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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좌파'는 여전히 금기어 목록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신을 공공연히 좌파로 소개하는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스스로를 'B급 좌파'로 규정하는 김규항씨 정도가 언뜻 떠오를 뿐이다.

장석준 저자의 말처럼, 분단 체제 아래서 권력자들이 반대파를 공격하는 욕 비슷한 것으로 '좌파'가 통용돼 왔기 때문일 것이다. '좌파 빨갱이'의 줄임말인 '좌빨'이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지를 상기해 보자. 우리 사회에서 '좌파'는 불온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지간한 용기가 없으면 '나는 좌파'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현재 노동당 부대표로 있는 저자가 쓴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는 우리 사회의 이런 일반적인 기류에 반기를 든다. 심지어 세상을 바꾸고 있는 세계의 좌파를 훑으면서 이른바 좌파 정치에 주목하자고 말한다. 저자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대안을 만들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라고 본다.

'신자유주의의 극복', 세계인의 과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책표지.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책표지.
ⓒ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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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주목하는 우리 시대의 최대 문제는 신자유주의다. 저자는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자유주의가 전 인류의 유일 신앙이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보기에 그때까지 지구상의 모든 사회는 초국적 자산시장을 정점으로 한 거대한 피라미드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2008년을 기점으로 '신자유주의 지구화' 신화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자는 지금 세계인이 마주하고 있는 과제를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의 극복이라고 표현한다.

저자는 2008년 이전까지의 40년간을 전지구적인 사회 세력 관계를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해간 구조 개혁의 시기로 본다. 달리 말하면 금융 세력이 지구 자본주의의 최정상부에 복귀해 초국적 금융 과두제를 구축한 반동-혁명의 시기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란 다름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운동 전반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단순한 정책 패키지나 자본 내 특정 분파의 이해관계 정도가 아니라 자본 권력이 추진한 문명적 수준의 프로젝트로 바라봐야 한다. (13쪽)

그래서 저자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거 40년간의 신자유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거대하고 심원하게 세상의 질서를 바꿔나가는 과정이 펼쳐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최소한 20세기에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민족해방을 실현했던 것과 같은 거대한 도전이 필요하다고 전망한다. 자본 권력과 정면 대결하고 이를 제압할 대항-대안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저자가 좌파정치의 갱신과 재도약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좌파정당은 몇 개의 무리로 나뉜다. 독일 사회민주당, 프랑스 사회당, 영국 노동당,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 등을 아우르는 사회민주당 계열이 그 하나다. 주로 유럽에 있으나 터키의 공화인민당, 멕시코의 민주혁명당, 일본의 사회민주당 등 비유럽권 지역에도 많이 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보다 더 왼쪽에는 공산주의 정당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들 무리는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 아래서 등장했다. 현재는 인도의 마르크스주의파-공산당, 네팔의 통합공산당-마오주의파, 일본 공산당, 체코 공산당 등이 주목할 만하다고 한다. 이밖에 20세기 말에 등장한, 좌파정당의 새 세대인 녹색 정당 계열이 있다.

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 좌파정치는 심각한 격동에 휩싸여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에 따르면, 기존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대신 그 왼쪽의 좌파 재구성 정당들이 좌파의 새로운 대표 주자로 부상하거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맹추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안에서 자기 혁신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제3의 길'에 가장 경도되었던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통 사회민주주의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그 예로 들고 있다.

토마스 제퍼슨(1743~1826)은 20년에 한 번씩은 봉기가 반복되어야 인민의 자유가 유지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제퍼슨의 명제가 21세기 아이슬란드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자가 보기에 '이렇게 조용히' 혁명을 진행하고 있는 아이슬란드야말로 경제위기에 맞서는 좌파들의 가장 대표적인 예다.

인구 30여만 명의 아이슬란드는 어업을 주업으로 해서 살아가던 나라였다. 이런 나라가 1인당 GDP 수치에서 다른 북유럽 국가들을 제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선 뒤부터였다고 한다. 2007년에는 그 수치가 7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은행업이라는 도깨비 방망이의 마법 때문이었다.

하지만 2008년에 아이슬란드의 3대 은행이 일제히 파산했다. 세계 5위의 부자 나라 국민들은 1인당 약 33만 달러(3억5000여만 원)의 외채를 갚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과 네덜란드 재무장관들에게 향후 15년간 35조 유로를 갚아나가기로 방침을 세우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슬란드인들은 이를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추위가 한창 절정이던 2009년 1월 성난 수만 명의 시민들이 의회를 에워싸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인구 30만의 나라에서 이것은 예사롭지 않은 광경이었다. ··· 결국 독립당 소속 게이르 호르데 총리가 이끌던 정부는 의회 해산과 총선을 약속했다. 이것만으로도 일종의 준혁명이었다. 시민들이 냄비와 프라이팬을 들고 나와 시위를 벌였다고 해서 이 사건에는 '주방 도구 혁명'이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81~82쪽)

이후 아이슬란드는 시민운동의 지지 속에 사회민주연합-좌파녹색운동 연립정부, 즉 '좌파-좌파' 연정이 들어섰다. 저자는 이를 거리의 혁명이 선거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한다. 북반구의 한 구석에서 펼쳐진 21세기형 혁명의 모습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저자는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에 두루 걸쳐 있는 전 세계 좌파의 현황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 세계 금융위기에 적극적으로 맞선 세계 좌파들의 사례(1부)와 더불어, 좌파의 재구성(2부)을 통해 새로운 좌파정치가 향하고 있는 미래(3부)를 살핀다.

