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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꽤 조숙했던 것 같다. 이른바 사춘기를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부터 겪은 것 같으니 말이다. 그때 나는 요샛말로 '중2병'에 해당하는 온갖 증세를 다 갖고 있었지 싶다. '쩌는' 허세는 기본이었다. 과대망상적인 상상도 심심찮았다. 갑작스레 온 가슴을 충일하게 하는 '센티멘탈'은 음유가수나 서정시인 수준이었다. 한 번 가늠해 보시라. 가령 이런 식이었다.

열두어 살의 나는 운동장에 홀로 앉아 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봄날이거나, 고된 가을운동회 연습이 끝난 후였을 것이다. 나는 운동장 모래흙 위에 손가락으로 이름 석 자를 천천히 쓴다. 그 옆에 연월일을 또박또박 적는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험한 세상 사는 일이 급격하게 서러워진다. 따뜻한 이 봄날 나는 왜 이곳에서 이렇게 쪼그려 앉아 있는가. 훨훨 나는 나비가 되고 싶다. 뻔한 가을운동회 따위는 또 무어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따위 것이 생겨나서 여리고 감수성 예민한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가. 그냥 모든 것 때려치우고 어디로 가버리고 싶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땅바닥에 새겨 넣은 이름과 연월일 옆에 '죽고 싶다'를 쓴다. '바다로 가자'를 쓰기도 했을까. 잠시 후 나는 그것들을 황급하게 지운다. 대신 '남자 정은균 1980년 ○월 ○일 이곳에 살다'를 새겨 넣는다.

나에게 사랑을 알게 해 준 <적과 흑>

언젠가, 정말 저 먼 미래의 어느 날엔가, 내가 새겨 넣은 이 글자들에 밀린 모래와 돌흙들의 기울기와 마찰도를 근거로 내가 새긴 문구들을 재구해 낼 후손들과, 그들의 최첨단 기술을 기대하면서, 나는 더 멋진 문구를 머릿속으로 궁리한다. '세상을 사랑했던 남자 정은균'도 있었다. 심지어는 '지구 대통령 정은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과대망상증 환자였을까. 그랬을지 모른다. 우울증에 빠져 있었던 걸까. 그랬을 수도 있다.

모두가 뜬금없이 생겨난 것들이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때 만약 그런 증상이 진짜로 있었다면 그것은 스탕달의 <적(赤)과 흑(黑)>으로부터 말미암았을 것이다. 거의 틀림없다.

그때 우리 집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세계문학전집 한 질이 있었다. 한 질이라지만 많은 책이 빠져 있었다. 표지도 너덜너덜했다. 그래도 나는 그 책더미 속에 파묻혀 단테의 <신곡>이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니 하는 책들을 뭣 모르고 읽어댔다. <적과 흑>도 그렇게 만났다. 

나는 미혼의 남자 주인공 쥘리엥 소렐이 창문을 통해 레날 부인의 침실로 들어가 밀회를 나누는 대목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가난을 혐오하는 평민 출신의 청년 쥘리엥에게 지방 유지의 부인이 갖고 있는 화려한 아름다움과 풍요는 거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귀족 출신의 아름다운 여인 마틸드에게 빠져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온갖 모순적인 욕망이 뒤섞여 있던 쥘리엥 소렐이 그 모든 유혹을 충실하게 따른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나는 쥘리엥의 그런 '위험한' 사랑이 부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 나도 그런 짜릿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레날 부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주는 여인을 첫사랑으로 만날 수 있다면 쥘리엥 이상으로 더 큰 위험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겨우 열두어 살을 넘어가고 있었다. 일종의 부정적인 '19금' 효과였을까. 금기와도 같은 사랑을 나누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어린 내게는 꽤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쥘리엥 소렐은 나에게 더 큰 망상과 열정, 우울을 심어 주었다. '위험한 첫사랑'의 꿈도 쥘리엥 소렐이 내게 건네 준 터무니 없는 선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적과 흑>을 통해 쥘리엥 소렐을 만난 뒤부터 내 눈에는 또래 여자애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어 여자 친구를 만난다며 설레발을 치는 친구들이 우습게 보였다. 나는 '그것도 사랑이냐, 어리고 유치한 놈들' 하며 나만의 '위험한 첫사랑'을 간절히 꿈꾸었다.

그런 간절함 덕분이었을까. 중학교 2학년이 되어 마침내 한 '여자'를 만났다. 내가 그토록 바랐던 것처럼, 그 여자는 우리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학생과 선생님의 사랑이라니. 미혼인 쥘리엥 소렐과 기혼녀인 레날 부인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나는 '우리'에게 그들 못지 않은 '위험한 사랑'이 펼쳐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렸다. 무엇보다 용기(?)가 부족했다. 소심한 나는 선생님 얼굴을 보는 일이 늘 즐거우면서도 힘들었다. 선생님이 나를 어떻게 볼까, 어떻게 해야 선생님에게 멋지게 보일까 감을 잡을 수가 없었기에 말이다.

