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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표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표지
ⓒ 열린책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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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에서 펴낸 안톤 체호프 선집에 수록된 17편의 단편소설 중 <애수>는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열린책들 출판사의 러시아어 된소리 표기법에 따라 작중에 등장하는 지명과 인명은 책과 동일하게 표기됐습니다. <애수>는 다른 출판사에서 '우수' '슬픔' 등의 제목으로도 번역된 바 있습니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라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고 숨을 걸그렁걸그렁 하였다.

그때에 김 첨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젠장맞을 년, 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하고, 훌쩍 뛰어나오려니까 환자는 붙잡을 듯이 팔을 내저으며, "나가지 말라도 그래, 그러면 일찌기 들어와요."(현진건 <운수 좋은 날> 중)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어 많은 분들에게 익숙할 작품인 <운수 좋은 날>의 한 장면입니다. 아픈 아내가 제발 나가지 말라고, 정 나간다면 일찍이라도 들어와 달라는 청을 뿌리치고 나온 인력거꾼 김 첨지는 일하는 내내 아픈 아내 생각뿐입니다.

러시아의 어느 겨울 거리, 마부 이오나 뽀따뽀프는 넋이 나간 듯 멍한 상태로 손님을 받습니다. 그리고 타는 손님들에게 신음 소리가 섞인 한 마디를 겨우 건넵니다.

"나으리, 저…. 제 아들놈이 이번 주에 죽었습니다."(<애수> 중)

체호프의 초기 단편소설인 <애수>의 도입부입니다. 그러나 이오나의 마차에 탄 손님들은 그의 죽은 아들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빨리 목적지에 달라고 재촉할 뿐이죠. 전혀 모르는 다른 이의 죽음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자들에게 흥미를 끌 수 없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오나를 사로 잡고 있는 것은 죽은 아들에 대한 생각 뿐입니다.

너무나 닮은, 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소설

<운수 좋은 날 외> 표지
 <운수 좋은 날 외> 표지
ⓒ 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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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꾼과 마부라는 주인공의 비슷한 직업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점도 크게 닮아있는 두 소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체호프의 <애수>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이 일하는 거리에서 집 혹은 숙소로 돌아가는 하루를 그린 두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보이는 모습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병든 아내가 먹고 싶다던 설렁탕 국물을 살 돈에다가 자신의 타는 목도 축일 수 있는 돈도 생긴 '운수 좋은 날'을 맞았지만 김 첨지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행운 앞에 조금 겁이 났음"일까요?

인력거가 무거워지매 그의 몸은 이상하게도 가벼워졌고 그리고 또 인력거가 가벼워지니 몸은 다시금 무거워졌건만 이번에는 마음조차 초조해 온다.(<운수 좋은 날> 중)

굳이 나갈꺼면 일찍이라도 들어오라는 아내의 간청이 자신의 머리 속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김 첨지는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잡기 위해서, 아주 먼 거리의 손님이라도 태우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그는 불행에 다닥치기 전 시간을 얼마쯤이라도 늘리려고 버르적거렸다. 기적(奇蹟)에 가까운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을 할 수 있으면 오래 지니고 싶었다. 그는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었다. 그 모양은 마치 자기 집, 곧 불행을 향하고 달려가는 제 다리를 제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으니 누구든지 나를 좀 잡아 다고, 구해 다고 하는 듯하였다.(<운수 좋은 날> 중)

퇴근길에 들린 술집에서는 이미 아내가 죽었다고 확신까지 하면서 "불행에 다닥치기 전 시간을 얼마쯤이라도 늘리려고" 노력합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독자들은 감당하기 불행을 예감한 김 첨지의 모습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도 역설적인 제목과 작품 말미의 반전이 이 모습을 더 강조하는 장치가 되죠.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