그럼 한국의 좌파정치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럼 한국의 좌파정치는?'이라는 제목이 붙은 '에필로그'다. 저자는 먼저 독자적인 정치 구심 건설에 실패한 채 출발한 한국 좌파의 한계를 지적한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 좌파는 1987년 이후 지금까지 계속 자유주의 세력(중도우파)의 집권을 위한 동원 대상이거나 잘해봐야 그 하위 파트너 정도로 치부되어 왔다.

2014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좌파 정당으로 부를 만한 정당은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노동당 등이다. 정의당은 진보정의당이 개명한 것이고, 노동당은 진보신당이 재창당한 것이다. 여기에 이들과는 다른 계보를 갖는 녹색당이 포함될 수 있겠다. 저자는 이들 좌파정당들을 일별하면서 현재 한국 좌파정치에 필요한 것은 복원이나 재건이 아니라 '새 출발'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한다.

우선 단절해야 할 것과 온전히 단절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한국 좌파정치의 가장 커다란 장벽이 자유주의 세력에 끊임없이 흡수되도록 만드는 민주대연합의 압박이라고 본다. 이런 자유주의 세력 중심의 연합에 합류하려는 흐름과 확실히 선을 긋고 좌파정치의 독자적인 발전과 집권-변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체사상, 흔히 종북주의라고 부르는 과거의 잔재와 단절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주체사상은 그간 민주대연합 노선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였다. 또한 주체사상 추종자들에게는 북한 정권 입장에서 바람직한 남한 정부가 들어서는 게 정권 교체기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래서 저자는 주체사상 추종자들이 대선 때마다 사실상 자유주의 세력을 지지하곤 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한국의 좌파정당들이 당분간 실험과 개척, 정비의 시기를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좌파정당과 정치조직들이 일상적인 정치적 연대 조직을 결성해 대중운동들과 접촉하면서 각 정파가 자신의 혁신 성과를 무기로 서로 경쟁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과연 이런 노력들이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좌파정치가 현실에서 과연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지금처럼 좌파·진보정당들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저자는 이런 회의론적인 시각에 대해 이렇게 반문한다.

지금까지 세계사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저항-대안 세력이 강력히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대중의 삶이 실질적으로 개선된 사례가 있는가? 이런 세력이 없는데도 기득권 세력이 먼저 개혁을 단행한 사례라도 있었는가? 답은 명확하다. 없었다. 새누리당이든 민주당이든 안철수 신당이든 아래로부터의, 왼쪽으로부터의 도전이 없다면, 이들이 선택할 방향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1987년 이후 지겹도록 경험한 가장 근본적인 교훈 아닌가. (306~307쪽)

재작년 대선 즈음,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 박근혜씨는 평소 혐오해마지 않았을 '빨강색' 점퍼를 입은 채 복지를 외치며 다녔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로 몇몇 복지 공약을 헌신짝 차버리듯 한 행태가 고약하긴 했으나, 한 시대의 흐름과 대세를 보는 안목만은 탁월했다.

민주당과 안철수는 새정치민주연합(새정치연합)이라는 새 옷을 입고 다가오는 지방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이 과연 현재 전 세계적으로 정치를 추동하는 좌파적인 흐름과 경향을 제대로 간파하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눈에 확 들어오는 혁신적인 정치 공약 하나 없이 선거 공학에만 몰두해 있는 듯한 모습만 보여서 하는 말이다.

새정치연합은 둘째 치고, 이제는 그 존재마저 거의 잊혀진 듯한 좌파·진보정당들은 6월 지방선거를 어떻게 맞이하고 있을까.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이라는 우파·자유주의 세력의 대안 세력이 되기 위해 뼈를 깎는 혁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미래 지향적인 비전과 정책을 내놓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까.

저자는 좌파·변혁정치 없이는 이 지리멸렬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그것이 거의 수학적인 법칙이라고까지 말한다. 좌파·진보 진영의 정치 혁신과 정치세력화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좌파정치 없이는 이 야만적인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장석준 지음 / 개마고원 / 2014. 1. 29. / 312쪽 / 15,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장석준 지음, 개마고원(2014)


태그:#<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장석준, #개마고원, #좌파정치, #진보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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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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