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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아주머니,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난 26일 서울의 한 반지하방에 살던 60대 어머니와 30대 두 딸이 70만 원이 든 현금 봉투와 함께 또박또박 써내려간 유서의 내용이다. 이웃에 대한 그 흔한 원망이나 정부에 대한 분노마저 없다. 외롭고 서러운 죽음 앞에서도 밀린 집세와 공과금을 먼저 걱정하는 그들의 심성이 비보를 접한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 그들은 천사 아니면 바보다.

세 모녀 각각의 삶은 이미 갈기갈기 찢기고 고장나버린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선, 가장을 암으로 잃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무려 12년 동안 가정을 꾸려온 한부모 가정의 열악한 현실이 있다. 또, 오랫동안 당뇨와 고혈압을 앓아왔으면서도 가난하기에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무기력한 의료 복지 시스템이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꿈과 끼를 펼치기 위해 아무리 토익을 열심히 공부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30대 늦깎이 청년의 좌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주인 떠난 반지하방에 버려진 도화지 묶음과 미술용품 할인 쿠폰은 산산조각이 난 그의 꿈을 짐작하게 해 준다. 할인 쿠폰을 모으며 그는 절감했을 것이다. 꿈을 이루려면 오로지 돈이 필요하다고.

식당 일을 하다 넘어져 다친 것도,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한 것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도 취직을 못한 것도 그들에겐 모두 '제 탓'이었다. 목숨을 끊기 전에도 밀린 집세와 공과금을 우선 걱정했던 그들이다. 탈세와 편법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들은 그렇듯 누구보다 착하고 정직한 납세자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회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그들은 국민의 의무를 다할 줄만 알았지, 보장된 권리를 누릴 줄은 몰랐다. 돈 없고 아프면 죽어야 하는 야만적인 사회를 그들은 원망조차 하지 않았다. 이웃들은 그들의 존재에 무관심했고, 국가의 국민은 오로지 정부의 컴퓨터 장부에만 있을 뿐이었다.

세 모녀의 선택... 국가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과 분노를 가누지 못하고 있는데,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념 담화랍시고 전 국민이 보는 카메라 앞에서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 운운하고 있다.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다. '국민 행복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됐으면서도 결국엔 돌고 돌아 '돈 타령'인 셈이다. 여전히 '행복은 소득 순'이라는 낡아빠진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민 소득 4만 달러, 아니 8만 달러가 돼도 어차피 '평균값'일 뿐이다. 누구는 한 끼 식사비로 백여 만 원을 쓰고, 휴가 때마다 비즈니스 클래스로 가족 해외여행을 떠나지만, 컵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고, 태어나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보지 못한 이웃들도 부지기수다. 자살하기 위해 번개탄을 사러가는 이웃이 버젓이 있는데 국민 소득 4만 달러 시대가 다 무슨 소용인가.

대체 그들의 통장에 얼마가 들어있어야 모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얼마면 식당 일을 잠시 쉴 수 있고, 급한 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며 단란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돈이 없으면 존엄성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생존조차 보장 받기 어려운 현실에서, 국가는 그들에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세 모녀의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적절한 치료를 받으며, 제 한 몸 뉠 수 있는 집을 갖는 건 당연한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여전히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그 각오로 살아보라'고 하고,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 한다'며 되레 죽은 이들을 책망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지금이 21세기 맞나.

세 모녀 이야기로 시작된 기본소득 강연

금요일 늦은 시간임에도 강연장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 김종철 선생의 '기본소득제' 강연 모습 금요일 늦은 시간임에도 강연장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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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남 일 같지 않아 괴로워하던 차에, 지난 달 28일 저녁에 우연히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강연을 듣게 됐다. '기본 소득(Basic Income)제'에 관한 내용이었다. 국민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가가 국민 개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일정액을 주는 제도다. 기존의 경제학적 상식으로는 낯설다 못해 황당무계한 주장이다.

놀랍게도 금요일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강연장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두 시간 넘도록 꼼짝도 않고 서서 듣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행사를 주관한 노동당과 녹색당의 당원과 <녹색평론>을 정기 구독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대학생들과 나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이른바 '불금'이라는 금요일 저녁, 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사회자의 오프닝 멘트 역시 세 모녀의 자살 이야기였다. 그들의 명복을 빌며,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비정한 우리 사회를 성찰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다 달랐지만, 오로지 성장과 성공만을 외치며 살아가는 무한경쟁 시대, 폭주 기관차가 돼버린 고장 난 자본주의를 더 늦기 전에 어떻게든 뜯어고쳐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가 공감했다.

