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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정도전>의 정몽주(임호 분).
 드라마 <정도전>의 정몽주(임호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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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가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유명한, 정몽주의 단심가다. 흔히, 정몽주가 충신이었다는 증거로 제시되는 시조다.

사람의 진심은 '어떤 말을 했는가' 못지않게 '어떤 행동을 했는가'에서도 찾아야 한다. 좋은 시, 좋은 글을 많이 썼지만, 실제 행적은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의 예를 우리는 숱하게 겪어왔다. 어떤 말을 했는가와 어떤 행동을 했는가를 함께 고려해야만, 사람의 진심이나 충심을 좀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정몽주가 진정으로 고려 충신이었는가를 파악하는 일에서도, 우리는 그가 어떤 말을 했는가에 못지않게 어떤 행동을 남겼는지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제껏 우리는 그의 말에만 주목했지, 그의 행적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말과 행적을 함께 고려해야만 그의 충심을 보다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정몽주가 진정한 고려 충신이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그의 인격이나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는 최상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 왕조국가가 아닌 국민국가에서 그것은 더 이상 최상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충신이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류와 역사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다. 그러므로 정몽주가 충신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정몽주라는 인물의 '빙산의 일각'을 검토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라면서 굳이 이 문제를 따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정몽주라는 인물에 대해 좀더 정확한 지식을 갖자는 생각에서다.

정몽주 떠받든 조선왕조, 뭔가 이상하다

 서울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정몽주 동상.
 서울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정몽주 동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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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몽주를 충신으로 떠받든 주역이 조선왕조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몽주는 조선을 거부한 인물이다. 정몽주에게 거부당한 조선왕조가 그를 충신으로 떠받든 이유는 무엇일까?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조선왕조에서 정몽주 숭배의 공식적인 계기를 만든 인물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제3대 주상인 이방원이다. 그는 개경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처참하게 죽인 장본인이다. 그런 인물이 왜 정몽주 숭배의 단서를 제공했을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뒤 정몽주 띄우기를 시작했다. 앞서,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인 뒤 정도전을 철저히 파괴했다. 정몽주에 비하면 정도전은 조선왕조에 훨씬 더 공로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방원은 정몽주는 띄우면서도 정도전은 철저히 밟아버렸다.

이것은 이방원이 정몽주에게는 악감정이 없는 데 반해, 정도전에게는 악감정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정몽주보다 정도전에 대해 콤플렉스가 많았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별다른 능력 발휘 없이 죽은 정몽주에 비해, 정도전은 왕조 창업 과정과 요동정벌 준비과정에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죽었다.

정도전이 남긴 유산은 정도전이 죽은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도전의 유령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왕이 되어야 했다. 그러니 정도전에게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정몽주는 정도전의 선배 겸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결과적으로, 선배 겸 친구보다는 라이벌로 끝났다. 정몽주는 고려 멸망 직전에 정도전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그런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정도전을 욕보이는 행위였다. '조선을 거부한 정몽주'를 통해 '조선을 만든 정도전'을 욕보이는 행위는 정도전에 대한 이방원의 감정이 그만큼 편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권근이 이방원에 '정몽주 띄우기'를 제안한 이유

이방원이 정몽주를 띄운 데는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방원이 집권할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성계는 우왕·창왕·공양왕을 연달아 갈아치우고 왕이 됐다. 또 이방원 자신도 정도전과 이성계를 몰아내고 왕이 됐다.

이방원은 이런 하극상 풍조에 종지부를 찍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충신의 대명사를 찾아내서 사회적으로 띄울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성계의 열렬한 동지였지만 막판에 '고려왕조 사수'를 외치다 죽은 정몽주는 고려왕조 입장에서는 충신이었다. 그런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충효 논리를 확산시키는 데 유리했다. 조선왕조의 적인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이방원의 광폭 정치를 과시하는 데도 유리했다. 

태종 1년 1월 14일자(양력 1401년 1월 28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의 측근인 권근은 이방원에게 정몽주 띄우기를 제안했다. '이전 왕조의 충신을 띄우는 방법으로 지금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게 권근의 논리였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로 정몽주 띄우기를 제안했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왕조의 정몽주 숭배가 시작됐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조선시대의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 시대의 객관적 관점으로 정몽주의 충심을 판단하는 게 가능하다. 객관적 판단이란 것은, 정몽주가 남긴 단심가뿐만 아니라 그의 행적까지도 함께 고려하여 그의 충심을 냉정히 판단하는 것이다. 