다시 체호프의 <애수>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마부 이오나는 결국 그날 탄 손님들에게 자신의 죽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집중을 못했던 것인지, 그날 일진이 좋지 않았던지 말에게 먹일 귀리를 살 돈 조차 벌지 못하고 결국 마부들이 쉬는 숙소로 향합니다. 숙소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나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으려 했던 걸까요? 하지만 동료 마부들에게도 아들 이야기를 건네지만 모두 그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자세히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싶다…. 아들이 어떻게 병에 걸렸고, 얼마나 괴로워했으며, 죽기 전에는 무슨 말을 했고, 또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해야 한다…. 장례식이 어떠했는지, 죽은 아이의 옷을 가지러 병원에 어떻게 갔는지 말해야 한다. 시골에는 딸 아니시야만 남았다…. 딸아이 얘기도 해야 한다…. 지금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듣는 사람은 기가 막혀 한숨을 내쉬며 슬프게 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자들과 이야기하면 더 좋을 것이다. 그 여자가 아무리 바보라 하여도 두어 마디만 듣고도 통곡할 것이다.(<애수> 중)

힘든 일을 겪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친한 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고 힘을 낼 수 있는 경험, 다들 겪어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이오나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큰 불행을 겪었지만 주위의 누구도 그의 아픔을 공감해기는커녕 단지 들어주는 것조차 해주지 않아 더 큰 슬픔을 겪습니다.

다시 <운수 좋은 날>로 돌아가 그 유명한 반전이 있는 말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설렁탕과 말

"설렁탕을 사다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운수 좋은 날> 중)

괴상하게 운수가 좋았던…, 그 하루 김 첨지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조금만 더 빨리 이런 운이 있었다면 아내의 죽음까지 막을 순 없었을지 몰라도 죽기 전에 그렇게 먹고 싶다던 설렁탕 국물이나마 먹일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짧은 단편 속에 작가가 독자에게 툭툭 던졌던 암시와 김 첨지의 불안한 모습 들이 차츰 차츰 점층돼 작품의 마지막의 비극성이 더 강하게 기억에 남게 합니다.

체호프의 <애수>는 어떻게 마지막은 어떻게 끝날까요?

그는 외투를 걸치고 말을 매어 둔 마구간으로 간다. 그러면서 귀리를, 건초를, 날씨를 생각한다…. 혼자 있을 때는 아들을 생각할 수 없다…. 누군가와 이야기해야 한다. 혼자서 아들을 생각하고 아들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중략) "그래, 그래, 너는 아니…, 꼬지마 이오니치는 이젠 없어…. 이 세상을 떠나 버렸지…. 허무하게 떠나 버렸다고…. 만일 말이다, 너에게 새끼가, 네가 낳은 새끼가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다, 그 새끼가 죽었다면 말이다…. 얼마나 괴롭겠니?" 늙은 말이 건초를 먹으며, 이야기를 들으며, 주인의 손에 입김을 내뿜는다…. 이오나가 아주 열심히 말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애수> 중)

결국 아무와도 이야기를 하지 못한 이오나는 그의 말에게 귀리 대신 건초를 먹이며 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합니다. 작품은 이렇게 끝납니다. 체호프의 이 작품은 다른 소설들과 달리 아들이 죽었다는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감당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애수'를 독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독자들은 작품의 말미에서 혼란이 옵니다. 과연 이오나는 아들의 죽음 때문에 슬픈 것일지, 아니면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 더 슬픈 것일지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두 작가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소재가 주는 비극을 더 강하게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전혀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미리 조금씩 조금씩 암시를 주면서 후반부에 집중시키는 현진건의 방식과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에 짓눌려있다가 결국 이를 해소하지 못하고 자신이 기르는 말에게 털어놓을 수 밖에 없는 이오나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낸 체호프의 방식. 직접 두 작품을 읽은 후 비교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오종우 역 / 열린책들 출판 / 출간일 2009-11-30.

이 글은 기자의 블로그(mimisbrunnr.tistory.com)에도 게재되었습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열린책들(2009)


태그:#체호프, #애수, #현진건, #운수 좋은 날,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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