"기본 소득제가 정착되면 이윤보다 인간이 먼저인 세상, 노예 노동이 사라지고 일이 가장 좋은 '오락'이 되는 사회가 실현됩니다. 그것은 노동권 중심의 사고에서 생존권과 존엄성 중심의 사고로의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비록 현실은 척박하고 비루하지만,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감안하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국민적 합의를 이끌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마냥 가슴을 뛰게 했다. 하긴 지구 반대편 스위스에서는 기본 소득제 도입에 관한 의사를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라는 뉴스도 들은 터였다. 그렇다면 백 보 양보해서 시기상조일 수는 있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일 게다. 일단 논의의 장에 올려놓을 수만 있다면, 활발한 토론을 통해 어떻게든 구체적인 설계안이 나올 것이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하는 김종철 선생의 말은 하나같이 확신에 차 있었다. 경제 성장의 끌차였던 석유 문명의 종말을 앞두고 '석유 없는 시대를 상상하라'는 외침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이따금 정부가 가능하지도 않는 헛된 희망을 국민에게 심어주려 한다며 정부에 대한 분노도 숨기지 않았다.

참가자들은 만약 기본 소득이 주어졌다면 세 모녀의 자살 같은 참담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며 이구동성 말했다. 취직을 했든 못했든, 나이가 많든 적든, 단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삶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없지 않을까. 강연을 듣는 것만으로도 상처 받은 마음이 다소나마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강연이 끝나자마자 이내 팍팍한 현실로 되돌아갔다. 여기저기서 제도적 실효성에 관한 질문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개인당 50만 원만 지급해도 족히 300조 원이 넘게 필요한데 그 많은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느냐, 돈이 마구 풀린 후 인플레이션은 어떻게 감당하느냐, 일하지 않는데도 소득이 주어진다면 근로 의욕이 저하될 게 불 보듯 뻔하다는 등의 지적이었다. 한마디로, '취지는 좋지만 그게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식이다.

강연만큼이나 답변도 명료했다.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어려울 뿐, 그런 것들은 하등 문제될 게 없습니다. 단언컨대, 우리 마음 속 '고정관념'과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부터 '개미'를 칭송하고 '배짱이'를 욕하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성서 구절을 곧이곧대로 이해한 뒤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살아오지 않았나.

정도의 차이일 뿐 경제는 영원히 성장할 거라는 믿음, 일단 파이를 키워야 혜택이 밑바닥까지 돌아간다는 생각, 법인세를 올리면 기업들이 모두 해외로 빠져나가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두려움, 토지 역시 상품이며 이윤 추구의 대상이라는 인식, 그리고 과도한 상속세는 부유층의 반발을 불러와 사회 통합을 저해한다는 생각 등.

이러한 잘못된 고정관념만 깨뜨릴 수 있다면 '기본 소득제' 시행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사실 그것은 고정관념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두려움'과 현실적 '열패감'에 가깝다. 예컨대, 부자 아빠 덕에 승승장구하는 건 정의롭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그들에 맞서 싸울 의지도, 연대 의식도 이미 희박해져버렸다. 되레 스스로 '루저'라며 자책하기 바쁘지 않나.

적금 만기 이자 받고도 서글퍼진 이유는...

낯설고 황당무계하게 여겨지던 기본소득제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 기본소득제 홍보 팔찌와 팸플릿 낯설고 황당무계하게 여겨지던 기본소득제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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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전날, 하루 종일 싱글벙글거리며 보냈다. 적금 만기가 됐다는 연락에 은행에 들렀다가 2백 만 원 가까운 이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 모녀 자살 소식을 접하기 바로 전이었다. 강연을 듣고 돌아가는 길, 은행으로부터 이자를 받고 기뻐했다는 것 자체가 서글퍼졌다. 과연 이 돈이 내 돈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여윳돈을 은행에 맡겼을 뿐이고, 한두 해마다 꼬박꼬박 이자를 챙겨온 것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돈이 돈을 벌어준 것이다. 자동 이체 방식이라 은행에 직접 통장을 들고 가는 수고로움마저 없었으니, 말 그대로 불로소득인 셈이다. 그럼 누가 내게 이자를 준 것일까. 시쳇말로 '개평'을 뜯는 은행이 아니라, 적금으로 맡긴 내 돈을 비싼 이자를 물고 빌려간 사람이다.

생활고에 은행 빚을 내 근근이 이자 물며 살아가는 전국의 '세 모녀'들이 내 통장으로 이자를 꼬박꼬박 보내주고 있는 셈이다. 거칠게 말해서, 이자 소득이란 근본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나친 비약이며 자책일 수도 있지만, 이번 세 모녀의 자살이 남의 일 같지 않을뿐더러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부디 바보처럼 살다 천사의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간 세 모녀의 명복을 빈다.


태그:#세 모녀의 자살, #기본소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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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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