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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지식인 사사키 아타루.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지식인 사사키 아타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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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젊은 지식인', '일본의 니체', '무시무시한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41)를 소개할 때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1973년생, 일본 나이 만 40세인 그는 2008년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이라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학술서로 펴내 일본 문단 내에서 주목을 받았고, 이어 2012년 한국에서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출판해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 9월 자신의 대학 강연과 기고, 다른 작가들과의 대담 등을 엮은 책 <이 치열한 무력을> 출간한 사사키가 25일 내한해 특별 강연을 열었다. 사사키는 25일과 26일 이틀간  서울 종로구 옥인동 길담서원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을 오가며 '우리들이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들이 '종교'라고 부르는 것' 등의 제목으로 주제 강연을 펼쳤다. 

"책을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부터 시작"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言)의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중략)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죽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문학자 스스로가 왜 문학을 이렇게까지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겁을 먹고 있는 겁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114쪽)

사사키는 강연에서 자신의 저서를 인용, "책을 읽고 다시 쓰는 것, 문학이 혁명의 근원"이라며 어떻게 이 개념들이 연결되는지를 역설했다. 그는 "역사를 되짚어 보면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혁명을 볼 수 있다"며 "여기서 문학이라는 것은 예술작품을 위한 쾌락이나 그저 즐거움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읽고 쓰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일례로 그는 18세기에 활동했던 존 로크, 흄, 아이작 뉴튼 등이 그 시대에 '문학자'로 불린 것을 들며 "아이작은 자연을 관찰하면서 자연을 읽고 자연의 법칙을 글로 써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기독교 연구가들은 성경을 편집하는 일조차 '문학'의 영역으로 간주했다는 설명도 뒤따라왔다. 그만큼 문학을 해석하는 범위가 넓었다는 주장이다. 

사사키는 또 자신이 일본 내에서 매우 소외된 지역에서 태어났다면서, "그러나 이것이 제가 조선을 침략한 일본인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어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는 길고 복잡한 역사가 있지만, 서로 함께 미래를 그려갈 공통의 기원을 만들어 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36쪽)

강연은 사사키 아타루가 생각하는 혁명과 종교, 이상적인 사회상 등에 대한 자유로운 발언과 함께, 참가자들이 한 질문에 사사키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사사키는 강연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시인의 시를 낭독하고, 노래를 부르는 등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참가자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난다"며 문학의 중요성을 거듭 설파하는 사사키의 강연 내용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예수와 석가모니 이후, '책'이 남고 새로운 신앙이 태어났다

종교라는 건 원래 라틴어로 '레티노'라고 하는데, 위대한 석가모니와 위대한 예수 같은 경우 그 당시 라틴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본인들이 했던 행위들이 종교라는 걸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이 당시 무엇을 했습니까? 이전까지 존재하던 이 세상의 부정을 끊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위대한 '책'들이 남았습니다."
 종교라는 건 원래 라틴어로 '레티노'라고 하는데, 위대한 석가모니와 위대한 예수 같은 경우 그 당시 라틴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본인들이 했던 행위들이 종교라는 걸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이 당시 무엇을 했습니까? 이전까지 존재하던 이 세상의 부정을 끊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위대한 '책'들이 남았습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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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 제목이 굉장히 자극적입니다. 한국은 특히 기독교 신자들이 대다수라, 길에서 부딪힌 사람 네 명 중 한 명은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선생의 책 제목을 보면 놀라기도 하는데, 책 제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책 제목은 제가 존경하는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의 시에서 따온 것입니다. 제가 간단한 시를 낭독해보겠습니다.

잘라라 그 기도하는 손을
하늘에서 허공에서
눈의 가위로
그 손가락을 잘라라
너의 입맞춤으로
이렇게 접혀진 것이 숨을 삼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러분들은 이 시를 듣고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나타난 내용은 단순한 종교적 경멸이나 폭력이 아닙니다. 이 시에는 일종의 격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폭력 같은 것이 아니라,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새로운 격렬함이죠. 기도하는 손을 자르는 데 무엇으로 이걸 잘라내느냐. 눈의 가위, 입술, 입맞춤으로 잘라낸다고 돼 있습니다. 또 마지막 부분을 보면 접혀진 게 다시 나타난다는 데, 일반적으로 접혀진 것은 책을 의미합니다. 

