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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임'은 과연 누구인가?"

급기야 저들의 속내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선거철만 되면 대한민국을 이끈 두 바퀴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라며 웅변하더니만, 저들은 결국 목숨 바쳐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했던 민주화 세력을 대놓고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수언론과의 유착 속에 '유신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가 현실화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저들은 5·18 민주화운동 정신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이 명실상부한 5·18의 대표곡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신군부의 폭압과 부패한 정권에 맞서 '반(反) 정부'와 '반(反를) 체제'를 외친 것이 잘못인가. 주지하다시피,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패한 권력에 맞선 시위대에 의해 불려진 '라마르세예즈'는 현재 프랑스의 국가다.

저토록 폄훼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고 불리게 됐는지 저들이 모르진 않을 것이다.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했고 마지막 날 전남도청에서 최후까지 저항하다 숨진 윤상원 열사와, 1979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야학 교사로 헌신하다 숨진 젊은 대학생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위한 '축가'로 헌정된 노래다.

그 가슴 뜨거운 곡의 의미가 암울했던 '5공' 시절, 대학생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대중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시위를 할 때마다 목 놓아 이 노래를 불렀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혹자는 말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니었다면, 5·18이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데모가'는 곧, '금지곡'이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민중가요'라고 불리던 노래들은 대학생과 노동자, 시민단체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철저히 탄압을 받았고, 보수언론 등 정권의 나팔수들에 의해 '빨갱이 노래'로 왜곡됐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렇게 덧칠된 이미지를 다시 그들 주장의 '근거'로 들이대고 있는 셈이다.

그래놓고선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워낙 강한 반대 여론이 있다'는 식으로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대체 저들이 무슨 근거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 정신과 맞지 않다고 단정하는가. 저들에게 5·18 정신을 정의내릴 권한은 없다. 참혹하게 희생당하고 갖은 고초를 겪은 5·18 민주화 유공자들이 간절히 바라는데, 왜 저들이 토끼눈을 하고 막아서는가.

저들이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른바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갈등을 조장해 분열을 획책하려는 것이다. 5·18은 민주화 운동의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았지만, 저들은 끊임없이 '광주'와 '전라도'라는 이름을 지목하며 고립시키고 비하해왔다. '그들의 임'이라는 도발적 문구에서 저들이 정작 따옴표를 치고 싶은 건, '임'이 아니라 '그들'인 것이다.

"그 노래를 어찌 아느냐"... 타이베이의 승객을 만나다

애국가가 그렇듯, 이 노래 또한 저들의 말마따나 '특정 단체'의 전유물일 수 없다. 작년에 가족과 타이완 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수도인 타이베이에서 인접한 항구도시인 지룽 가는 버스에서 옆에 앉아있던 승객 한 명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그 노래를 어찌 아느냐"고 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흥얼거렸던 모양이다.

대답하기는 커녕 되레 그에게 똑같이 반문했다. "그러는 당신은 이 노래를 어찌 아느냐"고. 본디 한국 노래라고, 또, 한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으스대며 말했다. 중국어와 영어를 반반씩 섞어가며, '멜로디'에 공감하며 오랜 친구인 양 꽤 긴 이야기를 나눴다. 이국땅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재로 현지인과 대화를 나눌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그는 5·18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영혼결혼식'의 축가라는 걸 강조했지만, 그 말 자체를 이해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여하튼 타이완에선 근무조건을 개선해 달라거나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집회가 있을 때 불리는 노래라며 반가워했다. 현재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한류' 바람의 뿌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이 노래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줘야겠다면서, 연신 5·18을 역사에 남긴 대한민국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알 리 없는 타이완 사람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들어 알고 있다는 사실은, 여행 중 가장 큰 충격이었다. 우리나라 보수언론이 이를 겪었다면 뭐라고 적게 될까. 혹, 타이완의 '종북 세력'이라고 명명하지 않을까.

5·18의 역사적 평가는 이미 끝났다. 초중고 교과서의 민주화운동 단원에 표제처럼 실려 있고, 당시 희생된 분들과 이후 민주화운동을 하다 숨진 이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은 국립묘지로 승격된 지 이미 오래다. 몇 해 전 영화 <화려한 휴가>와 <26년>이 개봉되며 이제 5· 18은 우리 국민들에게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저들의 작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외려 법원까지 가세해 집요하고 치졸하게 훼방을 놓고 있는 형국이다. 종편에 출연해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해 고발당한 탈북자들을 법원이 무혐의 처리한 건 그 실례다. 그러면서 '5·18의 역사적, 법적 평가가 확립돼 있어 사회적 평가가 바뀌지 않는다'고 덧붙인 건 차라리 '조롱'이다.

고백하건대, 지금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들려올 때마다 심한 '부채감'에 시달린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것도, 아이들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는 올곧은 교사가 되겠다는 다짐도 그것에 기인한다.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어떻게든 5·18을 흠집 내고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려는 세력들의 도발이 이어질수록,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 기념곡으로 지정되어야할 이유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태그:#임을 위한 행진곡, #5. 18 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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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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