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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은 18년간 지속됐습니다. 이 세월이 얼마나 긴가 생각을 해보면, 이명박 5년 노무현 5년 김대중 5년 김영삼 3년 이렇게 더해야 18년이죠. 이 사람들이 스쳐간 기간을 혼자서 다 한 거예요. 재위기간이 50년이 넘었던 영조를 제외하면,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재임기간도 18년이 채 안됩니다."

박정희 정권이 시작된 1961년 이후 우리사회는 어떤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밀도 있고 빠른 변화를 겪었다. 경제가 고도로 성장했던 1960년대, 사람들 삶은 풍요로워졌을까?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천정환 교수는 박정희 시대가 거쳐 온 18년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강조하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을 시작했다.

천 교수는 지난 대선 전 한국 현대사를 다룬 책, <1960년을 묻다>의 공저자로, 최근에는 경향신문의 기획연재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에 필진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 근대사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한국사회의 자살 현상을 다룬 <자살론>을 펴내기도 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박정희 시대가 거쳐 온 18년이 얼마나 길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박정희 시대가 거쳐 온 18년이 얼마나 길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 김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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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으면서도 다른 쌍생아, 박정희와 김일성

"박정희 체제와 김일성 체제는 다르면서도 같은 쌍생아 같은 존재였습니다. 쓰기에 껄끄럽고 너무 쉬운 표현이지만, 62년부터 72년 사이에는 '적대적 공존'을 했다고 볼 수 있죠. 당시에는 전쟁에 준하는 수준의 긴장 상태가 한반도에 조성되었습니다."

천 교수는 당시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을 예로 들었다. 그 사건은 북한 124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사건 이후 남북한 긴장관계는 극에 달했고 박정희가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남한에 예비군이 창설되고, 간첩 식별 편의를 위해 주민등록제도가 도입됐다. 실제로 박정희와 육영수의 주민등록번호 뒷번호는 상징적으로 각각 1000001, 2000002 였다.

남(南)의 중앙정보부와 북의 대남사업부는 전쟁에 준하는 수준의 물어뜯고 뜯기는 첩보전을 이어갔다. 서로 공비나 특수부대를 파견해 반대쪽 체제를 흔들고 내부 체제 유지를 위해 간첩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드러난 거의 대부분 무장공비 사건은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난 것이다.

누구나 간첩이 될 수 있다

동백림(東佰林, 동베를린) 사건은 당시 '법적으로' 간첩을 규정하고 처벌할 요건을 새로 쓴 대표적 사건이다. 동백림 사건을 계기로 유학생의 정치적 성향까지 남쪽의 '국가기밀'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간첩죄 구성요건이 완화돼 무한한 정치적 자의성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시기였다.

"임석진이란 사람은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고학을 하던 뛰어난 학생이었어요. 그가 1960년 쓴 박사 학위 논문 <헤겔의 노동 개념 -정신현상학 해설 시론>이 당시 서독 TV에서 소개되고, 그가 번역한 <정신현상학>이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헤겔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정도였죠. 그의 나이 불과 29세 때 일이에요."

학자로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임석진은 그의 삶을 통째로 바꿀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던 은인들이 6·25 전쟁 때 모두 월북한 터라 임석진은 고민 끝에 북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방북 초청자의 의도와 달리 북에 도착한 그는 북한 사회가 잘못돼 있는 곳이란 걸 직감한다.

그럼에도 임석진은 이후 한 차례 더 방북한다. 이미 아내를 맞이하고 남한 명지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은 상태였지만, 북한과도 관계가 깊어진 상태였다. 공작원으로부터 '한번 더 만나보지 않겠습니까'라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2차 방북 때는 조선노동당 입당원서까지 쓰게 된다.

지식인계 흑역사로 남은 종북몰이 동백림 사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북한에서 살 순 없어서 임석진은 귀국했어요. 고민 끝에 임석진이 한 행동은 제가 생각하기에 남북 대결 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행동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친척뻘 되는 한 친구에게 방북 사실을 고백했어요.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겠냐'고 물었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끝나지 않은 동백림 사건'편에 출연한 임석진씨가 당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끝나지 않은 동백림 사건'편에 출연한 임석진씨가 당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 MBC 화면갈무리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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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공화당의장, 김형욱 정보부장 중 한 명과 연결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임석진은 마침내 1967년 5월 17일 오후 3시,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 독대한다.

천 교수는 당시 중앙정보부 김형욱의 "가장 철저하고 돌쇠 같았던" 반공 공작을 떠올렸을 때, 이것이 굉장히 지혜로운 결정이었다고 평가한다. 임석진은 "함정의 틈바구니에 끼어버린 사람들 모두가 살 수 있는 방안"을 구하기 위해, 대통령과 2시간 넘는 대면에서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중앙정보부는 특별수사대를 꾸려 프랑스와 독일의 유학생들을 납치해 온다. TV에 나서기를 좋아했던 김형욱은 이들 명단을 직접 <대한뉴스>에서 발표했다. 임석진은 "대통령이 뒤에 있어서" 직장도 잃지 않았고, 당시 간첩이 당해야 했던 불법 감금과 온갖 고문을 면할 수 있었다.

반면 그의 실토로 잡혀온 이응노 화백, 윤희상 작곡가 등 유학생 동창들은 '간첩혐의'를 쓰고 폭압을 당했다. 당시 잡혀온 사람들 가운데 독일 시민권자도 있었다. 독일 정부는 이 일로 남한과 국교를 단절하려고까지 했다. 임석진은 극히 '운 좋게도' 홀로 살아 나온 셈이다.

