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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보아도 친근한 구색 하나 없는 낯선 사내에게 먼저 말을 붙인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친근한 구색 하나 없는 낯선 사내에게 먼저 말을 붙인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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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 앉아있는 그에게 눈길이 꽂힌 것은 독특한 차림새 때문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지만 그는 검은 우산을 둘둘 말아 손에 쥐고 있었다. 변덕스런 더블린 날씨 탓이라 생각했다.

움푹 들어간 작은 눈에 턱수염은 밀고 콧수염만 기른 꼴은 까칠해보였다. 특히 좌우 챙을 바짝 감아올린 모자는 불량한 카우보이를 연상시켰다. 다쳤는지 왼쪽 손을 빨간색 장갑으로 감아 넓은 천을 이어 목에 걸고 있었는데 자신을 더 위압적으로 보이게 하는 포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친근한 구색 하나 없는 낯선 사내에게 먼저 말을 붙인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그는 '개구리복'이라 불리는 한국 군복 상의에 '학군단'이라는 한글 표장을 달고 있었다.

"한국 옷이네요, 군인인가요?"

그는 대답 대신 나의 위아래를 먼저 훑었다. 그리고 스스로 연출한 모양처럼 퉁명스레 반문했다.

"한국에서 왔어요? 북? 남?"
"남한이요."
"조금 일찍 오지 그랬어요. '아서 데이(Arthur's Day)'에는 기네스도 주는데…."

그때서야 그에게서 약간의 술 냄새를 맡았다. 그는 날씨가 좋아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네스 한 병을 마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사내에게서 느꼈던 어설픈 불량기가 사라졌다. 날씨가 좋아 맥주 한 병 마셨다는데….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술 '기네스'

아일랜드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만큼이나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한 번 술자리가 시작되면 돌아가면서 술을 사는 것도 한국과 비슷하고, 한번 얻어 마시면 언젠가는 기필코 술자리를 마련해 술대접을 하는 것도 한국과 똑같다.

술과 술자리를 좋아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기네스(Guinness)는 흑맥주 이상의 술이다. 심지어 기네스는 하프와 함께 아일랜드를 상징하기도 한다.

아서 기네스는 계약금 100파운드, 일년 임대료 45파운드로 더블린에 버려진 양조장을 9000년 동안 임대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더블린에 있는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엔 계약서 원본이 전시돼 있다.
 아서 기네스는 계약금 100파운드, 일년 임대료 45파운드로 더블린에 버려진 양조장을 9000년 동안 임대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더블린에 있는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엔 계약서 원본이 전시돼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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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에 있는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창고(store)로 쓰던 곳을 개조해 지난 2000년 문을 열었다.
 더블린에 있는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창고(store)로 쓰던 곳을 개조해 지난 2000년 문을 열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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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표현처럼 "이 모든 이야기는 한 장의 계약서에서 시작"한다. 1759년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는 더블린시와 가동이 중단된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St. James Gate)에 있는 한 양조장을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한다. 임대 기간은 무려 9000년이었고, 계약금 100파운드에 해마다 사용료 45파운드를 내는 조건이었다.

아무리 가동이 중지된 상태였지만 4에이커에 이르는 부지에 방앗간과 마굿간, 200톤의 건초를 저장할 수 있는 헛간 등이 딸린 양조장이었다. 특히 임대 조건에는 술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질 좋은 물을 9000년 동안 맘껏 이용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횡재나 다름없었다.

이런 조건이면 특혜 시비에 휘말렸을 법한데 실상은 전혀 딴판이었다. 되레 더블린시는 아서 기네스가 마음을 바꿀까 걱정했다. 양조장이 있던 자리는 리피강 둔치 옆 늪지대로 흉가로 변한 양조장은 처치하기 곤란한 골칫덩어리였다. 사려는 사람은커녕 공짜로 줘도 사용하겠다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곳을 임대해서 사용하겠다고 하니 더블린시 입장에선 아서 기네스는 구세주와 같았다.

아서 기네스와 더블린 시가 체결한 계약서는 아일랜드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한 관광안내자는 "아서 기네스의 변심을 우려한 더블린시가 영구적으로 양조장을 처리하기 위해 그가 알아먹지 못하는 라틴어로 계약서로 썼다"고 말했다. 물론 흥미를 위해 꾸며낸 얘기다.