이 시를 잘 읽어보시면 제가 종교적인 것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종교라는 건 원래 라틴어로 '레티노'라고 하는데, 위대한 석가모니와 위대한 예수 같은 경우 그 당시 라틴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본인들이 했던 행위들이 종교라는 걸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이 당시 무엇을 했습니까? 이전까지 존재하던 이 세상의 부정을 끊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위대한 '책'들이 남았습니다."

- 선생은 책 속에서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체,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혁명을 들으면 먼저 폭력을 연상하게 됩니다. 책을 읽는 것, '문학'이 어떻게 혁명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생각해보면 사실 간단합니다. 근대의 많은 혁명들을 살펴보세요. 프랑스 혁명 같은 경우도 그 짧은 기간에 헌법이 바뀌었는데, 어떤 혁명이든 그저 폭력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의 법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꾼 루터나 무함마드, 예수 이후에 남은 것들, 새로운 '책'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루터가 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신학을 쓰는 방법이나 성경을 인식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폭력으로 촉발된 '폭력 혁명'이라는 것은 유럽에서 200년밖에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혁명은 단지 폭력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고, 문학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문학이 끝났다고? 이제 막 걸음마 뗀 '애송이'"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지식인 사사키 아타루씨가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길담서원에서 열린 대담에서 질문들에 답변 하고 있다.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지식인 사사키 아타루씨가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길담서원에서 열린 대담에서 질문들에 답변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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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는 "읽어라, 책이 혁명의 씨앗이다" 이런 말을 하는데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학이 혁명이라고 하는 발상을 어떻게 얻게 되셨는지요.
"아무래도 여러분들은 문학이나 혁명이라는 말을 너무 적은 범위에서, 여러분의 작은 체구 속에 집어넣어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혁명을 보다 넓은 시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책에서 그 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증명했습니다.

문학도 지금보다 더 넓은 의미였습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단순히 예술작품을 위한 쾌락이나 즐거움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읽고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18세기 유명한 철학자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아이작 뉴턴 등은 이 시대에 문학자라고 불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읽고 쓰는 것이 탁월한 사람들이었다는 얘깁니다. 아이작은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을 읽었고, 나아가 자연의 법칙을 만들었다. 자연의 법칙을 쓰는 것이 아이작 뉴턴의 일이었습니다.

또 기독교 연구자들은 기독교 문학을 의미할 때 성전(성경)을 편집하는 것도 문학을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을 편찬하는 것도 문학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이것은 저희가 얼마나 좁은 문학 개념에 갇혀있는가를 증명합니다. 그러니까 문학이란 건 단지 몸 약한 사람이 안경을 쓰고 책을 읽는 듯한 그런 느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계를 읽고 세계를 다시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선생은 책이라고 하는 양식에 대해 강조합니다만, 요즘은 다양한 매체가 발전돼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꼭 책을 읽는 것만이 해답일까란 생각이 듭니다. 
"앞서 문학은 읽고 또 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이작 뉴턴이 읽었던 대상은 자연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도 '무엇을 읽을 것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무엇에 쓸 것인가' 등 무한한 버전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 법학상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피에르 르장드르는 유엔의 관료로 아프리카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스승은 아프리카인들"이라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추는 춤이나 노래를 멈췄을 때 비로소 산업사회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반대일 수 있는 겁니다. 아프리카인들이 춤추고 노래 부르는 건 단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고, 말하자면 '신화적 의미'를 지닌 무엇입니다. 그들이 몸에 새긴 문신이나 액세서리 등은 그들의 생활을 관장하는 일종의 성서, 근거가 되는 것들입니다. 자신들이 지켜야 할 법이나 규율을 신화로 만들어내고, 이것들을 춤을 추는 방식과 액세서리에 담아 몸에 걸쳐 신화를 천년 이상 이어 온 것이죠.

다시 말해 그들도 법이라든가 규율, 성전, 이런 것들에 대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읽고 바꾸고 하는 행위는 우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이와 컴퓨터에 쓰고 읽는 행위들을 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몸에 자신들의 신화를 쓰고 새겼고, 그런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어떤 한 사회를 운영하고 갱신해나가는 것에는 아주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덧붙여, '문학이 끝났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뭐가 '끝났다'고 하는 건 오로지 문학 밖에 없습니다. 문자의 역사가 얼마나 됐는지 아십니까? 음악이 약 7만 년, 미술이 약 3만 년의 역사를 가진 데 반해 문자의 역사는 고작 5000년에 불과합니다. 역사가 5000년 밖에 되지 않아 우리가 문자에 익숙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문학의 '풋풋함'에 대해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주 최근에, 15세기경에 한반도에서는 아주 위대한 '한글'이라는 문자가 발견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요? 이처럼 문학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이제부터가 시작인 '애송이'입니다."