정몽주는 1388년에 벌어진 이성계의 쿠데타(위화도 회군)를 지지했다. 이성계는 '지금 단계에서는 요동(만주)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임금인 우왕과 실권자인 최영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성계의 논리가 맞는지 여부를 떠나서, 이성계의 행위는 고려왕조의 시각에서 보면 엄연한 반역이었다. 만약 성공한 반역이 되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엄연히 반역인 위화도 회군을 지지한 정몽주의 행위는 과연 충신의 행위였을까?

고려 충신으로 알려진 정몽주, 그러나...

맹자는 폭군 방벌 사상을 역설했다. <맹자> 진심 편에 따르면 "군주가 어질지 못할 경우에는 쫓아낼 수 있습니까?"라고 공손추가 질문하자, 맹자는 "이윤이 가진 뜻이 있으면 옳은 일이지만, 이윤의 뜻이 없으면 찬탈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윤은 은나라의 재상으로서 불의한 왕인 태갑을 탄핵했다가 태갑이 죄를 뉘우치자 복권시킨 인물이다. 이윤처럼 공정한 정신으로 폭군을 몰아내면 혁명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법 찬탈이라는 게 맹자의 사상이다.

맹자의 영향을 받은 유교 선비들은 '천명을 위반한 폭군을 쫓아내는 것은 충효 논리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몽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요동을 정벌하라"는 우왕의 명령은, 실현 가능성의 여하를 떠나 천명을 위배한 것이라고 볼 근거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정몽주가 진정한 충신이었다면, 왕명을 어기고 쿠데타를 단행한 이성계를 단죄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쿠데타를 지지했다.

 정몽주의 단심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여운형 생가에서 찍은 사진.
 정몽주의 단심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여운형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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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직후에 정몽주는 충효에 위반되는 두 번째 행적을 남겼다. 쿠데타 주역인 이성계·조민수 편에 서서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데 가담한 것이다.

"그거야 우왕이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의혹이 있었으니까, 가짜 왕을 몰아낸다는 심정에서 그렇게 한 게 아니겠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중대한 모순이 담겨 있다.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다. 우왕이 신씨라서 왕이 될 수 없다면, 창왕 역시 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왕을 폐위시키는 데 가담한 정몽주의 행위는 충효라는 관점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었다.

물론 이성계나 정몽주는 창왕 대신 다른 왕족을 추대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조민수·이색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했다. 전적으로 자기 뜻이건 자의반 타의반이건 간에 정몽주 역시 창왕 옹립에 가담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창왕 정권에 참여했으므로 창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셈이 된 것이다. 

이듬해인 1389년에 정몽주는 이성계와 힘을 합쳐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정몽주는 라이벌인 조민수·이색을 실각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창왕을 폐위한 논리는 창왕의 아버지인 우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씨라는 것이었다. 가짜 왕을 폐하는 것은 충효 논리에 위반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미 창왕 옹립 과정에 참여했으므로, 자신의 이전 행적과 모순되는 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따라서 창왕 폐위라는 행위 역시 정몽주의 충심에 대해 의문을 남기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폐위한 뒤인 1392년에 정몽주는 이성계와 더불어 최후의 권력투쟁을 벌였다. 그는 동지인 이성계의 야심을 경계했다. 이때부터 그는 신왕조의 창업 가능성을 경계하며 권력투쟁에 나섰다.

그러던 중에 기회가 왔다. 이성계가 낙마 사고로 잠시 쉬게 된 것이다. 그러자 정몽주는 이성계의 측근들에 대한 정치공세에 나섰다. 그 대상에는 이성계의 핵심 참모이자 정몽주 자신의 '절친'인 정도전도 포함됐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귀양 보낸 뒤에, 자객을 구해 정도전의 뒤를 밟도록 했다. 하지만, 정몽주 정권은 3일 천하로 끝났다. 정권을 잡은 지 3일 만에 이방원의 기습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몽주의 충심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다섯 가지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하나는 그의 말이다. 그는 단심가라는 시조(A)를 통해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했다.

나머지 네 가지는 정몽주의 행적이다. 그는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B) 우왕을 폐위하고(C) 창왕을 폐위한(D) 뒤에 이성계의 왕조 창업을 반대했다(E). 여기서 B·C·D는 충심을 의심케 하는 증거이고, A·E는 충심을 신뢰케 하는 증거다. 각각의 증거에 대해 얼마만큼의 가중치를 부여할 것인지,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정몽주가 고려 충신인가 아닌가는 그의 인격이나 역사적 의의를 판단하는 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충신인가 아닌가를 굳이 따지려면, 단심가뿐만 아니라 객관적 행적들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 기사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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