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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에 빠진 어미는 지금도 돌아올 줄 모른 채

모두가 성서에서 흔하게 만나는 말씀이다. 성서에서 '하지 말라!'는 금기 위에는 반드시 약속이 있다. 그곳은 하나님의 인격과 섭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형화로 몸집을 키운 변질된 교회들은 성역화된 곳에서 맹신과 맹목이라는 신상품을 대량으로 출시했다.

그리하여 성역 위에 인간이 신본주의가 되어 탐욕으로 성역을 물질화시켰다. 금기된 성역을 변장시켜 온갖 위선과 거짓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며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어디가 끝인지 '갈 데까지 가 보자'는 막가파식으로 날뛰는 판국에 돌직구 책 <어쩔까나 한국교회>가 나왔다.

그동안 공학박사인 신성남 선생은 대형화로 조직화된 교회를 향해 수없이 회초리를 휘둘렀지만,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변화된 것은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책들은 꼭 읽어야 할 머리 큰 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웃집 사건'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평소 필자는 신 선생과는 면식은 없지만, 바라보는 방향은 같다. 곧바로 그의 책을 몇 몇 친구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은 심정으로 구입했다. 그들은 책 제목을 보면서 한마디씩 했다.

"요즘 한국교회가 이런 줄 모르겠어. 이 책은 건축에 목숨 걸고 헌금으로 야망 사업을 하는 저 높은 곳에서 외치는 자들이 꼭 보아야 할 필독서네, 저들은 자신이 하나님인지 알잖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성도들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를 전혀 상관하지 않잖아."

평소 교인들을 향해 할 말이 많은 친구도 한마디 했다.

"이 책은 극보수 꼴통 교인들 참고서로 읽어야겠네. 저들은 자신들이 지금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맹신도들 아닌가. 그들의 잘못보다 그렇게 맹목 맹신으로 이끌고 가는 사람들이 더 악하지. 저들이 소경이 인도하는 길을 가고 있는데 이 책을 꼭 한번 권하고 싶구먼."

꼴보수 공학박사 신 선생은 <어쩔까나 한국교회> 책을 통해서 현재 한국교회 치부를 적나라하게 벗겨놓았다. 한마디로 홀라당 벗겨서 똥통에 푹 집어넣었다. 똥통 속에서 푹 썩어 거름으로 거듭나라는 심정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가 교회를 향해 불편한 진실을 외치는 것은, 어린아이가 바람난 어미에게 젖을 달라 통곡하는 울부짖음과 같다. 긴 세월 목 놓아 울어도 바람난 어미는 이미 옷고름을 자르고 뭇 사내들 품 안에서 향락만을 즐기고 다녔다.

배부름과 쾌락에 빠진 어미는 지금도 돌아올 줄 모른 채, 또 다른 욕망을 품고 음탕함을 팔고 있다. 어미의 바람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어도 끝없이 세상을 향해 질주만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배고파 우는 젖먹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 많은 젖먹이들이 이제는 울지도 못하는 벙어리로 방황하는 아이가 넘쳐 나고 있지 않은가.

이미 다른 어미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 굶주려 숨을 거둔 아이,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교회를 떠나 버린 '가나안 성도'아닌가.

신 선생은 '가나안 성도'의 심정으로 어미의 품을 그리며 필자가 겪었던 한국교회 현실을 낱낱이 벗겨 놓았다. 그가 그토록 모질게 교회의 내부를 벗긴 이유가 있다. 양심에 화인 맞은 한국교회 심장을 내시경으로 보아야만이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탐욕으로 찌들은 치부를 도려내는 인고의 고통을 만난다. 산고의 통증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지만, 오직 아픔만큼 다시 태어나는 한국교회를 열망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또한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사이 성서가 제시하는 좁은 길도 보인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이정표를 보여 주는 듯하다.

그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책 표지
또 다른 곳에서 종교의 잔혹사를 들추어 내놓았다. 덩달아 서초동 부자 동네도 시끄럽다. 어찌 전능자가 보고만 계시겠는가. 집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다 드디어 그 집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셨다. 전능자는 부의 명칭, 강남의 황금 땅덩어리에 웅장한 집을 지은 유리 대문 앞에서 어미 잃은 젖먹이 심정이 되어 울고 계셨다.

때맞추어 한 젖먹이 아이도 어미를 찾는 창작 소설을 썼다. 몸을 파는 창녀처럼 변질된 어미에게 호소문을 내며 신문고를 두드렸다. 점차 잔혹해 가는 어미의 간악함을 향해 <서초교회 잔혹사>라는 소설로 어미를 고발했다.

어미의 잘못을 고발하면 불효자라 욕할 수 있겠지만, 그는 지금 사생아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불효자가 되는 편을 택한 것 같다. 불효자에게는 분명 부모가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불효자의 자리에서 창작의 날개를 폈다.

옥성호 선생은 한국교회를 향한 분노를 풍자소설로 변장시켰다. 그러나 그 변장술 속에 감추어진 작가의 분노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소설이 아닌, 잔혹한 변장술이 능한 현실의 대형화된 교회를 만나게 한다.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한국교회를 대표할 정도로 '행동하는 양심'으로 교파를 넘어 존경받는 고 옥한흠 원로목사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 20세 때 기독교를 떠났다.

성년이 되어 다시 돌아온 그곳에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고, 하나님은 자본을 창출하는 수단이며 방법일 뿐이었다. 신앙은 위선을 동반자로, 믿음은 맹신과 맹목을 친구로, 하나님은 오직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창작 소설 속의 김건축 목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앞세워 자신의 야망을 채워 나가는 발칙한 목사이다. 그가 왜 책 제목을 <서초동교회 잔혹사>라 했는지는 하늘은 알고 계실 것이다. 책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지만 그의 답이 걸작이다. "이 책은 100% 허구지만 100% 다 진실이다"고 했다. 참으로 명언이다. 이모든 탐욕의 발상도 돈이 많아서 시작된 거래들 아닌가.

그 후속타로 여기저기서 잔혹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목동 제자교회 잔혹사, 한국교회들의 잔혹사, 우리 교회 잔혹사, 옆 상가 교회 잔혹사…"로 온갖 교회의 잔혹사들이 SNS를 달구고 있다.

이와 같은 분노와 증오도 뒤집어 보면 사랑도 숨어 있다. 증오 속에서 변화를 바라는 반성적인 성찰이 숨어 있기에 공감이 간다. 그가 바라는 것도 '금기된 성역'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외침이다.

이렇듯 대형화의 잔혹사가 작은 것들을 짓밟고 있기에 더욱 안타까운 현실이다. 농어촌에서 농부가 되고, 어부가 되어 지극히 작은 자로 사역하고 있는 선한 목회자들이 잔혹하게 당하고 있기에 말이다. 이들이 대형화된 교회들이 저질러 놓은 잔혹사에 더 이상 희생양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어쩔까나 한국교회'를 이대로 방관만 할 것인가, '서초교회 잔혹사'를 풍자로 웃고 넘겨 버릴 것인가. 그러기에는 우리도 군중의 하나인 구경꾼일 뿐이다. 거짓과 위선으로 포장된 것들을 선포하는 것만이 지금 깨어 있는 자들의 몫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 <어쩔까나 한국교회> / 신성남 지음 / 아레오바고 펴냄 / 293쪽 / 1만 2000원
▲ <서초교회 잔혹사> / 옥성호 지음 / 박하 펴냄 / 308쪽 / 1만 3000원



어쩔까나 한국교회 - 꼴보수 공학박사 신 집사의

신성남 지음, 아레오바고(2014)


태그:#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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