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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는 오름이 360여 개 있다. 아니 공식적으로 368개 있다고 한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흩어져 있다. 바닷가에도, 중산간과 한라산 중허리에도 있다. 외지인 눈에는 이색적이고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오름 주변에 마을을 이루고 수많은 세월을 보낸 제주사람들에게는 오름은 삶의 터전이었다.

다랑쉬오름에서 본 정경. 제주 동북쪽은 오름이 군을 이뤄 장관이다. 아끈다랑쉬오름, 은다리오름, 멀리 지미오름, 성산봉이 보인다
▲ 아끈다랑쉬오름과 오름군 다랑쉬오름에서 본 정경. 제주 동북쪽은 오름이 군을 이뤄 장관이다. 아끈다랑쉬오름, 은다리오름, 멀리 지미오름, 성산봉이 보인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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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만 삶의 터전이었겠는가? 외지인의 발길이 끊긴 이곳은 소나 말의 터전이기도 하였다. 오름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소·말과 벗하며 밭벼나 조와 수수를 심고 메마른 세월을 보냈다.

4·3 때에는 중산간 일부 오름은 마을사람들이 토벌대의 눈을 피해 숨은 은신처였지만 거꾸로 발각되어 학살된 곳이기도 하였다. 뭍으로 나간 사람들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본향(本鄕)같은 존재고 죽어서는 양지바른 오름 허리에 뼈를 묻는 곳이다. 제주사람들에게 오름은 삶과 죽음을 내맡긴 신앙 같은 존재다.

오름은 살아서는 삶의 터전이고 죽어서는 죽음을 맡기는 곳이다
▲ 오름 무덤군 오름은 살아서는 삶의 터전이고 죽어서는 죽음을 맡기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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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은 '오르다'에서 왔다고 추측하고 있는데, 산이나 봉우리를 가리키는 제주말이다. 화산으로 제주 땅이 생기고 작은 화산활동이 더 진행되면서 생긴 기생화산이 오름이다. 오름을 넘어 신화와 전설, 민담이 가득한 곳이 제주다.

고조선 건국신화 마냥 제주에는 창세신화가 전해온다. 그 주인공은 제주를 만들었다는 거대 여신 설문대할망. 설문대할망은 치마폭에 흙을 가득 담아 제주섬을 만들었고 흙을 나르던 중 한줌씩 떨어트린 것이 360여 개 오름이 되었다는 설화다. 봉긋 솟은 봉우리는 할망이 장난삼아 손가락으로 눌러 굼부리(분화구의 제주말)가 되었다 한다.

한라산 북동쪽 평원은 오름이 몰려있는 '오름촌'이다.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닻오름, 높은오름, 앞오름, 당오름, 동거문오름, 백약이오름 등 셀 수 없는 오름이 봉긋봉긋 솟아 있다. 그 중 해 뜨는 용눈이오름을 시작으로 다랑쉬와 아끈 다랑쉬오름, 해지는 수월봉까지 오름여행을 떠나본다.    

능선이 아름다운 용눈이 오름

용눈이오름은 동트기 전, 어둡지도 환하지 않은 때 참맛이 난다. 등줄기곡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동쪽하늘은 해가 뜨려는지 파랗게 밝아오고 서쪽하늘에는 달이 높이 솟아 명을 다해가고 있다. 오는 해와 마지막 달빛에 비쳐 하늘과 땅이 하나의 선으로 만났다. 나무나 풀은 모두 어둠속에 숨죽이고 있고 보이는 건 오직 하늘과 맞닿은 오름의 실루엣이다.
 
동트기 전 달빛에 비친 용눈이의 실루엣이 아름답다
▲ 용눈이오름 겉살 동트기 전 달빛에 비친 용눈이의 실루엣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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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덜 깬 용이 누워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제 고단한 밭일을 끝내고 밤새 젖먹이와 씨름을 한 뒤 가슴을 드러낸 채 새벽녘에 잠시 잠을 청한 어머니의 가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용눈이의 화구도 변화무쌍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 용눈이오름 화구 용눈이의 화구도 변화무쌍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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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분 오르면 오름 꼭대기다. 세 개의 봉우리가 굽이친다. 설문대할망이 여기에다는 흙을 질질 흘렸나. 불주둥이(화구)는 변화무쌍하다. 요리 보면 엉덩이 같기도 하고 저리 보면 어머니 젖가슴같기도 하다. 가슴이야? 엉덩이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음이 변한다. 

엉덩이야? 가슴이야? 생각은 자유다
▲ 용눈이오름의 선 엉덩이야? 가슴이야? 생각은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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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틀 녘 용눈이 꼭대기는 성인 남자를 한 발짝 날려 보낼 만큼 바람이 몹시 세다. 자신의 몸을 쉽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속다짐일 게다. 성산봉주변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제 일출봉위로 해가 떠오려나 싶더니 이내 두터운 구름 위로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뻣뻣하게 쇤 해돋이였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달빛에 그을린 용눈이의 실루엣을 보았으니까...