"가르치려 드는 지식인들 행동은 일종의 '정신병'"

제가 일본에서 가장 존경하는 정신의학자 나까이 히사오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망상이 사실은 굉장히 평범하고 지루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권력욕은 내가 완벽하고,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할 수 있다는 욕망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것처럼 지식인들 중에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아는 것을 당신들에게 하사한다'는 식의 행동은 일종의 정신병리학적인 증상, 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가장 존경하는 정신의학자 나까이 히사오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망상이 사실은 굉장히 평범하고 지루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권력욕은 내가 완벽하고,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할 수 있다는 욕망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것처럼 지식인들 중에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아는 것을 당신들에게 하사한다'는 식의 행동은 일종의 정신병리학적인 증상, 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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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선생은 책에서 평론가를 '모든 문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전문가를 '하나의 분야에 대해 모두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설명했습니다. 최근 전문가인 인문학자들로부터 인문학을 배우면서, 그들의 지식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이 '지식의 자본가'나 '지배자'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실망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제기에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매우 어려운 질문이라 답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일본에서 가장 존경하는 정신의학자 나까이 히사오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망상이 사실은 굉장히 평범하고 지루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면 망상이라는 게 결국은 자신의 권력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욕은 내가 완벽하고,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할 수 있다는 욕망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것처럼 지식인들 중에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아는 것을 당신들에게 하사한다'는 식의 행동은 일종의 정신병리학적인 증상, 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한국에서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프랑스 등 어디에나 존재하는 지식인들의 유형입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지식인들 중에는 도심의 돈 많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명문 초중고를 졸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의 경우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 중 정치인, 미디어계, 출판계로 진출한 중요한 인물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렇다보니 주변인들이 나라의 주요지위를 독점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되고, 나아가 마치 자신도 국가에서 그런 위치에 있는 듯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이건 병에 걸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타자성'을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일례로 저는 무함마드가 쓴 코란을 보면서 한 구절이 아주 아름답다고 느꼈는데, '나는 시장을 헤매고 다니며 먹고사는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구절입니다. 그는 스스로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걸 거부했습니다. 제 좌우명은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가 한 말인데, 이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당신이 만약에 뭔가 쓰고자 한다면 생각하는 대로 쓰라, 그리고 존경하는 작가가 쓴 것과 그것을 비교하라'. 이는 당연히 매우 굴욕적인 방식이지만, 피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가 잘났다든가 가장 뛰어나다든가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할 겁니다."

- 선생은 강의와 책을 통해 "문학이 혁명의 본질이며 세계를 변혁하는 것의 본질이다"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변혁된 세계의 모습, 이상적인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어떤 이미지를 그리는 게 자칫하면 망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 피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것들을 상상하곤 합니다. 언젠가 사사키 아타루라는 인간이 쓴 것이 완전히 필요가 없어지는 그런 세계 말입니다. 제가 하는 사고방식이 흔한 사고방식이고, 사사키 아타루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 바람직한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는, 본인이 고쳐줬던 정신병 환자가 찾아와서 선생님 덕에 나았다고 했을 때 매우 불쾌해했다고 합니다. 정신병이 고쳐진 것처럼 보일 뿐이지 아직도 의사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정말 고생해서 치료해 나은 환자가 아예 그 사실을 망각하고 은혜를 모르는 듯한 발언을 할 때, 프로이트는 기뻐했다고 합니다. 저도 제가 하고 있는 사고가 일반적인 사고가 되고, 제가 하고 있는 것들이 소멸되는 세계가 오길 바랍니다. 질 들뢰즈가 한 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 하나는 "나는 하나의 중계지점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역사에는 길고 긴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본 열도 중에서도 시골이자 최북단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게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죠. 그래서 제가 이런 얘기들을 여러분께 나눌 자격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함께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우정을 다시 한번 구축하고 새로운 오리진(Origin), 함께 미래를 그려 갈 공통의 기원을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일까요? 그것이 그저 잘못된 생각만은 아닐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태그:#사사키 아타루, #내한 강연, #길담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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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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