선생님 곁에 서는 일은 아예 짜릿한 '고문'이었다. 선생님이 내게 말을 걸거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거릴 때면 더욱 그랬다. 그때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손과 발과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곤 했다. 목소리가 떨려 어쩔 줄 몰라 하던 내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기만 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내 사랑'

그해 6월쯤이었을까. 교정 곳곳에는 보라색 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진하디 진한 등꽃 향기가 코끝을 맵싸하게 하던 어느 날, 선생님은 우리를 교정 벤치 아래로 이끌었다.

그때 우리가 읽은 게 황순원의 <소나기>였을까. 아니면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었을까. 내 우둔한 머리는 도무지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흐드러진 보라색 등꽃과 그 꽃잎들에서 알알이 내뿜던 진한 향기, 그리고 선생님의 맑은 목소리와 화사한 웃음은 어제 일인 듯이 또렷이 떠오르는데도 말이다.

나는 선생님과 '위험한 사랑'은커녕 '평범한 사랑'조차 해보지 못했다. 아니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이었을 수 있겠다. 나는 힘겹지만 짜릿해지는 그 느낌을 떨칠 수 없어 선생님을 보기 위해 일없이도 교무실을 들락거렸다. 수업을 할 때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또랑또랑한 눈빛을 내기 위해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곤 했다. 그때마다 눈이 작은 내가 얼마나 한심스럽고 미웠는지 모른다.

교사가, 가능하다면 국어 선생님이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도 선생님 덕분이었다. 어서 빨리 국어 선생님이 되어 선생님과 같은 교단에 서고 싶었다. 선생님과 같은 교단에 서서 시를 읊조리고 소설을 읽으며 살고 싶었다. 그러다가 할 수만 있다면, 쥘리엥이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과 '위험한 사랑'에 빠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이름 두 자만 간신히 기억한다. 기억에 남아 있는 선생님의 얼굴 윤곽은 흐릿하기만 하다. 분명 설렜을 첫 만남의 기억도 내게는 전혀 없다. 선생님이 어떤 옷을 즐겨 입었는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내게 심심치 않게 해 주었을 이런저런 말들도 단 한 마디를 간직하고 있지 않다.

일본의 교육운동가 우치다 타츠루 선생이 쓴 책 중에 <스승은 있다>가 있다. 그 책 가운데 '수수께끼 선생님'에 관한 대목이 나온다. 우치다 선생은 우리가 경의를 품는 이가 '수수께끼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수수께끼 선생님'은 나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또는 선생님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선생님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우치다 선생은 모든 제자가 스승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고 단언한다. '수수께끼 선생님'일 테니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실패하는 방식의 독창성에 의해서 다른 어떤 제자로도 대체될 수 없는 둘도 없는 사제 관계로 계보를 잇게 된다고 우치다 선생은 말한다.

분명 나는 선생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님에 관한 기억도 내게는 거의 없다. 선생님이 여자로서, 그리고 국어 교사로서 어떤 매력과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는지 내 딴에 정리되어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우치다 선생의 논리대로라면, 나는 선생님을 이해하는 데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도 선생님을 떠올리면 가슴이 떨린다. 온통 거칠기만 했던 그 시절 그 학교에 선생님이 함께 계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제대로 살아남을 수나 있었을까. 다른 건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늘 온화했던 선생님 덕분에 망상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내 가슴이 자차분해졌던 것만은 틀림없다.

'사랑'의 제일 조건이 무엇일까. 정답이 있을 리 없다. 말도 안 되는 이 질문에 나는 '애틋한 그리움'이라는 교과서적인 답을 내놓고 싶다. 나는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여전히 애틋하게 그립다. 사랑이다. 나는 국민학교와 군대 시절에 수년을 함께 살다 헤어진 개 '깐돌이'와 '장군이'도 머리에서 깊고 절실하게 떠오를 때가 많다. 이 역시 사랑이다.

그때 선생님은 이십대 중후반쯤 되었을 것이다. 지금쯤 분명 어딘가에서 머리 희끗한 초로의 모습으로 살아가실 것이다. 그 선생님이, 내가 국어 교사로서 살아가는 일에 자괴감을 느낄 때 불현듯 떠올라 나를 애틋하게 만든다. 물경 30년 세월이 훌쩍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선생님을 향한 내 마음이 '사랑'이었다고 말해도 되지 않겠는가. 선생님과의 만남이 '위험한 사랑'으로 휩쓸리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다.

덧붙이는 글 | '사랑이 뭐길래~ 응모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위험한 사랑', #국어 선생님, #<적과 흑>, #스탕달, #애틋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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