오늘은 두터운 구름으로 뻣뻣이 쇤 해돋이다
▲ 용눈이오름 해돋이 오늘은 두터운 구름으로 뻣뻣이 쇤 해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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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눈이오름 곁에 다랑쉬오름이 있다. 다랑쉬는 눈이 부시게 맑은 날 한낮에 오르는 것이 제 맛이다. 다랑쉬오름은 오름 중에 오름이어서 올라서 주위를 내려다보는 맛이 좋기 때문이다. 한라산이 버거운 사람은 다랑쉬오름에 올라보라. 사방팔방 거침이 없는 것이 눈 맛이 시원하다.

다랑쉬오름은 밑에서 자기의 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꼭대기에 올라서기 전까지 그 속을 내보이지 않는 듬직함이 있다. 꼭대기서 보면 화구가 움푹 패여 오름 아래까지 파져 있는 양 아득하다. 이래서 다랑쉬오름은 높기보다는 깊다. 모난 돌이 정 맞은 걸까? 다랑쉬오름은 너무 도드라져 설문대할망이 주먹으로 한 대 탁 쳐서 이렇게 깊게 패었다 전해진다.

화구가 움푹 패여 오름 아래까지 파져 있는 양 아득하다
▲ 다랑쉬오름의 화구 화구가 움푹 패여 오름 아래까지 파져 있는 양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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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 옆에 아끈다랑쉬오름이 있다. 사람 나이로 치면 3~4살 됨직한 귀여운 오름이다. 남성다운 다랑쉬는 아빠 오름,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용눈이는 엄마오름, 짧은 치마를 간동하게 차려입은 것 같은 아끈오름은 딸오름 같다. 세 오름은 한 가족같이 보인다. 다랑쉬와 용눈이가 결혼하여 아끈을 나았다는 설화가 만들어질 법도 한데?

해넘이가 아름다운 수월봉

수월봉은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다. 동에서 서로 움직이게 되면 보통 남쪽 끄트머리 모슬포를 거치게 되는데 모슬포에서 수월봉으로 가는 해안길이 제주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길이다. 증명이라도 하는 걸까? 별장과 펜션이 해안길 따라 들어서고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바닷가 풍경에 만족해야 한다.

수월봉도 오름일까? 제주에서는 땅이 부풀어 올라 언덕이나 산같이 생겼다하면 모두 오름이라보면 된다. 수월봉도 언덕같이 생긴 봉우리지만 오름이다. 녹구(고)물오름·무니리오름이라고 불린다. 수월봉 꼭대기에는 중국정자처럼 되바라져 보이는 정자가 하나 서있고 바닷가 쪽은 천 길 낭떠러지다.

바람과 물이 흐른 방향, 물결자국 등이 그대로 박혀, 제주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 제주도 속살 바람과 물이 흐른 방향, 물결자국 등이 그대로 박혀, 제주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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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봉은 1만8000년 전 땅속에서 올라온 마그마가 물을 만나 격렬하게 폭발하면서 화산재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수월봉 아래 해안절벽에는 화산재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층층바위가 있다. 바람과 물이 흐른 방향, 물결자국 등이 그대로 박혀, 제주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이 제주의 속살은 콩고물, 팥고물과 호박고지로 층을 쌓아 만든 어머니가 해주셨던 찹쌀시루떡 같기도 하고 제주여자만큼이나 힘겹게 살아온 세월로 깊게 패인 어머니 이마주름 같기도 하다. 어머니 생각에 붉어진 내 눈시울은 해넘이 노을 때문에 남들에게 들키지 않았다.

수월봉 속살을 보고 있노라면 어머니의 시루떡이 생각난다. 수월봉 속살은 나에게 남이 모르는 진한 감동을 준다
▲ 어머니의 시루떡 수월봉 속살을 보고 있노라면 어머니의 시루떡이 생각난다. 수월봉 속살은 나에게 남이 모르는 진한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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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봉은 뭐니 해도 해넘이 명소다. 멀리 차귀도 옆으로 해가 지고 있다. 용눈이오름에서 맞이한 해를 수월봉에서 보내고 있다. 용눈이의 센 바람은 여기서 더 세졌다. 해 뜨는 용눈이오름에서 해지는 수월봉까지 제주의 해와 바람과 함께했다.

해넘이의 명소답게 수월봉해넘이는 참 곱다
▲ 수월봉 해넘이 해넘이의 명소답게 수월봉해넘이는 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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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봉 아래 널따란 밭에는 드문드문 유채꽃이 피어 있었다. 제주행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접한 3월1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안치환의 잠들지 않는 남도'가 생각났다.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젖은 유채꽃이여/검붉은 저녁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는 더욱 진하리.. 이 노래를 읊조리며 숙소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제주도(3.19-22)에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오름,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수월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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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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