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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금지령.'

이런 게 내려진다면 인생은 훨씬 초라해질 것 같다. 나는 유난히 선물 주기를 즐기는 편이라 더 그럴 수도 있겠다. 한 달에도 여러 번씩 누군가를 위해 물건을 고르게 된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소비보다 선물과 증여를 위한 소비가 훨씬 많지 않나 생각하게 될 정도다. 적어도 실감으론 그렇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균일가 행사장 근처를 서성이지만, 선물을 위해서라면 흔히 유명 브랜드의 신상품을 찾는다. 내가 끼니 챙겨먹는 데 큰돈 쓰는 건 주저되지만, 친지나 벗들과 함께라면 번듯하게, 흐뭇하게 먹고 싶을 때가 많다. 거꾸로, 내 물건 중 값나가는 것은 거의 다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한 식사 중 호화로웠던 것은 누군가 사줬던 식사다. 나는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유명 화장품 브랜드의 멤버십 포인트가 꽤 쌓여 있는데, 그런 게 나 혼자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선물이란 건 소비를 좋아하면서도 소비에 죄책감을 느끼는 모순된 감정의 소산인가 싶기도 하다. 1960년대 끝물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근검절약' '국산품 애용' '호화사치 풍조 배격' 등은 내 의식의 밑바닥에 강력하게 각인돼 있다. 한편 1980년대 말 이후 한국 사회가 경험하기 시작한 과시적 소비 욕구나 일상의 세련화에 대한 갈망 또한 만만찮은 유혹이다. 나라 안 성장과 분배를 포함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끝없다. 반면, 우아하고 예쁘고 발랄한 상품은 시장에 넘쳐난다.

관계로서의 생산과 소비

관계로서의 생산과 소비라…. 하긴, 그런 강박이 지나친 선물 애호증으로 남은 건지도 모르겠다.
 관계로서의 생산과 소비라…. 하긴, 그런 강박이 지나친 선물 애호증으로 남은 건지도 모르겠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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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 사회의 문제를 되돌리자'고 주장하는 책을 근자에 몇 권 읽었다. 시장이란 게 본래 주고받는 문제일진대, 그런 '함께함'의 감각을 없애고 경제를 개인주의적이고 이윤지상주의적인 분야로 만든 것은 고작 100~200년 전부터란다. 대체 왜 돈을 버는고 하니, 따져보면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고도 한다. 경제를 다시 관계의 문제로, 시민과 공동체의 문제로 사유할 수 있다면 우리 사는 꼴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관계로서의 생산과 소비라…. 하긴, 그런 강박이 지나친 선물 애호증으로 남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건을 살 때 선물받을 사람을 떠올리기보다 만든 사람, 파는 사람을 떠올리는 일은 훨씬 어렵다. 파는 사람과의 관계가 소비의 핵심을 이룰 때가 많은데도 그렇다. 우울할 때 쇼핑을 하면 기분이 나아지는 건, 물건을 거래하는 과정이 일종의 유사 관계처럼 느껴지는 까닭이 크다. 마치 따끈한 목욕물이 타인의 온기 같은 착각을 전해주듯, 점원과의 문답은 내가 홀로가 아니고, 고립돼 있지 않고, 어엿한 주체로서 남과 마주하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선물 사기를 즐겨하는 것도, 깔끔한 매장에서 "예, 고객님" 소리를 듣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 미소가, 상냥한 응대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착각은 여전하다. 게다가 한국만큼 '고객님'이 갑일 수 있는 나라가 어디 흔한가. 유럽 상점에서 계산을 할 때마다 뭔가 낯설었는데, 계산원이 의자에 앉아 응대를 하는 탓이 크다는 걸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프랑스 어딘가에서 점원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점원이 "대체 어느 나라에서 왔는데?" 거의 경멸하는 투로 묻는다.

"흥, 까르푸라고 근무 조건이 좋은 건 아니잖아." 나도 모르게 발끈해 버렸지만, '유럽인들 시장에 관계의 자취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의심스러워했지만, 한국 사회가 더 갈 길이 먼 건 분명해 보인다. 오류의 역사가 짧다는 뜻이기도 할 게다. 소비의 수렁 속에서 허덕거리면서, 그 수렁이 다른 관심을 잡아먹는 것을 보면서, '제3의' 어떤 길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한다.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되 그것을 정돈하고 조정하고 잘 배치하는, 그런 연습이 두루 필요한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권보드래 씨는 인권연대 운영위원으로 현재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선물, #소비, #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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