아일랜드는 가톨릭의 영향이 그 어느 나라보다 크다. 수도사들은 기독경전을 라틴어로 기록하는 작업을 했고, 학교에선 라틴어를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 나라다. 라틴어는 아일랜드에서 종교언어이자 권세가들의 고급 사교언어였다. 양조장을 임대할 정도의 재력과 권세가 있던 아서 기네스와 더블린시 측이 라틴어로 계약서를 작성한 것은 당시 아일랜드에서 라틴어가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계약을 마친 아서 기네스는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 양조장(St. Jamess's Gate Brewery)'을 설립해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맥주의 재료는 보리, 호프, 이스트, 물 등 네 가지. 이 맥주가 바로 기네스다. 기네스는 현재 약 150개 나라에서 매일 1천만 잔 이상이 팔리고 있는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다.

기네스는 기타 첨가물을 넣지 않은 보리 발효맥주(에일 Ale)다. 기네스의 상징색이 되어버린 매혹적인 검은색은 구운 보리를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빛깔이다. 보리를 볶아 만든 보리차의 빛깔이 검붉은 것과 같은 이치다.

기네스로 절인 소고기로 만든 ‘비프 앤드 기네스 파이(Beef and Guinness Pie)’.
 기네스로 절인 소고기로 만든 ‘비프 앤드 기네스 파이(Beef and Guinness Pie)’.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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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 스토어 하우스를 찾은 이들이 기네스 특유의 발효 향을 맡아보고 있다.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를 찾은 이들이 기네스 특유의 발효 향을 맡아보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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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는 아일랜드에서 술이고 밥이며 약이다. 그래서 작가 페트리샤 레비(Patricia Levy)는 <아일랜드>에서 "그들(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있어 기네스는 그냥 맥주가 아니라 삶의 한 방식"이라고 했다. 

먹을 것 부족했던 아일랜드 사람들은 새참 대신 기네스를 마셨다. 일종의 노동주인 셈인데 한국에서 쌀이나 보리로 빚은 막걸리 한 사발을 새참 대신 들이켰던 것과 마찬가지다. 보리로 빚은 술이라 속을 든든히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기네스로 만든 요리도 있다. '비프 앤드 기네스 파이(Beef and Guinness Pie)'로 기네스로 절인 소고기로 만든 일종의 아이리시 스튜(Irish Stew)다.

산모에겐 미역국 대신 기네스를 먹게 했다. 민간에서 기네스에 있는 성분이 산모의 뼈를 튼튼하게 해준다는 속설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기네스는 치료제로 처방되기도 했는데 자양강장제는 물론 몇 가지 어린이 질병에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실제로 기네스는 1930년대에 "기네스가 워털루 전투에서 부상당한 기병 장교의 회복을 도왔다"고 광고를 했다.

건배 대신 '아서'를 외치는 이유

발렌타인 데이(Valentine Day)가 연상되는 '아서 데이(Arthur Guinness Day)'는 지난 2009년에 처음 시작됐다. 흑맥주 기네스가 탄생한지 25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전 세계에서 온 약 5000명의 기네스 팬들은 더블린에 있는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Guinness Store House)'에 모여 '건배(Cheers)'대신 '아서(Arthur)'를 외쳤다.

더블린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맨 위층엔 스카이 라운지가 있다. 야경이 좋아 더블린 시민들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온다.
 더블린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맨 위층엔 스카이 라운지가 있다. 야경이 좋아 더블린 시민들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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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스카이 라운지 바에서는 방문자들에게 기네스 생맥주를 판다.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스카이 라운지 바에서는 방문자들에게 기네스 생맥주를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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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데이'는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2013년 기네스 축제'는 55개 나라에서 열렸다고 한다. 얄팍한 상술로 '발렌타인 데이'의 아류를 자처한다는 비판이 많다. 하지만 자본주의 전복을 꿈꿨던 혁명가 체 게바라조차 가장 인기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시대다. 지나친 정색이 소비재가 애초에 품었던 유행을 잠재울 수 있을까. 자본주의를 산다는 것은 이런저런 기호(Sign)를 탐색하게 한다.

그날 저녁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를 찾아갔다. 2000년에 문을 연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는 원래 창고자리였다. 방문객들은 출입구를 지나 층층이 연결된 길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기네스의 역사와 제조방법 등을 소개받는다. 스토어 하우스 맨 위층엔 기네스 맥주를 파는 스카이라운지가 있다.

팔방으로 난 스카이 라운지 통유리창은 더블린의 야경을 담은 액자가 되었다. 친구며 가족, 연인과 함께 온 이들의 잔 부딪치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경쾌했다. 가까이 있기에 서로가 서로를 부를 수 있는 밤. 기분 좋게 호명되어지는 이국의 이름들 사이로 슬쩍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맥주를 더욱 맛깔스럽게 한다는  질소가 생맥주잔을 작은 폭포로 만들었다. 그리운 것들이 모두 일어나 우르르 치솟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까맣게 아래로 침잠해갔다. 그리움은 다시 무거운 침묵이 되었다.


태그:#기네스, #흑맥주, #더블린,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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