암울한 시대 지식인의 '웅얼거림'

"남북 대결이 만든 희한한 일이죠. 북한에 어쩌다 두 번 가게 됐고 당시 관례였던 입당원서를 썼지만 북이 맘에 안 들었고. 그럼에도 임석진은 독일 철학의 대가로 살면서 외국에도 못 나가고 평생을 학문세계 안에서만 살았어요. 현실에서 발을 빼고요."

1979년에 와서야 비로소 해외여행이 가능해졌을 정도로 그의 삶은 지속적인 통제를 받았다. 12년 간 독일 등 외국 학계와 교류하는 것조차 일절 불가능했다. 그러던 그가 박정희가 죽던 무렵부터 작게나마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운영하던 학술지 <헤겔철학>에 실리는 편집자 서문 등을 빌려 학문의 영역과 현재 한국이 처한 현실의 연관성을 여러 차례, 그러나 '잘 들리지 않게' 발언했다.

칠순 노인 갈릴레이가 종신형을 선고받은 법정에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며 중얼거렸던 것처럼 임석진은 '말하지 못하는 입'으로 계속 뭔가를 말해왔던 것이다. 당시 '간첩'이 되지 않고 살아남은 상당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침묵'으로 삶을 지켜냈다. 학문과 예술이 가진 '가치중립'의 힘에 기대어 침묵해온 스스로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채였지만 '연명'할 수는 있었다.

지식인의 살기 위한 전향, 그러나 역시 사형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 역시 1960년대 대한민국 사회를 엄청나게 흔들어 놓았던 최대 간첩사건이다. 남북한의 분단 현실 속에서 지식인들이 품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은 '통혁당 사건'을 촉발했지만 결국 158명이 검거되고 50명의 구속자를 내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성공회대 신영복 선생, 한명숙 전 국무총리 남편 박성준 선생. 서울대 사회대 관계자들이 많이 잡혀갔어요. 사건 주모자 가운데 하나였던 김질락도 삼촌인 김종태의 권유로 북한을 왕래하다가 68년 중앙정보부에 발각돼 감옥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옥중에서 전향서를 씁니다."

김질락은 옥살이 중 젊은 처와 어린 딸이 보고 싶어 긴 단행본 분량의 전향서를 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살기 위해서' 자신이 믿던 모든 생각을 부정하고 반공주의자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나 김질락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박정희 정부는 7.4남북공동성명 직후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검사님, 이제 연극 그만하시죠"

사형장에 가는 순간까지 '검사님, 이제 연극 그만하시죠'라고 말했을 만큼 사형 집행을 믿을 수 없었던 '전향 간첩' 이수근도 있었다.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그의 탈출 사건 전말은 1967년 영화 <고발>로 그려졌다.

영화 <간첩>,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 남북한의 분단상황을 보여주는 간첩영화가 많다.
 영화 <간첩>,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 남북한의 분단상황을 보여주는 간첩영화가 많다.
ⓒ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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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을 다룬 영화가 많죠. 최근에는 김수현이 나왔던 <은밀하게 위대하게>도 그렇고. 작년에는 김명민과 염정아가 나온 <간첩>이란 영화도 있었죠. 1967년에는 '고발'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반공영화가 제작됐어요."

북한 인텔리 출신 이수근은 1967년 판문점을 탈출하여 귀순했다. 북한 내에서 정치적 궁지에 몰리자 남한으로 망명한 것이다. 이수근은 귀순 후 남한에서 새 아내를 맞이하고 반공강연까지 한다. 그러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처럼 그는 중립국을 원했다. 자유를 찾아 온 그에게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가 이어지자 그는 체제 변화의 부적응을 호소하다가 결국 출국을 결심한다.

1969년 1월 27일, 이수근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편지를 남기고 북에 두고 온 본처의 조카 배경옥과 함께 여권을 위조하여 캄보디아로 출국한다. 그러나 결국 베트남 사이공 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직원들에게 체포된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이수근이 간첩활동을 위해 위장귀순을 했다"고 발표한 뒤, 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수근 사건'을 마침내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규정했다.

사람들은 결코 바보가 되지 않는다

"박정희 정권 때 같은 폭압은 언론의 족쇄를 채워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사람들은 결코 바보가 안되거든요. 그런데도 제도나 구조는 굉장히 강고한 틀을 지워줘요. 그 틀의 주어짐이 강하면 주체가 할 수 있는 역량이나 범위도 사실은 줄어들거나 감퇴하죠."

천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사고방식을 결정짓는 것은 '주체와 구조'라며 구조를 넘어서는 주체의 용기를 강조했다. 그는 "선거 때 투표로 복수할 거야" 같은 식의 사고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력한 '합법주의 같은 것'이 팽배해 선거라는 지극히 제한적인 방법의 주권 행사만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정권에서는 (명박) 산성을 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주체와 구조 사이에서 구조에게 더 힘을 실어주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천 교수는 그 대안으로 '상상력의 발전'을 제시했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이 산성을 넘고 경찰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정권은 굉장히 불안한 것 같아요. 강력해 보이지만 불안함을 이렇게 종북몰이로 표현하는 것 같아요. 안보의 상상력으로 모든 걸 재단하는 방식이 계속된다면 전과 같은 상황만 되풀이되겠죠. 그러나 '권불십년'이란 말도 있듯, 우리 정권은 5년만 지나면 바뀌지만 우리 마음은 오래가는 거잖아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더 오래가니, 언론과 교육이 그것에 힘을 실어줘야죠."

덧붙이는 글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인문교양특강I>은 정희진, 진중권, 안광복, 주일우, 천정환, 이상수, 이택광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의를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태그:#종북몰이, #통혁당, #명박산성, #간첩, #동백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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