. 5년간 회사에 다니기도 했고요. 하지만 연기자는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요. 다만 집안이 보수적이었기에 이를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었죠. 그래도 학교 졸업작품에도 참여했고 및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했던 시민연극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베를린에는  2011년에 지인을 만나러 왔다가 분위기가 좋아 지난해 3월 워킹비자를 받아서 왔어요. 베를린에서는 독립영화를 찍기도 했고, Bondage Fairies의 'Head On'이라는 뮤직비디오 촬영에도 참여했지요."

개인적으로 그동안 드라마를 접할 수 있었던 기회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크로스오버 드라마가 베를린에서 많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아직까지 전문가 수준으로 해석하기는 참 난해하지만, 드라마와 IT의 융화, 연기자들의 열연과 관객의 무대 개입으로 인한 긴장감, 빅 브라더형 구조 및 루타 마그노타의 세계를 반영한 미니어처 등 여러모로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 건 사실이다. 


태그:#미트, #베를린, #샤우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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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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